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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시학 - 스물네 개의 시적 풍경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3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소식은 《동파지림(東坡志林)》에서 왕유의 시와 그림을 두고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시에서 그림의 요소를 보고, 또 그림에서 시적 요소를 본다는 의미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시·서·화 삼절을 높이 꼽았고, 또 지향해 왔다. 시와 서, 화가 상통 조화를 이루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서화(書畵) 이론에서 서(書), 화(畵) 용어를 시(詩)로 바꿔 적용시켜 보면 참으로 묘하게도 서화론이 시론으로도 손색이 없다. 반대로 시론에 시 대신 서화를 적용시켜도 서화론이 된다. 물론 시, 서, 화 고유의 특성과 이론 체계가 따로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시, 서, 화가 본질적 측면에서 교감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안대회 교수의 《궁극의 시학》(문학동네, 2013)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심도 깊게 분석한 《궁극의 시학》은 2011년 1년 동안 매주 네이버 카페에서 온라인 강의 형식으로 연재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나는 연재 사실을 진작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시간과 정성 부족으로 모두 챙겨 읽지는 못하였다. 연재 원고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하는 것은 우리 출판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처럼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룬 글이 7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묶여져 나온 것에 반가움이 앞선다.
《시품》은 스물네 가지 시의 풍격을 논한 글이다. 웅혼(雄渾), 충담(沖淡), 섬농(纖穠), 침착(沈著), 고고(高古), 전아(典雅), 세련(洗鍊), 경건(勁健), 기려(綺麗), 자연(自然), 함축(含蓄), 호방(豪放), 정신(精神), 진밀(縝密), 소야(疏野), 청기(淸奇), 위곡(委曲), 실경(實境), 비개(悲慨), 형용(形容), 초예(超詣), 표일(飄逸), 광달(曠達), 유동(流動) 이렇게 24개의 각 풍격마다 4자 12구 48자로, 총 1,152자로 쓴, 짧은 시학서이다. 저자는 당나라 말엽의 시인 사공도로 의심 없이 알려져 있었지만, 사공도가 아닐 수 있다는 견해가 1992년 스티븐 오언에 의해 제기되었고, 지금은 사공도의 저작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우위에 있다.
《시품》이 지닌 의미를 저자는 해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시품》은 그 추상성 덕분에 중요한 시학의 진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한 방식은 인간과 예술과 문학을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자 한 동양 고유의 방식이자 심미적 판단의 틀이다.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의 진리를 표현한 시학의 모델로서 시적이기까지 한 《시품》은 비평임에도 불구하고 감상해야 할 일종의 문학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시품》을 이해하는 것은 지난날의 시 전반을 이해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8p)
《시품》은 시를 논할 때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의 창작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축윤명은 《시품》을 서(書)로 썼고, 문팽은 《시품》을 새겨 《이십사시품인보(二十四詩品印譜)》를 남기는 등 《시품》을 내용으로 한 화보와 인보가 여럿 제작되었다. 《시품》은 명·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선과 이광사는 그림과 글씨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시품》을 그림으로 제작한 것 가운데 한두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다. 《시품》을 그림으로 옮기는 첫째 원칙은 형상성이다. 구체적 이미지를 통하여 추상적 의미를 획득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의 중심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시품》 각 풍격을 그린 반시직의 그림이 정선, 장부의 그림보다 더 추상적인 것은 “초이상외 득기환중(超以象外 得其環中”, 즉 “형상 밖으로 훌쩍 벗어나 존재의 중심을 손에 쥔다.”는 시학을 극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시품》이 동아시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것일까? “《시품》이 지닌 미학과 표현 방식에는 당시 예술가들의 심미안을 강하게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고, 그 미학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18p)
그렇다면 오늘날 《시품》은 어떠한 미학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이 바로 《궁극의 시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시품》은 시의 창작과 감상을 목적으로 한 시학서이다. 그러나 시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서예, 회화, 전각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삶의 방향과 태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사회에서의 문인적 삶은 전통사회와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현대사회에 전통적인 문예 가치와 미학을 그대로 적용시키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품》에서 제시한 풍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적, 예술가적 사유와 풍모에서 소홀하게 여겨왔거나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던 풍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전통시대에 동아시아 미학의 중요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궁극의 시학》은 《시품》의 각 풍격에 대한 해설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저술 목표인 “동아시아 지성인의 미학과 그 궁극적 담론인 인생의 품격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을 성취해냈다는 데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자구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꼼꼼하게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고증까지 마다하지 않은 자세가 바로 이 책에 신뢰를 부여하게 한다. 나아가 시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림에도 큰 비중을 두어 《시품》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하나하나 분석하였다.
개인적으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의 이광사의 글씨이다. 정선의 그림에 3년 후 서예로 시품 각 풍격을 쓴 이광사의 글씨는 전, 예, 해, 행, 초서의 다양한 변화로 풍격에 부합하는 서예 작품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