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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책이 여섯 권 정도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허삼관 매혈기』(푸른숲)를 읽은 게 벌써 8년이 지났다. 그 동안 위화 소설은 국내 독자들에게 인지도를 넓혀 간 것 같다. 정치(精緻)하지 못한, 어찌보면 느슨하기까지 하던 『허삼관 매혈기』는 재미에 웃음과 눈물을 섞어 가슴을 먹먹하게 틀어막았더랬다.
그리고 8년이 지나 휴머니스트에서 출간한 『형제』(전3권)를 관심 가지고 뒤적거려본다.

  

위화의 홈페이지(http://blog.sina.com.cn/yuhua)에는 『형제』의 한국어판 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這是《兄弟》韓文版封面, 今年六月由韓國人文主義者出版社出版. 譯者是崔容晩先生. 他也是《許三觀賣血記》和《在細雨中呼喊》的韓文版譯者. 在韓國出版的《兄弟》分成了三部, 第1部是中文版的上部, 第2部是中文版下部里八十年代的內容, 第3部是中文版下部里九十年代以后的內容. 韓國的出版社爲《兄弟》一書建立了博客 : http://blog.naver.com/yuhuabrother

한글로 옮겨보면 대충 이렇다. 

이것은 올해 6월, 한국의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출판된 <형제>의 한국어판 표지이다. 역자는 최용만 선생으로, 다른 책으로는 <허삼관 매혈기>, <가랑비 속의 외침>의 역자이기도 하다. 한글판 <형제>는 3부로 나눴는데, 제1부는 중국어판의 상부(上部), 제2부는 중국어판 하부(下部)의 80년대의 내용까지이다. 제3부는 중국어판의 하부(下部) 90년대 이후의 내용까지이다. 한국의 출판사는 <형제> 전용 블로그를 개설하였다. : http://blog.naver.com/yuhua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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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현대문학」 정기구독 연장 혜택으로 받은 『침묵예찬』을 읽다가 밑줄 그어놓은 부분 가운데 하나를 옮겨본다. 

“내가 반 고흐의 그림을 처음으로 본 것이 제네바의 바젤에 있는 미술관에서였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스위스 여행 중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문짝이 돌쩌귀 밖으로 이탈하듯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열여덟 살 때였던가, 나는 귀가 잘린 그 사람의 작품들을 복사판 그림들과 그림엽서들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내 방의 벽 한구석에 태양이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도는 그의 그림을 붙여둔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실제 그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사실은 나를 산산 조각내 놓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튜브를 꾹꾹 눌러 짜서 어찌나 두껍게 발라 놓았는지 층층으로 포개진 덩어리가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화폭에 제대로 붙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인 다량의 물감 무더기, 물감을 입혀서 선들을 어찌나 짓이겨 놓았는지 그림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는 오직 아우성치는 듯한 색조들 속에서 요동치는 요철들의 혼합밖에 알아볼 수 없고 화집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대강이라도 찾아보려면 한두 걸음 물러서야 하는 그 독특한 화법, 그야말로 다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창조방식이 그날 나에게는 격렬한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회화 작품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림이 실제로 걸려 있는 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왜냐하면 인쇄된 복제품이란 형상의 막연한 유사점 외엔 실제 그림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침묵예찬』, 마르크 드 스메트 지음,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刊, 2007년, 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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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도 있고, 못 만날 사람이 있지만” <여행생활자, 유성용>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사두고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들쳐보게 된다. 어떤 때는 ‘이 책을 왜 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대부분 그 책을 사야 하는 이유가 꼭 있는 편이다.

유성용의 『여행생활자』(갤리온, 2007년)를 사게 된 것은 저자 서문에 쓴 앞의 문장 때문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지금까지 배우고 강조받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약속은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지킨 약속 못지않게 지키지 못한 약속도 많고,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약속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도 ‘약속은 지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스스로 마음의 빚을 지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지나 않았나.
“세상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도 있다”는 그 말에 적어도 이 저자의 여행기는 과장과 거짓을 섞어서 늘어놓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못 만날 사람도 있다”는 구절에서도 위안을 얻는다. 만나야 한다고, 만날 것이라고 굳게 믿어온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만나지도 못한 사람이 얼마인가. 어쩌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믿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스스로 그러한 착각을 만든 것은 아닌가. ‘못 만날 사람도 있다’는 심리적인 여분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결국 세상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드물고, 여행을 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내가 다 보지 못한 것, 또 보지 못할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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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 산문전집 『산거일기』(문학동네)를 읽다가 밑줄 그어놓은 것들 가운데 일부를 적어본다.

“나는 오늘 그리도 애지중지하던 머리를 깎아버렸다. 구렁이같이 흉스러운 내 자신의 집착성에 대한 증오의 반발이었다. 그리고 장삼을 입고 합장해보았다. 외양의 단정은 내심의 정제에 결코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겸손과 하심(下心) - 얼마나 평안하고 화평한 심경인가?” (15쪽)

“절간은 방 따뜻한 맛으로 산다는 말과 같이 아닌게 아니라 따끈한 방안에 앉아 고요히 타는 램프를 바라보며 빈 골을 울리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은 여간 아취로운 풍정이 아니다.” (20쪽)

“그러나 이 여성멸시의 사상은 불교 본래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그 당시의 특수한 사회조직의 영향으로, 남성중심 사상의 반영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24쪽)

“모든 인간고의 근거는 무어라 하여도 ‘식(食)’과 ‘성(性)’이다. 먹을 것이 결핍한 곳에 불안이 있고, 성의 만족을 얻지 못하는 곳에 우울이 있다. 이 불안, 이 우울을 일소하지 못할 때 백의 교화, 천의 전도가 사실 무슨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 (29쪽)

“어디서나 무슨 소식이 있을 듯하여 종일 기다렸으나 편지 한 장 오지 않았다.
저녁 후에 과연 한 줄기 소나기가 왔다.” (86쪽)

“오후에 어제 하다 둔 도벽(塗壁)을 마치다.
세상일이란 더러워진 벽인가?
닦을 줄 모르고 덮기만 한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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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필진네트워크에서 구본준 기자의 임석재 교수 서재에 관한 글을 읽다. 무릇 저술가라면 이 정도의 자료실은 가지고 있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그 자료들이 그 자리에 모이기까지 자료를 모은 이의 노력을 먼저 생각했고, 더 나아가 그 자료들이 낳은 그이의 저술서들을 생각했다. 그만한 노력 없이 어찌 인정받을 만한 결과물을 낳을 수 있겠는가?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 어젯밤 텔레비전에서 들은 강호동의 말 ; 씨름할 때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뛰는 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일요일은 쉬었단다) 10년을 하였다.
둘, 조선 정조 때의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 1760~1813)에 관한 에피소드. 이옥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창작에 몰두하였다. 개성과 진정성이 담긴 글들을 실험적인 문체와 형식에 담아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받지 못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들여다보았다. 박학하다고 칭송이 자자한 이가 있어 그에게 질문을 던졌더니 독 속에 들어앉아 별을 세는 꼴이었고, 사부(詞賦)와 고문(古文)을 잘 짓는다고 알려진 이가 있어 글을 뽑아 읽어보았더니 남의 글을 훔쳐내어 흉내내는 꼴이었으며, 시문(時文)에 능하여 과장(科場)에서 기예를 뽐내는 이가 있어 구해다 감상하여 보니 모두 허수아비를 꾸며 저잣거리에서 춤추게 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글 솜씨에 힘입어 저들은 모두 큰 도읍에서 명성을 날리고, 태평성대에 활개를 치고 있다. 살아서는 과장과 관각(館閣)에서 솜씨를 발휘하며 여유를 부리고, 죽어서는 또 글이 목판에 새겨지고 빗돌을 수놓았다. 몸은 죽어도 문장은 죽지 않는다. 낮은 것도 그들이 쓰니 높아지고, 자잘한 것도 그들이 쓰니 크게 되어 모두들 자신의 문신(文神)을 저버리지 않았다. 유독 나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술을 마시듯 경서를 탐닉하고, 여자를 탐하듯 서책에 빠진다 하여도 마찬가지다. 눈과 귀에서 놓친 것을 손으로 베껴 공부하여도 나를 박학하다고 칭찬하는 사람 하나 없고 마을의 멍청한 아이들조차 도리어 모욕한다.” - 『선비답게 산다는 것』(안대회 지음, 푸른역사, 182쪽)

     

     

   

강호동이 어느 순간 벼락같이 나타나서 씨름판을 제패한 것이 아니다. 명성을 떨치기까지 노력 없이 천하장사에 오를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것. 물론 그의 타고난 힘과 유연성, 상황에 대처하는 반사신경과 순발력 등은 씨름선수로서 천부적인 것임에 분명하다.(먼저 쓰러질 듯 하면서도 넘어가지 않고 버드나무처럼 휘며 버티는 그의 유연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만기와의 경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노력 없이 이러한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꽃피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 두 시간씩 십년을 쉬지 않고 지속하면 이룰 수 있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강호동보다 더한 노력을 하고서도 씨름선수로 명성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옥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할 수 있겠다. 물론 지금은 눈 밝은 이들에 의하여 그의 뛰어난 글들이 소개되고 알려지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가 처한 현실에서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이옥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글’을 쓰기 위하여 노력에 노력을 더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소품체를 불온시한 정조에 의하여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1800년에 완전히 사면되었으나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불우하게 생을 마친다.

위에 인용한 글을 읽다보면 200년이 흘렀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옥 전집은 구입해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하였고, 산문집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심경호 옮김, 태학사, 2001년)를 읽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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