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산책
정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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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정경시인은 69세에 첫 시집을 펴낸 늦깎이 작가다. 오랜 시간 삶을 통과해온 이의 언어는 조급하지 않으며,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쌍둥이 손자를 돌보는 일상과 글쓰기라는 소박한 루틴 속에서 길어 올린 감정들이 시 전반에 잔잔히 스며 있다. 특히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회상은 반복적으로 호출되며, 계절의 순환 속에서 기억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봄이라는 계절은 이 시집에서 단순한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기억과 그리움이 가장 선연하게 피어나는 정서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 시집의 중심 모티프인 ‘산책’은 물리적 이동을 넘어선 사유의 행위로 확장된다. 시인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마주하는 사물과 풍경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시간과 관계, 그리고 기억의 층위를 천천히 풀어낸다. 이는 일종의 내면 대화에 가깝다. 외부 세계를 응시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중의 시선이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형식적으로도 이 시집은 전통적인 서정시의 압축과 은유를 과감히 덜어낸다. 대부분의 작품이 산문에 가까운 길이를 지니며, 일상어에 기반한 평서문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선택은 독자에게 난해함 대신 친숙함을 제공하고, 시를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 없이 시 속으로 스며들게 하며, 읽고 난 뒤에는 묘하게 맑아지는 정서를 남긴다.


또한 이 시집은 개인의 회고록적 성격을 띠면서도, 자연과 가족, 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편적 공감을 확보한다. 독자는 시인의 산책에 동행하며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겹쳐 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사소한 장면들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특히 해 질 녘이라는 시간대가 주는 느긋함과 여유는, 바쁜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감사와 충만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결국 『해 질 녘 산책』은 화려한 기교 대신 삶의 결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시집이다. 이 책은 노년을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가장 깊이 있는 사유와 감정이 가능한 시기로 재조명하며, 독자에게도 자신의 ‘저녁’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묻는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을 지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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