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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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 공터의 사랑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다가,

틈틈히 읽으려 옆에 놓은 시집이였다.


내게 소설읽기란

실재보다 덜 참혹한데도,

더 불편하게 느껴져 부담스러운..

그런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몸소 

입구까지 바래다 주어야

집중이 쉬워진다.


학생회관의 상석에 앉아

신입생들 데리고 구라를 풀고 있는

졸업시기가 훨씬 지난듯한 복학생같은 하루키


그런 느낌적 느낌이라

한숨이 방울방울 맺히고,

내 기필코

말 수를 줄여서, 적을 줄이리라..고 했던,

막말러의 맹세가 흔들릴 때,

내 손을 잡아 준 허수경 시인.


그대 고운 목소리에

첫 장부터  입이 돌아 간다.


서른도 안되었던 시인이 쓴 

너무도 나이들어 버린 시는,

차라리 하루키옵하의 Evergreen이  

형형한 눈빛의 소녀가장이 보는 희망보다는

구경꾼 입장에서 덜 아프겠다는

그런 계산적 계산을 하게 한다.


인생에서 타이밍은 언제나 양아치라던데..

사람용량마다 다르게 멕이는 시간도 역시, 양아치임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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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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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첫 주에 주문한 책이

두번째 주에 도착했다.


왔으면 딩동이라도 하지..

그냥 던지고 내빼버리는 UPS덕에

집앞에서 마냥 기다렸을 책 보따리들이다. 

오자마자 읽기 시작한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육아는 체력.
쇼핑도 체력이라는 내 일생의 교훈은
소설가도 역시 체력이겠구나..까지 확장된다.

두권의 책중 1권을 저만큼 읽고,
나는 지쳐 나가 떨어진다.

연애 꽤나 해봤을 하루키.
미안한데, 우린 아닌 걸로.
내가 좀 금사빠에 육체파라서..
사설이 길어지시면,
(부시럭부시럭) 제가 좀 바빠서..

지칠 때마다 짬짬이 읽었던 허수경시인에게 
주객을 전도시킨 오류에 대한 사과를 드린다.
앞으로는 시인들 먼저 뫼시고, 하루키를 짬짬이..

여름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소리가
사연 많게도 들린다.

그려, 
허다한 잎파리마다
허다한 곡절들

들어 주는 나에게 필요한 건 
역시 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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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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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전문



노안이 온 나는

소설은 제끼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


단지 글자 수뿐만 아니라,

소설의 문장과 문장사이에 켜켜이 들어 있는

숱한 사연들일랑

내가 이미 실시간 쩔어 있기때문이다.


박준 시인의 책이 나온

문학동네시인선은

문학과 지성사보다 2000원이 싸서

읽는 아줌마는 흐뭇했더니만.


2000원만큼

흐릿한 글자때문에

듬성한 시인의 말이 흐릿해져서

책을 든 팔을 멀리 뻗었다가,

다시 가까이 오무렸다가

그러면서 읽는 시집의 구조가 되었다.

 

박준의 시는

유연하고, 유려하고, 재미있다.

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의 시에는

살아서 이미 유서를 쓰고,

살아서 스스로 장례를 치른 사람의 마음이

면면히 흐르는 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하다가도,

그런 마음이 들더라.


살아서 열두번의 유서를 쓰고,

살아서 열두번의 장례를 치러도,

그거이 무에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산다는 건

만나서 드러웠고

다시는 같이 하지 말자며

서로를 골로 보내는 장례가

지뢰밭 한가운데 흩어진 똥처럼 허다한 판인지라


그리하여,

어느 장례 하나도 시원찮다는 것을..

어느 불면의 밤 한조각도

still hungry한 잡것들을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을 ..

더 이상 힘들지 않으리라는 맹세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도 피할수도

모르고도 지나갈수도 없다는 걸

영민한 그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의 시에서

활자와 활자사이에 홰치듯 달리는 반짝이는 물고기들

가야할 머나먼 바닷길을 앞두고도,

숱하게 쌓일 상처들을 앞두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는 그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다.


노안 오면

그때 그는 어떤 표정으로 시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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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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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문인수 '하관' 전문

 

 



채 마치지 못한 두문장

스물일곱 자로 

어머니의 삶과

그 삶을 함께 겪었던 시인의 마음이 표현되었다.


이게 시고,

이게 시인의 내공이다. 


받은 것이, 

사랑이든..

설움이든.. 

자신의 어머니가 

그 무엇으로 피어나서

다시금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살길 

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누굽니꽈아아아 


개구진 세 아이를 키우며

한참을 뒤떨어졌던 인간다운 삶이

어서 와.. 이런 삶 처음이지.. 하고

이제야 내게 손짓을 한다 


부랴부랴 업데이트시키느라

시인들을 두루두루 엮어서

시 메뉴판 같은 시선집에서

내가 고른 시인들은 

귀신같이 다들 연식이 되더라고.. 


누구의 사랑노래도

누구의 실연 노래도

한 손에는 시집을

다른 한 손에 귀이지 개를 들고 

귀를 파는 이 아줌니를 말리지 못하였으나, 


그 사랑이..

그 이별이..

비린내 폴폴 풍기던 혈육의 꼬질꼬질한 삶일 때

그리고, 경황 중에 당한 허황한 작별일 때

나는 파던 코에 손가락을 묻고

짠내를 들이마신다. 


우리 대중소 세 마리는 

어찌하여

에미를 파고들 때

겨드랑이며, 

목 뒤꼍이며

사타구니에다가 

얼굴을 묻을까  


때 묻은 남루함은 

또 이리 대를 이어 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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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5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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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쓰는 삶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삶을 믿는다고 한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서정 서정한 시를 쓴 사람이

개차반임을 알았을때 실망하기 보다는..


쓰레기처럼 말하고, 

쓰레기처럼 행동하고, 

쓰레기처럼 배설하는 저 인간의 심연에도

그리 아름답고 서정스러움이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중에서


독하디 독했던 최승자의 시도

불나방같았던 그녀의 청춘도

다 타버리고 

시집 속 허다한 페이지속

시 하나 하나는 

모두 다 빈 배처럼 텅 비어 있더라.


모질지 못해서

끊어 버리지 못해서

벌벌 떠는 겁쟁이여서

그녀의 이전 시들이

그리도 독하게 아프고, 아파서 독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시들에

찬사를 보냈던 나역시도

엄청시럽게 비겁하고 계산적이라서

잘한다 잘한다하며 최승자를 예찬했던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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