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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선혈 ㅣ Nobless Club 15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쿠세 황제의 동생 레아킨에게는 부족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감정으로 레아킨은 분노와 기쁨, 사랑과 슬픔등의 감정을 그는 잘 느끼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색. 그는 대다수의 사람이 당연하게 느끼는 색채 가득한 세상이 아닌 오로지 짙고 옅은 명암으로만 구분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는 쿠세의 속국인 라노프의 작가 비오티가 쓴 <호반 위 황금새>라는 글을 읽게 된다. 평소엔 잘 느끼지 못하던 '감정'이란 것을 그의 글에서 느낀 레아킨은 비오티라면 자신에게 '색'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라노프로 향한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라노프에서 (당연히) 사람들은 지배국인 쿠세인에게 쌀쌀맞기만 하고, 비오티를 찾아왔단 말을 겉으로 꺼내지도 못한 레아킨은 남몰래 그를 찾느라 고생하는데.. 과연 레아킨이 감정과 색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중간까지는 꽤 본래 줄거리와 비슷했으나 마지막이 좀 OTL)- 라는 이야기.
비록 (마지막에 쬐끔만은) 판타지이기는 하나 레아킨이 진짜로 마법등의 힘으로 그의 눈을 치료해 색맹을 면해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느낀대로 설명하는 덕에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색'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움직인 비오티라면 알려주지 않을까 - 하는 기대로 레아킨은 쿠세를 떠났다. 아니 그것도 핑계고 그저 비오티를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권의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독자가 작가를 찾아가는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 작가와 작가간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이 갖는 배경과 쿠세와 라노프의 대치적인 상황이 더해지면서 글(혹은 작가라는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로, 또 사회와 사회라는 관계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관념적인 개념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한 문장 한 문장이 무거울 법도 한데, 실제로 책장은 무척 빠르게 넘어갔다. 독립을 꿈꾸며 시위가 끊이지 않는 라노프의 거리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비오티를 비롯한 역동적인 인물덕에 사건의 진행도 무척 빠르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넘어가다보니 끝까지 읽은 뒤 과연 들어야 할 이야기를 모두 들었는지, 내가 맞게 듣고 있는지 알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환상소설을 어떻게 정의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과학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소재나 배경이 등장하는 소설' 이라는 자의적(?)인 정의를 기준으로 하면, 이 글이 '환상소설'로 들어가는 그 시점. 비오티와 레아킨이 지하실에서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척 좋았다. 그러나 시작은 분명 개인적인 동기였을지라도 글이 진행되면서 점점 넓어지던 세계가 그를 만난 뒤로 지나치게 좁아지는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나역시 평소에는 사회적 가치보다 개인적 가치를 중시하는 편이지만,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질 듯 이야기를 키워놓고 너무 급하게 개인으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이 든다. 좀 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진행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레아킨의 어깨 위에 있는 무거운 신분을 빼앗고 완전히 개인으로 돌아갔더라면... 더 좋았을까?
+ 그럼에도 마지막 페이지는 좋았다 :)
+ 레아킨이 비오티에게 보낸 선물은 그 말대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