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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항상 처음을 볼 때 마지막을 생각하고, 마지막일 때 처음을 생각한다. 신규 교사와 전입 교사의 소개 후 퇴임 교사들의 퇴임식이 이어졌다. 난 앞으로 학교를 몇 번 더 옮기면 퇴임을 하게 될까. 한 학교에 넉넉하게 오 년씩만 잡아도 금방 정년에 다다를 것 같았다. 부질 없는 계산을 하다 보면 내가 참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바보같이, 언제까지고 이십 대, 삼십 대가 영원할 줄 알았나. 삶이 영원할 줄만 알았나. 그런데, 또 어리석게도 영원할 것처럼 살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은 니체의 영원 회귀설에 대한 서술자의 친절한 설명으로 할애되어 있다. 이 삶이 계속 반복된다면, 삶의 모든 국면에 있는 선택들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질 것이다. 나의 선택의 결과가 영원히 반복되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지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영원 회귀설에 따르면 나는 영원히 국어 교사라는 삶을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영원 회귀의 첫 페이즈에서 내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모든 국면에 있는 선택들은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 삶은 단 한 번 뿐이고, 영원한 회귀도 없다. 우리의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게 시작점에서 끝점으로 일직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즉 삶의 경로는 회귀의 무한히 순환하는 뫼비우스도 아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어떤 선택은 우연하게, 또 어떤 선택은 필연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삶을 향유하는 방식 역시 키치하게 또는 비-키치하게 이뤄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 키치와 비-키치는 상보 반의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상보 반의 관계를 갖는 개념 사이에는 중간항이 없기 때문에 가령 우연이 아니면 필연인 것이고, 필연이 아니면 우연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는 것이고, 필연이 의미를 잃게 되면 그것은 우연으로 환원된다. 개개인의 삶이 아무리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갖는 비-키치라 주장하더라도 그 삶이 끝나서 요약되거나,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 그 삶은 키치로 환원된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토마시의 삶이 온전히 가벼움으로 끝났던가? 무거움을 추구했던 테레사의 삶은? 키치를 몸서리치게 거부했던 토마시의 선택은 당혹스럽게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키치로 환원된다.
일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니체식의 무거운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연을 추구하더라도 결국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삶은 필연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또 필연을 신념처럼 지니고 산다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 신념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인간 존재는 한없이 가볍지만, 삶의 역동은 이처럼 복잡하며,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서술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의 삶은 악보처럼 구성되’고. 그리고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라고도 한다. 삶의 역동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만, 필연을 무비판적으로만 수용하여 그냥 사는대로 사는 삶은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서술자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시, ‘항상 처음을 볼 때 마지막을 생각하고, 마지막일 때 처음을 생각하는’ 나의 버릇은 처음과 끝 일직선 상의 가벼운 내 존재가 비록 가벼울지언정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중략)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에 매료된다고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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