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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15만부 기념 특별 한정판)
박상영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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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이니까, 대도시에서 통용되는 사랑 방법인걸까. 내게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동갑이라 너무 반가운) 88년생의 네 가지 사랑 방법으로 읽힌다.

 

첫 번째 사랑은 동지애적인 사랑이다. ‘재희는 이성애자 여성이고, 작중 서술자인 영이는 게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이 지레짐작하는 성애로 엮일 수 없는 관계이자, 둘 다 남성을 사랑하는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묘한 동지적 관계이다. 묘한 동지적 관계라도 한 것은 이들이 남자 하나를 두고 시기-경쟁할 일이 없어서이다(‘영이의 경우는 상대방도 이쪽이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하다). 그래서 이들의 동지적 관계는 그런 측면에서 퓨어하다. 아무튼 이들은 각자의 연애 사업에-마치 동종 업계인들이 서로를 잘 이해하듯- 연민과 지지를 사심 없이 보낼 수 있는 관계다. 게이와 이성애자 여성의 우정- 요즘엔 뻔한 이야기자 그쪽 세계의 로망이라고도 하여 좀 지겹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자, 개인적으로 찡했던 부분은 재희의 결혼 이야기였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연애는 필수지만 결혼은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결혼은 법적 사회적 권리가 보장되는 제도권 내의 안정적인 애정의 보금자리다. 그런데, 남겨진 비록 소수자라고 하지만- 적지 않은 이 세계의 영이들은?

 

두 번째 사랑은 비대칭적 사랑이다. 연애라고 하는 것이 양쪽이 좋아서 하는 것이 맞지만, 종종 상대보다 내가 더 사랑해서, 내가 더 매달리는 사랑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짜증나는 애인이 나보다 덜 (나를) 사랑하는 애인이라고 했다. 작중에서 ‘K3’영이에게 더 매달리는 애인이고,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의 띠동갑 이 정확히 그 반대지점에서 영이가 더 매달리는 애인이다. 당연히 이런 식의 사랑이 가장 불건강하다. 특히 이런 식의 사랑이 더 최악인 것은 매달리는 쪽의 자존감 훼손이 극심하고, 종국엔 지쳐서 매달리는 쪽이 먼저 헤어지자는 소리를 자발적으로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세 번째 사랑은 애증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미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대등하게 연결된다. 이것은 보통 (이런 표현이 적절치 모르겠으나) 서로 코드가 잘 안 맞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 속에서 많이 보는 타입이다. ‘영이엄마는 아들의 성적 지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로 인해 아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화해의 손길도 내밀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모자는 서로의 처지와 감정을 어렴풋하게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어렴풋한 이해이다. 제아무리 내 배로 낳은 자식이라도 탯줄을 끊고 나오는 순간, 그 아이는 자신만의 광활한 우주로 떠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도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오랜 시간 축적된 부모의 우주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지만, 때론 미움도 크다.

 

자식인데 그거 하나 이해 못해주나에서 오는 서운함의 미움도 크지만, 이 나이쯤 되면 사무치는 미움도 있다. 작중 영이도 느끼지만, 자기 자신의 못난 부분은 부모님을 닮아서 생긴 것이다. ‘엄마, 아빠 이거……. 바보같이 나를 닮았네요.’라고 도치된 연민을 할 때 우리는 사무치는 미움과 함께 끊을 수 없는 천륜의 애정을 느낀다.

마지막 네 번째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다. ‘성숙한 사랑은 많은 관계를 전전하던(여기까지 읽다가 시쳇말로 기가 빨려서 질려버렸다) ‘영이가 얻은 결론과도 같다. ‘내가 이만큼 사랑하니 너도 이만큼 줬으면 좋겠어.’와 같은 거래적 사랑은 미성숙하다. 특히 상대방이 두 번째 타입의 사랑처럼 나를 덜 사랑하는 애인이라면 그 끝은 파멸적이다. 성숙한 사랑은 이 사랑을 통해 나와 네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사랑이다. 그래서 영이의 마지막 선택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내 가슴이 아프더라도, 상대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 그 쉽지 않은 용기가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관계를 전전하던 이삼십대의 방황이 우리를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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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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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는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인지적 행위이다. ‘평가는 인간의 가장 복잡한 인지 작용이기 때문에 고등 교육의 목표점이 된다. ‘평가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오해는 타당하지 못한 평가로 이어진다.

 

그런데, ‘평가안에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판단 주체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아니, 애초에 평가는 판단 주체의 주관을 빼놓고 성립할 수 없다. 문제는 적지 않은 인간들은 판단(평가의 결과)을 미리 내려놓고 그 판단의 정당화를 위해 편집적으로 대상의 속성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뫼르소에 대한 판단을 이미 내린듯한 재판장은, 레몽의 증언을 다음과 같이 일축한다.

 

그러나 재판장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가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잘라 말했다.”

 

소설의 구성이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대칭 구조로 보인다. 사건을 기준으로 하면 총격 사건 전과 후일 것이다. 인물을 기준으로 하면 1부의 뫼르소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갈만한, 즉 인간 무리의 내국인으로, 2부의 뫼르소는 불가해한 그래서 인간 무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위험한 이방인으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것은 1부와 2부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뫼르소는 같은 사건의 주체자이지만 다른 인물로 판단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평가. 즉 이 판단이 총체적일 수 없고, 비관적으로 본다면 허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총체적 진실에 대한 탐색이 되어야 하는 재판은 기실 총체적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부조리를 증명하는 무대가 되어 버린다. 인간 무리에서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불효가 이 재판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바람에 진짜 밝혀져야 하는 이야기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뫼르소는 왜 한 발쏘고 더 네 발을 더 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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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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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라는 단어는 통계적이라서, ‘다수자의 반의어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수효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사회적 위치이다. , ‘소수자소외자가 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취미, 학력, 직업의 소수성은 소위 힙한 것이 되지만, 유독 이 사회는 성적 지향의 소수성에 엄격하다. 누구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에도 어떤 사람들은 무례하게도 이걸 증명하여 자랑스러워하라고 강요하거나, 또 어떤 사람들은 쉽게 혐오한다. 슬프게도 후자는 익숙한 문제라서 새롭지 않지만, 전자 역시 폭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건 다수와 소수의 대립 문제도 아닌 게 소수자 내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반복된다. 표제작인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의 게이인 는 무성애자를 아무 감정도 못 느끼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존재로 함부로 규정 짓는다. 무의식적으로 무성애자를 소외자로 배척하는 판단이다.

 

인간은 딱 자기가 아는 만큼, 자기가 경험한 만큼의 영역에서만 상상한다. 인간의 가장 큰 강점이 상상이라고 했지만, 협소해지려 하면 끝도 없이 협소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의 상상이다. 인간의 상상은 자아의 제약에서 벗어나 상대를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상상할 수 없다면,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그 모든 말들을 유예하는 것도 배려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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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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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처음을 볼 때 마지막을 생각하고, 마지막일 때 처음을 생각한다. 신규 교사와 전입 교사의 소개 후 퇴임 교사들의 퇴임식이 이어졌다. 난 앞으로 학교를 몇 번 더 옮기면 퇴임을 하게 될까. 한 학교에 넉넉하게 오 년씩만 잡아도 금방 정년에 다다를 것 같았다. 부질 없는 계산을 하다 보면 내가 참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바보같이, 언제까지고 이십 대, 삼십 대가 영원할 줄 알았나. 삶이 영원할 줄만 알았나. 그런데, 또 어리석게도 영원할 것처럼 살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은 니체의 영원 회귀설에 대한 서술자의 친절한 설명으로 할애되어 있다. 이 삶이 계속 반복된다면, 삶의 모든 국면에 있는 선택들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질 것이다. 나의 선택의 결과가 영원히 반복되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지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영원 회귀설에 따르면 나는 영원히 국어 교사라는 삶을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영원 회귀의 첫 페이즈에서 내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모든 국면에 있는 선택들은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 삶은 단 한 번 뿐이고, 영원한 회귀도 없다. 우리의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게 시작점에서 끝점으로 일직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즉 삶의 경로는 회귀의 무한히 순환하는 뫼비우스도 아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어떤 선택은 우연하게, 또 어떤 선택은 필연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삶을 향유하는 방식 역시 키치하게 또는 비-키치하게 이뤄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 키치와 비-키치는 상보 반의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상보 반의 관계를 갖는 개념 사이에는 중간항이 없기 때문에 가령 우연이 아니면 필연인 것이고, 필연이 아니면 우연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는 것이고, 필연이 의미를 잃게 되면 그것은 우연으로 환원된다. 개개인의 삶이 아무리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갖는 비-키치라 주장하더라도 그 삶이 끝나서 요약되거나,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 그 삶은 키치로 환원된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토마시의 삶이 온전히 가벼움으로 끝났던가? 무거움을 추구했던 테레사의 삶은? 키치를 몸서리치게 거부했던 토마시의 선택은 당혹스럽게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키치로 환원된다.

 

일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니체식의 무거운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연을 추구하더라도 결국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삶은 필연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또 필연을 신념처럼 지니고 산다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 신념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인간 존재는 한없이 가볍지만, 삶의 역동은 이처럼 복잡하며,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서술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의 삶은 악보처럼 구성되. 그리고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라고도 한다. 삶의 역동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만, 필연을 무비판적으로만 수용하여 그냥 사는대로 사는 삶은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서술자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시, ‘항상 처음을 볼 때 마지막을 생각하고, 마지막일 때 처음을 생각하는나의 버릇은 처음과 끝 일직선 상의 가벼운 내 존재가 비록 가벼울지언정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중략)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에 매료된다고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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