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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 김영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여름 일주일 동안 배낭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와 간만에 만나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에 들뜨다가- 그 친구와 함께 여행 다닌 이야기를 블로그에 포스팅 했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그걸 찬찬히 살펴보다가 갑자기, 이번 겨울 환율이 높다는 핑계로 떠나지 못한 내가 한심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여행을 떠나지 못한 나는, 12월 중순부터 2월 오늘까지 합쳐 대략 200만원 정도의 돈을 사용했다. 이 돈이면 비행기 값과 보름 정도 어느 나라를 헤매는 덴 충분했겠지, 거기에 내가 살고 있는 방세를 합치면 300만원이 넘는 돈이 방학 동안 그냥 뿌려졌다. 아- 역시 떠났어야해. 항상 '다음'은 없다. 오직 '지금'뿐이지. 지구별 여행자는 이런 내 마음을 후벼파는 말들만 늘어놓는다. :)


'no problem' 정말 인도인들은 뭐든지 괜찮은 걸까? 이 모든 게 신의 계획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영화 보기로 한 약속에 1시간 30분이나 늦어버린 나는, 지하철을 타고 계속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보았다. 잘 하면 다음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잘 하면'. 그러다 문득 '노 프라블럼'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시계를 바라본다고 해서 지하철이 갑자기 빨라질 수는 없는 거야, 모든 게 신의 뜻대로-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을 끝내고 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편안해졌다. 화가 나 있을 친구의 얼굴은 계속 떠올랐지만 내 마음은 평화요 고요 그 자체. 1시간 30분이나 먼저 도착한 친구는 역에서 나를 기다리다 먼저 영화관에 가있으려 했으나 길치인 친구가 찾아가기에 영화관 찾아가는 길은 너무 복잡했고, 지하보도를 따라 계속 걷던 친구는 시청역까지 걷게 되었단다. 그게 시청역임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 결국 우리는 다음 영화 상영시간도 놓쳤다. 워낭소리를 본 건 처음 약속한 시간보다 3시간 30분이 늦어진 후였다. 역시 모든 게 신의 뜻대로- 지금 내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결하면 되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애시당초 걱정한다고 해서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구별 여행자는 활자도 큼직큼직하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가독성이 정말 좋았다. 지하철에서도 팔랑 팔랑.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시간에도 책장이 막 넘어갔다. 침도 꼴깍꼴깍 넘어갔다. 인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지하철에서 인도를 눈앞에 그려내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딱딱한 지하철 의자가 아닌 릭샤의 뒷좌석 쯤 되는 듯한 환상에 빠졌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별 여행자까지, 한국에 사는 꼬꼬마는 인디아 드림을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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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의석 하나 없고 지지도도 낮은 군소 정당의 당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사실 별로 없다. 진중권 교수는 강연에서 “당이 나에게 뭘 해줄지 생각 하지 말고, 내가 당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생각하라.”고 말했다. 내가 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찰나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지식채널e 연출을 했던 김진혁pd가 강연에서 강력추천 했던 책이기도 하고 촘스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면서도 스승과 맞장을 떠 결국은 져버린 조지 레이코프에 대한 순진한 관심도 책을 읽는데 한 몫 했다. 미국의 진보정당인 민주당의 열혈 지지자인 레이코프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프레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짧고 얇은 책인데 그 와중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의 반복을 거쳐 실려 있다. 레이코프가 말하고 싶은 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코끼리 생각하지 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지금부터 코끼리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코끼리와 연관된 그 어떠한 것들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코끼리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란 글을 보고 그 다음 순간에 코끼리를 떠올랐다면, 지극히 정상입니다. 나는 정말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시는 분은 저자에게 연락을 해보십시오. 인지언어학의 예외 케이스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떠한 프레임을 부정하려면 일단 그 프레임을 사용해야한다. mb의 예를 들어보자,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이 패한 이유는 ‘mb는 경제 대통령이 아니에요’라는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나’를 사기꾼과 관련지어 생각하기 시작한다. 민주당의 mb 깎아먹기는 mb가 경제대통령, 불도저, 자수성가형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막대한 도움을 줬다. ‘사실’조차 프레임 앞에서는 무력하다. mb는 결코 현대건설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건설을 부도냈다. 하지만 경제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사실들은 먼지만큼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추상적인 것들은 우리 두뇌에서 인지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것들로 치환하는데 가령 ‘시간을 절약하자’ ‘시간을 낭비하다’와 같은 말들은 시간=돈 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정치라는 추상적 개념을 ‘가족’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두 개의 정치 모델을 낳는데 하나는 ‘엄격한 아버지 모델’ 다른 하나는 ‘자상한 부모 모델’이다. 전자는 공화당의 캐치프레이즈이고 이 모델에서 필요한 건 규율과 권위이다. 후자는 민주당의 기본 원리로서 보살핌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공감과 책임이라는 측면이 있다. 오늘 새벽 버락 오바마 취임 연설을 보는 도중에 “가족을 중시 한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이것을 진보적 언어 프레임으로 해석했다. 뒤이어 보살핌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왔기 때문인데, 취임식을 중계하던 캐스터는 나와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오바마는 진보주의적 가치를 지닌 사람인데 이번 연설에선 보수진영을 의식하는 연설을 했죠. 가족을 계속 강조하더군요.” 오바마 측 싱크탱크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연설문을 썼든지 간에 나는 오늘의 연설문이 보살핌을 중시하는 ‘자상한 부모모델'이라고 믿고 싶다.



군소정당의 당원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해답은 친절하게도 책에 나와 있었다. ‘세상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 거창하지만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말하는 것이니, 그 틀을 내가 원하는 틀로 바꾸는 것이다. 이 작업은 미국에서 보수진영이 40년에 걸쳐 언론이나 학계 등등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돈과 사람을 쏟아부어가며 해 온 작업이다. 우리는 그럴만한 돈도 사람도 없으니 직접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인터넷 토론방이나 게시판에 들어가 우리가 원하는 언어를 사용하면 된다. 예를 들어 ‘양극화’라는 단어는 자유주의가 낳은 병폐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해결이 된다. 이 단어는-아마도 의도치 않았겠지만- 진보진영의 프레임이다. 이러한 단어들을 자꾸자꾸 개발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으며 프레임을 실생활에 사용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할 때 내 프레임을 은연중에 사용해서 그 사람의 심리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발칙한 상상도 해보았다. 책을 읽는 기간 내내 각종 홍보 문구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어떤 기업에서 다른 기업과 가격 비교를 해서 홍보물을 배포했는데 그 홍보물에는 ‘우리 제품이 M사 제품보다 무려 30만원이나 저렴합니다. 30만원이나 쌉니다.’ 라는 식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저렴합니다. 쌉니다. 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어감을 불러일으킨다. 제품도 저렴하고 싸구려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 고로 ‘우리 제품은 M사 제품보다 무려 30만원이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됩니다.’라고 쓰는 건 어떨까라고 생각해봤다.



자신이 진보적 성향이든 보수적 성향이든 이 책을 읽어보는 건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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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홍세화, 홍세화, 홍세화 선생님. 강연이 끝난 뒤 어느 술자리에서 선생님 자신을 '독거노인'이라 표현해 함께 있던 학생들을 웃겼던, 가슴 찡하게 만들었던 홍세화 선생님. 혹자는 나이가 40살이나 많은 선생님께 세화형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나는 감히 선생님을 형이라 부르지는 못했다. 그런 선생님의 책이기에 나의 리뷰는 어쩌면 제대로 된 리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책은 작가의 20여년의 망명생활 그 자체다. 고달픔과 방황하는 마음들,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이방인이 되어야했던 괴로움.

뒤통수로 보는 풍경, 앞통수로 보는 풍경

이 책이 나온 건 1995년, 당시나 지금이나 clicker들은 존재했었나보다. being보다 having been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 순간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를 생각하기보다,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기를 원한다. 여행을 하고나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진 찍다가 놓치는 수많은 것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책에서 언급하는 뒤통수로 보는 풍경은, 모든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의 배경화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대부분 여행자들의 놀라운 재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서는 '증명사진'이라 칭하고 있는데,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사진을 증명사진이라 칭한듯 했다. 나 또한 언젠가는 클릭커였다.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즐기기 시작한 후로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나를 찍어줄 사람도, 내가 찍어줄 사람도 없는 그곳에선, 온전히 나와 나를 둘러싼 공간밖에 없었다. 앞통수로 풍경을 보기시작한 때도 이맘 때 쯤 이었을 것이다. “여행의 목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환상을 없애는 것”(p.12)은 비단 여행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치에 적용 되는 말 같았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환상이고 허상이었다. 알 게 되는 순간이 환상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이 책에선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1970년대 당시의 프랑스의 데모현장을 보고 작가가 흘린 눈물이었다. 데모에서 작가는 아버지인듯한 이의 무동을 타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한국의 데모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상황이었다. 그 뒤로 30년이 지난 2000년대 한국의 시위는 촛불문화제로 불리는데 70년대 프랑스의 데모와 그대로 닮아 있다. 작년 한 해 시위에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시위였다. 현장에서 함께 뛰었던 작가는 많은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똘레랑스

우리나라에 정이 있다면, 프랑스엔 똘레랑스가 있다고 했다.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은 똘레랑스가 아닐까 싶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도 결국은 똘레랑스 였고,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똘레랑스가 아닐까? 한동안 열심히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같이 교회에 다니던 팀 사람 중에 두 명이 다른 교회로 옮겼을 때 보였던 교회의 반응 탓이었다. 물론 3년이란 시간을 가족처럼 동고동락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다른 교회로 옮기겠다고 했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배신감일 것이다. 나 또한 처음엔 당혹스러웠고 난감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뒤에 나타난 그들의 반응은 정말 무서웠다. 저주의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뒷담화가 난무했고 결국 그 둘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나는 곧 교회를 그만두었다. 그 당시 교회 사람들에겐 똘레랑스가 부족했었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한다는 건 종교에선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신은 절대자인데 다름을 인정하는 건 신의 절대성이 흔들리는 일일 테니까.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똘레랑스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남과 나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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