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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혁명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자연과학선집
토머스 새뮤얼 쿤 지음, 정동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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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누적적으로 진보하지 않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진보한다는 『과학혁명의 구조』(1962)의 테제는 오늘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토머스 쿤이 하버드대학에서 교양 과학 수업의 조교로 일하던 1947년의 상식은 과학이 지식 축적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가 출간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이러한 통념에 대한 『과학혁명의 구조』의 도전을 예비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중심으로 천문학의 내부와 외부가 상호작용해 온 역사를 성공적으로 조망했기 때문이다. 고대 천문학에 대한 1~2장의 서술을 거쳐 3~4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 체계의 외적 함의들로 논의를 확장하는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연구가 천문학 안팎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5~7장으로 마무리된다. 패러다임이 과학에 앞서 과학의 대상과 해법을 결정짓는 원천이라고 할 때, 이렇듯 과학 활동의 지적 배경에 주목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혁명의 구조』의 ‘예고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예고편’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섬세하게 독해할 필요가 있다.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로 돌아가 보자. 이 용어는 ‘혁명’이 주는 어감 때문에 과학이 단번에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오해를 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의 근본적인 개념들이 겪는 주요한 격변들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명시한다(357). 과학과 사상사의 결합을 통해 “혁명이 가진 다원성의 중요성을 보여” 주려는 쿤(xii)의 연구 목적을 달성한 것도 이 책의 중요한 가치이겠으나, 상술한 견지에서 필자는 그와 더불어 혁명의 점진적 과정을 섬세하게 기술해 낸 쿤의 관찰력에 주목하고 싶다. 이전의 스콜라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씨앗을 찾는 동시에 이전 천문학 전통의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막강한 구속력을 읽어내는 이 책은 역사를 특정한 기점을 중심으로 분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케 해 준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관통하는 점진성이야말로 혁명의 다원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질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단박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천동설이 아리스토텔레스 역학 그리고 기독교와 끈끈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을 지연시키면서 동시에 혁명의 계기를 제공하는 이러한 동맹들은 불안정한 것이기도 해서, 필자는 이를 ‘불편한 동거’로 명명하고자 한다. 책을 통해 과학사의 ‘불편한 동거’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고대인들이 왜 2구체 우주를 믿었는지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이해 방식이 왜 포기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라는 1장의 마무리로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시작된다(83). 뒤잇는 2장과 3장은 예비적 작업으로서 코페르니쿠스가 한편으로는 물려받았고 한편으로는 대결해야 했던 고대 천문학과 우주론의 완성형을 설명하고 있다. 쿤(133)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모든 천체 운동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하고, 정량적인 설명”을 제공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은 천상의 힘에 대한 직관 및 운동 법칙과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면서 세계에 대한 일관적이고도 통합적인 설명을 제공했다고 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2~3장은 중심의 지구와 바깥의 천구로 이루어진 2구체 우주론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견고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적확한 설명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들이 서서히 무너진 이유도 여기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완성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증가한 복잡성은 행성 운동에 대한 최종 결과가 아니라 고작 더 나은 근사치를 제공했을 뿐이었다.”(135-136) 동시에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완전히 들어맞지도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안한 동심 천구는 어떤 ‘변종 버전’으로서만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잡한 주전원-주원 세트와 양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행성의 운동 원인을 설명하는 데, 후자는 행성의 운동 양상을 기술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주론과 천문학의 미묘한 분화를 읽어낼 수 있다면, 둘의 ‘불편한 동거’가 (‘불편하다’는 것은 후대의 관점이지만)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탄생에 기여하는 아이러니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천문학자들은  더 이상 세계의 구조에 대한 설명에 큰 관심이 없었고, 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매달린 천문학의 순전히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그 ‘사소한’ 출발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뒤바꾼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4장에서도 확인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기독교의 ‘불편한 동거’로 탄생한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언뜻 코페르니쿠스가 맞서 싸워야 할 전통으로만 보인다. 이 ‘전통’ 안에서 어떤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쿤은 먼젓번보다 더 분명하게 밝히는바, 니콜 오렘의 논증이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다.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오렘은 지구의 유일성과 부동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무화하려 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논리적 가능성에만 있었지만, 후대인들은 그것을 물리적 실재를 재구성할 근거로 재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미리 예측할 수 없는 혁명의 ‘밑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한 의심은 천문학이 아니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이 뒤바꾼 지리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페투스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아니라 역학에 대한 대안이었고,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는 태양 숭배와 수학적 조화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적 경향일 뿐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갈릴레오에게, 후자는 케플러에게 영향을 주면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완성하는 추동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통시적 구성에 충실하게 제시되는 이 책에서의 과학사를 끊임없이 앞뒤로 넘나들면서 재구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은 프톨레마이오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에 뒤잇는 갈릴레오의 작업은 뷔리당의 임페투스 이론에로, 6장의 케플러의 작업은 4장의 신플라톤주의에로 각각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혁명은 이렇듯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단선적으로 따라가면서 서술 가능한 현상도 아닐뿐더러, 목적론적으로 서술 가능한 현상도 아니다. 지상과 천상의 법칙을 부분적으로 통합하면서 뷔리당은 지동설의 출현을 예견한 것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또한 천구의 기능적 정합성을 훼손하면서 그것이 사라진 데카르트의 무한한 우주는 상상하지 못했다. 5장에서 말하는바, 그의 관심사는 우주론과 천문학의 모든 전통을 유지하면서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을 더 잘 설명하는 체계를 고안하기 위해 오직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쫓겨난 행성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천문학 밖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그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고, 그 결과 그의 혁명은 많은 반발에 부딪혔으되 생각보다 ‘혁명적’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의 스케치를 전유한 후계자들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었다. 전통 안에는 혁명의 씨앗이 있었으며, 혁명 안에는 전통의 유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로 정리할 수도 있겠다. 과학혁명은 전통의 품에서 태어나 기어이 자신의 탯줄을 끊는다. 그리고 전통과의 긴밀한 연속성 속에서 과학혁명의 다원성과 점진성을 선명하게 그려낸 성과야말로 이 책의 주요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때의 전통이 단일한 관념이 아니라, 애초에 균열을 내재한 ‘불편한 동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혁명이 그 균열의 주위에서 잠들어 있다가 서서히 깨어나는 과정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치밀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과학과 사상사의 결합이라는 영역으로 시야를 넓히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연구를 어느 정도까지 일반화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서 의문 부호를 떼기는 어렵다. 쿤(8)은 책의 서두에서 “우리 시대처럼 과학이 중요해진 시대는 당대에 당연시하는 과학적 믿음들을 검토할 수 있는 관점이 정말로 필요하며, (…) 만약 우리가 현대의 몇몇 과학적 개념의 기원과 그것이 이전 시대의 개념을 대체한 과정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현명하게 그 생존 가능성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마따나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전형적이지 않다. 과학사에서 이만큼 지대한 영향을 사상사와 주고받은 사건이 얼마나 있을까? 새가 공룡이라는 발견이 철학으로부터 받거나 철학에게 준 영향을 선뜻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말하자면 과학 활동 일반에 적용하기에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파급력은 지나치게 이례적이었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독자들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대문자’ 과학사로 집중시키지만, 그로써 과학자들에게 익숙한 ‘소문자’ 과학혁명들의 진상에서는 다소 멀어지는 것 같다. 어쩌면 쿤이 훗날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한 이유가 부분적으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호소력이 있다. 천문학 혁명이 자신을 가로막던 비천문학적 믿음을 뛰어넘고 종국에 그 비천문학적 믿음까지 변화시킨다는 대칭적 서사는 매력적일 뿐 아니라 중요한 교훈을 준다. 과학이라는 미명으로 지우지 말아야 할 겸손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엉터리’ 과학자들이 당대의 사고 체계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 발전을 성취했는지, 오늘날의 ‘더 현명해진’ 우리가 얼마나 구속받고 제약되어 있는지를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지난한 과정 속에 생생하게 펼쳐내고 있다. 이것이 되새김질의 여유를 지양하고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통한 미래로의 걸음을 재촉하는 과학계에서 ‘고전’이 줄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과학’ 이전의 과학사와 현재가 연결되는 순간의 즐거움을 아직 느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과학 활동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 과학이 달리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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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과 사회 (양장)
김은성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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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해관계의 조정과 효율적인 의사결정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정책과 사회』는 이러한 질문들을 바꾸어 “짙은 정책학”을 추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태의 복잡성을 희석하는 질문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다. ‘해외에서 벤치마킹한 정책들이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수용되는가?’, ‘왜 정책의 내용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가?’, ‘새로운 제도적 실천은 어떤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가?’ 이러한 주제들을 연구 목표로 삼는 ‘정책사회학’의 접근법은 빠른 해결책과 명료한 규범적 판단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책사회학의 질문들은 더 좋은 ‘판단’과 ‘해결’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복잡한 문제를 돌파하는 길은 대개 그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깊이 읽어냄으로써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책과 사회』는, 아쉬움도 있지만, 대체로 그 복잡성을 잘 읽어내면서도 한국 정책의 특질을 포착한 책으로 평가됨직하다. 그 이유인 이 책의 장점을 먼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책의 한계를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1. 맹인의 손으로 코끼리를 상상하기


『정책과 사회』는 먼저 정책 분석을 위한 다양한 사회학적 접근법을 활용하여 각 접근법의 장점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이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 “정책학적 아나키즘”의 장점도 보여 준다.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장에서 정책사회학의 네 가지 접근법을 소개한 후, 각 접근법을 통한 정책 분석 사례를 2개씩 제시하여 나머지 여덟 장을 이룬다. 저자는 정책사회학의 각 접근법을 『열반경』 속 우화인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하면서, 장님들이 모여 각자의 데이터에 기반한 추측을 논할 수 있었다면 코끼리라는 전체를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의 구성은 이러한 저자의 생각, 다시 말해 정책학적 아나키즘이라는 저자의 지향에 “이론적 다원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2장 「기후변화 정책 설계의 정치」와 5장 「유전자변형생물체 위험 거버넌스와 기술관료주의적 사전예방원칙」은 저자가 추구하는 이론적 다원주의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므로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2장은 이명박 정부의 기후변화 정책의 형성 과정을 이해관계 접근법과 제도적 접근법으로 분석한다. 이해관계 접근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산업계의 알력 행사다. 특히 발전업계와 제조업계는 가장 강력한 이익집단으로서, 일차적으로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와 탄소세에 반대하고 목표관리제를 지지하여 이명박 정부가 탄소세를 기각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정부는 ‘저탄소녹생성장기본법’을 통해 배출권거래제의 시행을 예고하기는 했으나, 제정 이전 3번의 개정 과정에서 산업계의 요구를 수용하여 단계적으로 배출권의 무상 할당률을 높였다. 당시 OECD 20개국 중 제조업 비중이 가장 높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징이 강조되면서, 궁극적으로 100%의 유상할당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환경단체의 반발은 배제되었다.


이러한 분석은 타당하지만, 이명박 정부 당대의 이해관계와 이익집단 정치만이 정책 결정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역사 제도주의의 ‘경로의존성’ 개념을 활용한 제도적 접근법을 도입하면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구호에 배태된 제도적 유산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이래로 내려온 발전국가 모델로서, 환경 정책에 경제발전주의를 개입시키는 환경발전주의를 촉발했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식 녹색성장은 기후 변화 산업을 경제 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지속가능발전 개념과 다르며, “누가 성장으로 이익을 얻는지, 누가 환경보호 비용을 부담하는지, 누가 환경보호를 통해 이익을 얻는지 등 사회적, 세대 간 정의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노동계와 환경단체를 거의 전적으로 제외한다(86). 발전국가 모델은 정부와 제조업체의 긴밀한 협력 및 규제 완화와도 상보적이었으며, 문재인 정부의 기후변화 정책 설계에도 최소한 부분적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이해관계 접근법과 제도적 접근법의 결합은 ‘기술관료주의’와 ‘사전예방원칙’이라는 이질적 위험 규제가 한국의 GMO 정책에서 어떻게 공존 또는 융합했는지를 분석하는 5장에서도 드러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국의 LMO법이 카르타헤나 의정서에 따라 제정한 사정예방원칙은 본디 ‘위험의 최소화’를 추구해야 하나, 정작 그 실천에서는 ‘위험의 최적화’를 추구하는 기술관료주의의 성격도 함께 나타났다. 제도적 접근법으로 보면, 이것은 국제법에 기반한 사전예방원칙의 강제적 동형화와 기술관료주의의 경로의존성이 동시에 작동한 사례이자, 후자로 인한 탈동조화를 보여 주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해관계 접근법으로 보면,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유럽과 유사한 이해관계를 가지면서도 미국 정부와의 GMO 관련 분쟁을 피하고자 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양면적 이해관계로 인해 한국은 미국과 유럽의 중간지대에서 절충적 정책을 설계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정리에 의하면 이해관계 접근법은 정치경제학에 지적 전통을 두고, 인간을 “자기 이익과 정치적 신념을 추구하는 합리적 행위자”로 간주한다(46). 반면 제도적 접근법은 조직·제도 사회학에 지적 전통을 두며 인간을 수동적 행위자로 간주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상이한 접근법들을 동원하여 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비유한 대로 코끼리의 각 부분을 만진 장님들이 논의를 통해 코끼리라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격이다. 구조에 제약되는 행위자 모델과 구조를 만드는 행위자 모델, 공시적 접근과 통시적 접근 양면의 장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적 다원주의에만 천착하는 도그마를 경계하고, 이론은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현장 연구를 기본적인 바탕에 두어야 한다고 저자는 권고한다. 앞서 살핀 두 사례는 충실한 실증적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이러한 원칙을 준수하며 쓰였다고 할 수 있다.


2. 더 넓은 “So What?”의 과녁을 상상하기


2.1. 한국 정책의 두 축, 관료주의와 발전주의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은 독자가 상이한 접근법들로부터 한국 정책의 공통적 특질을 추출할 수 있게 쓰였다는 것이다. 저자가 직접적으로 한국 정책의 특질을 논한 장은 없지만,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료주의’와 ‘발전주의’라는 두 가지 특질에 주목할 수 있다. 먼저 상술한 제5장과 더불어 제3장 「캠프 캐럴 갈등 거버넌스와 주한미군지위협정」, 제4장 「공공기관위기관리지침과 전사적 위험관리」에서 공통적으로 관료주의가 드러난다. 3장에서는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와 시민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명령과 통제의 위계에 따라 관료주의적 갈등 관리를 강행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제4장에서는 본래 기업의 자율규제에서 기인한 전사적 위험관리를 청와대가 ‘지침화’함으로써 공공기관의 위기관리를 통제하려 하는 전통적 관료주의의 경로의존성이 나타난다. 과학적 실증주의와 전문가에 대한 신뢰, 시민 참여의 배제, 불확실성 고려의 최소화는 3~5장의 한국 정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질이다. 특히 5장에서 식약청 관계자의 인터뷰를 인용한 다음 대목이 이러한 특질을 잘 보여 준다.


"소비자가 참여하여 안전성 평가하는 것은 도움이 전혀 안 된다. 그분들은 다른 제도적 평가를 할 때 (참여 가능하다). …… 대신에 (위험평가에 있어) 소비자 단체의 전문가 추천을 받는다. 소비자가 참여하는 자체는 말이 안 된다. 과학적인 내용을 다루는데, 전혀 문외한이 와서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182)


두 번째 특질인 발전주의는 앞서 언급한 2장과 더불어 6장, 7장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7장 「사회기술적 상상과 융합기술정책의 세계화」는 서구의 ‘사회기술적 상상’이 한국에 어떻게 ‘번역’되었고, 그 양상이 왜 사회문제 해결형 혁신의 지체를 야기했는지 분석한다. 기술발전주의, 즉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부국을 건설한다는 비전은 사회문제 해결형 혁신에 필요한 민주적 거버넌스 및 새로운 연구개발 평가 시스템과 공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분석은 한국식 녹색성장이 산업 동력에 치중하여 에너지 복지와 같은 사회정의 문제를 간과했다는 2장의 분석과 유사하다.


이러한 정책사회학적 진단들은 당면한 구체적 정책 문제를 넘어 “한국적 관료주의와 발전주의의 경로의존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보다 거시적인 물음을 던지게 해 준다. 필자가 서두에서 더 좋은 ‘판단’과 ‘해결’을 위해서도 정책사회학이 필요하다고 서술한 이유가 부분적으로 여기에 있다.


2.2. 협의적 제도를 넘나드는 물질적 접근법

이 책의 세 번째 장점은 좁은 의미의 제도에 대한 사후적 분석뿐 아니라, 시민들의 공유된 규범과 같은 광의적 제도의 분석이나 근미래에 필요한 정책적 쟁점까지 제시한다는 것이다. 8~9장에서 활용된 물질적 접근법이 이러한 강점을 잘 보여 준다. 8장 「딥 러닝과 알고리즘 거버넌스의 주인-대리인 문제」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비롯한 신유물론적 관점을 빌려 알고리즘을 블랙박스화된 행위소(actant)로 분석함으로써 전통적인 주인-대리인 문제의 범위를 확장한다. 이는 주어진 문제와 해결책을 넘어 새로운 문제제기로 정책사회학적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저자의 지향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이러스와의 상보적 관계 속에서 시민권이 구성되는 양상을 다룬 9장 「코로나19 감시와 좋은 시민권 회집하기」는 ‘제도’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통으로 작용하는 외적 제약인 한편 자발적으로 내면화되면서 그 부담의 불평등한 분배를 비가시화하기도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구체적으로는 코로나19 대응 초기에 확진자 동선 공개 정책이 ‘좋은 시민권’의 요건을 인구 밀집 장소와의 적대적 관계 맺기로 재구성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더 큰 부담을 지거나 낙인이 찍혔다고 한다.


이 장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장점은 모두 더 넓은 “So What?”의 과녁을 상상하는 작업이라고 명명해 볼 수 있다. 1장에서 저자는 정책학자들이 대안 없는 사회학적 비판에 대해 ‘So What?’으로 대응하곤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So What?’은 중요한 물음이다. 단지 저자의 말대로, 그것이 정책사회학자보다는 정책학자에게 더 적절한 물음인 것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작업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까지 “So What?”이라고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 묶음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더 많은 장님들’을 호명하는 셈이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코끼리라는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 무언가를 옮길 방법도 더 명징한 시각에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님들’은 저자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저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So What?”이라고 물어야 한다.


3. 사소하지 않은 아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정책과 사회』에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먼저 저자에게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이 부분적으로 포착된다. 예컨대 저자는 해석적 접근법을 소개하면서 “이해관계와 제도들은 정책행위자들을 강제하는 외생적인 변수가 아니라 행위자의 정책 담론으로 구성되는 결과로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지만(23), 실제로 해석적 접근법을 적용한 6장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와 미래 탄소시장의 상상」에서는 “탄소시장과 상품시장의 상호적 공동생산은 시장경쟁력, 기업 불평등, 사회 불평등에 관한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에 따라 선택적으로 일어난다.”고 서술한다(231). 해석적 접근법을 적용하면서 담론을 이해관계에 의해 구성된 결과로 간주한 것이다. 그 결과 6장은 같은 문제를 이해관계 접근법으로 다룬 2장의 서술과의 차이점을 근본적인 관점 차원에서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이로써 실제로 인간과 제도의 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에서 현격하게 다른 접근법들은 의도치 않게 ‘주목하는 서술 대상’에 차이가 있는 관점들 정도로 평면화된다. 또한, 같은 문제에 동원된 접근법들이 충돌 및 발산하는 해석 대신 수렴하는 해석들만 서술하는 것은 접근법 간의 상이성을 약화하고 상보성만을 강조하는 결과에 경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정책과 사회』는 정책과 사회를 둘러싼 깊고 복잡한 맥락을 읽어낸다는 본래 목적의 달성에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복잡한 문제에 대한 단순명료한 답변이 종종 기대되는 시대에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읽어라”라는 원론적 가르침을 경험적 데이터와 체계적인 분석 도구로 제공하는 이 책은 ‘복잡하게 읽는 법’을 원하거나 알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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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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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전역 후 역세권청년주택 건물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애초에 입주하려던 원룸이 당첨되지 않아 비싼 보증금과 월세까지 감수하면서 내 형편에 ‘사치’인 1.5룸을 계약했다. 입대 전에 살던 3평 남짓의 원룸이 우울증 악화의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는 자기진단에 덧붙여, 최소한의 활동 반경과 ‘내 집’의 의미를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자기합리화’를 거친 결과였다.


직접 고른 가구와 집들이 온 친구들의 선물이 어우러진 거실을 둘러보고, 빼곡해지는 방명록을 읽을 때의 기쁨이 주는 힘은 작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비견할 만큼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자격’에 관한 심문의 순간들이 있었다. 제대로 적응하려 노력해 보지도 않고 섣불리 도망쳐 온 ‘분수에 맞지 않는’ 집에서 숨 쉬는 것은 아닌지, 엄마의 소득을 끌어 얹은 집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고 있는지, 취업 준비 대신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이따금 무기력에 빠질 ‘여유’가 허용될 만한 것인지 등. 한편으로 이제 나의 게으름과 우울을 설명할 하나의 서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난한 청년의 서사였다. 비역세권의 3평짜리 단칸방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나의 방황은 ‘등 따숩고 배부른 철부지 서울대생의 한탄’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셈이었다. 밥 한 끼와 친구 생일에 보낼 기프티콘을 저울질하는 계산의 만성화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득분위, 높은 시급의 과외비가 기입되는 통장, 집안의 부엌과 침실을 깔끔하게 구획하는 문이 공통으로 내가 가난하지 않다는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의 ‘자격’에 대한 의심은 이중적이었다. 10평의 역세권 1.5룸에 거주할 ‘자격’과 삶의 술어로 ‘가난’을 사용할 ‘자격’ 사이에서 그 의심은 부유(浮游)했다.


조문영의 『빈곤 과정』은 나와 같은 청년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연구 대상은 ‘집’이 없는 중국 하얼빈의 농민공과 대기업 해외 자원봉사단에 참여한 한국 대학생을 아우른다. 그럼으로써 빈곤에 접속되고 더 적극적으로 연루될 계기를 다양화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 중 하나라면 사회적 차원의 ‘빈곤 문제’에 무관심하던 나에게서는 그 의도가 달성되었다고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형적인 빈자와 전형적인 빈자 범주 바깥의 행위자, 비인간 행위자를 두루 엮어내면서 이른바 주류 빈곤 담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빈곤의 실체를 탐색한다. 그러나 이것을 빈곤 담론의 범주를 확장하고, 빈민에 대해 더 두텁게 씀으로써 빈곤의 실상을 더 정확하게 서술하는 작업으로만 축소하여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저자의 목적은 빈곤의 의제화에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이다. 요약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의 작업이 인류학적 작업의 장점을 잘 보이면서 ‘균열과 연루를 통한 연대’를 지향한다고 쓰고 싶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이며 왜 유의미하고도 적절한 해석인지, 그의 글들을 따라가며 확인해 보자.


2. 빈곤/노동과 빈곤/자립의 이분법을 낯설게 보기


1. 관료-기계의 사각지대

휴학생은 과외교습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는 법령에 따라 교육청으로 향한 날, 교습비 상한선에 맞춰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시급으로 환산하니 7800원,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이었다. 신고제의 유명무실함을 방증이라도 하듯 20년 전에 정해진 교습비 기준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카페에서 장학금에 대해 이야기하던 친구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 일을 하면 소득이 생기고, 소득이 생기면 그만큼 돈을 안 줘. 그럼 뭐 하러 힘들게 일해?”


제도에는 언제나 결함이 있다. 『빈곤 과정』은 그 결함을 지목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단순히 교습비 기준을 개정하고, 근로연계복지를 도입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결함이 아니다. 1~2장에서 저자는 빈곤 레짐의 전제가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왔음을 보이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를 쟁점화한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먼저 관료-기계를 경유한 공공부조 정책의 도입은 수급자로 하여금 가난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자립 불능자’라는 자기인식을 내면화하게끔 한다. 한편으로, 수급 여부가 빈곤 담론에서 중요한 의무통과점이 됨으로써 비수급자는 빈곤을 ‘우리의 의제’가 아닌 ‘저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자립’을 ‘임금노동’을 통해 성취 가능한 목표로 두고 ‘빈곤’의 대립 항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고용 없는 성장’이 정상화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빈민운동이 전개되던 난곡동에 자활사업 제도가 들어서면서 ‘자립’의 의미가 변모한 사례는 특히 빈곤을 자립 불능과 등치시키는 복지 담론이 왜 문제화될 만한지 잘 보여 준다. 저자에 의하면 자활사업 도입 이전 빈민운동에 참여한 당사자들에게 자립이란 각자도생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존의 그물망을 함께 새로 짜는 실천”이었고 나아가 “외부 자원과의 연결을 통해 상호의존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었다(93). 오늘날 빈민은 자활사업에 참여할 ‘자격’을 인정받으면 취업을 위해 ‘체계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에 ‘피고용인’으로 입장하여 ‘전문가’에게 근로 의욕을 평가받는다. 관료-기계의 언어는 이렇듯 용이한 관리를 위해 ‘자립’마저 감시의 대상으로 포획할 수 있다. 그러나 ‘정해진 방식대로의 자활’이라는 아이러니한 목표는 관료-기계가 원하는 효율을 내지 못했고 정책 대상자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역사적이고도 불가피하지 않은, 의존의 문제화가 불러온 역설이었다.


2. 빈곤의 ‘과정’에 주목하다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105)


3장 「노동의 무게」는 의존의 문제화를 문제화하는 의식을 견지하면서, 저자가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만난 여성 쭤메이의 노동 궤적을 그의 위챗 포스팅 내역과 함께 추적한다. ‘폭스콘 연쇄 자살 사건’을 일으킨 저임금 노동 착취에 대한 비판의식은 폭스콘에서의 쭤메이를 두텁게 쓰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는 폭스콘에서 ‘열성’ 자원봉사자였고, 폭스콘 공장에서 나와 기본급도 없는 보험 판매를 시작한 이유로 ‘자유’와 ‘역량 계발’을 꼽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쭤메이는 노동 현장에서 동등한 성원으로서 환대받지 못했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거부하던 결혼이란 선택지를 끝내 받아들였다. 글로벌 생산 체인이 쭤메이에게 열어 준 ‘일시적’ 가능성이 그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수탈한 뒤 그를 다시 소외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소결이다.


결국 애초의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회귀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쭤메이가 어느 정도 ‘사회적 공장’의 기만적 통치술에 농락당한 열정페이의 희생자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 제기는 신자유주의의 위선적 착취를 넘어 ‘자립적인 임금노동자는 빈곤 담론 바깥의 존재’라는 경계 짓기를 겨냥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쭤메이는 부당한 구조의 힘에 의해 독립적인 여성의 자리에서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 여성의 자리로 밀려 왔을 뿐인가? ‘자립 시도를 좌절당한 피해자’와 같은 자기의미화를 쭤메이는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쭤메이의 표현에 따르면 ‘아이를 돌볼 자유’를 준비하기 위해 그는 삶에서 임금노동의 영역을 자발적으로 축소한다. 그의 돌봄노동은 쭤메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이고,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새롭게 구성될 친족에게 (돈의) 분배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분배노동’이다.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든, 이 지점에서 ‘그래서 쭤메이는 자립적인 노동자 여성이냐, 의존적인 빈곤 여성이냐?’라는 질문이 무의미해진다. 피착취자의 기호에 대해 쭤메이가 갖는 이러한 원심력은 그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만 볼 수 있다.


빈곤의 ‘과정’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4장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선명하게 제시된다. 빈곤이 물질적 결핍뿐 아니라 자신의 권리 주장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체념의식과도 결부된다는 주장은 중요하지만 자칫 빈곤을 스냅샷처럼 파악하는 시선에만 머무를 수 있다. 저자는 쑨위펀(가명)의 ‘집 찾기’ 여정에 동행한 경험을 기술하면서, 국가와 자본뿐 아니라 저자를 비롯하여 쑨위펀을 둘러싼 타자들과 끝내 쑨위펀 자신까지 ‘집을 가질 자격이 없음’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어떻게 동원되었는지를 묘사한다. 저자는 도시의 아파트를 장만하겠다는 쑨위펀의 계획이 현실적으로 엉성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성찰적 문화기술지를 수행함으로써 그러한 ‘중립적’ 판단마저 쑨위펀의 빈곤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빈곤에 대한 실증 연구와 행정학적 접근만으로는 제기할 수 없는 메시지다.


3. 청년 담론, 페미니즘, ‘인류세’와 빈곤의 교차 가능성


내가 쑨위펀의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책의 뒷장을 넘기기를 미룰 정도로 동요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난한 사람이 절박하고도 정당한 꿈을 열망하다 실패하는 이야기는 감정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이 순전히 주인공의 불행을 소비하고 그를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결과는 아닐까? 저자가 쑨위펀의 ‘집’이 특정한 건물과 장소를 고정적으로 가리킨 것이 아니었음에 주목하여, 그의 ‘집’은 “세계 속 자기 ‘자리’를 만드는 부단한 과정”(186)이었다고 해석한 대목을 보자. 쑨위펀에게서도, 쭤메이에게서도 발견되는 이 ‘자리 찾기’의 서사는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연결될 계기를 제공한다. 집이 친구들을 초대하고 우정을 나눌 공간이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과 내 ‘자격’에 맞는 집에 대한 고민은, 쑨위펀과 나의 차이와 함께 동질성을 확인시켜 준다. 더불어 이로써 내가 가난하다는 막연한 감각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빈곤 담론에 연루시킬 만한 구체적 매개체가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상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빈곤 과정』의 5~8장은 실존의 결핍과 일상화된 불안의 정동이 빈곤 담론의 경계를 어떻게 흩뜨리는지 살핀다. 특히 8장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체화한 여성 대학생들이 남성 홈리스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우선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에 제기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로써 불안정성이 일상화된 사회의 ‘취약한 삶’들을 연결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렇게 하여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로 명명된 연세대학교의 여학생들은 다른 프레카리아트인 홈리스와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나는 안전하지 않다’라는 감각이 남성 홈리스를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기호화해 왔음을 성찰한다. 이러한 기호화의 반(反)사실성과 비윤리성을 인식함으로써 이들은 남성 홈리스를 ‘항구적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삶’을 공유하는 같은 프레카리아트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 사례는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의 언어로 작동하는 동시에 홈리스 배제의 언어로 작동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비단 페미니즘뿐인가?


기존의 담론이 포섭하지 못하는 문제를 문제화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담론화하는 순간 배제의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청년담론의 주요 발화자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지방대 청년’, ‘용접공 청년’과 같이 특정화되어 담론장에 등장하는 “이상한 채굴주의” 작동을 문제화하는 사유와, ‘인류세’ 담론이 축산업 시스템에 연루됨으로써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를 누락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모두 이러한 위험과 결부된다. 저자의 소묘로부터도 취약한 삶의 연대 가능성을 낙관하기만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글로벌 빈곤 레짐에 포획된 이중행위자로서의 대기업 실무자들은 비판의 칼날을 진정성 게임에 스펙 쌓기를 위해 섞여든 ‘불순한’ 대학생에게 겨누고, 대학생들은 봉사 경험에 ‘과몰입’하는 대신 그것을 적당껏 에피소드들로 분절하여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찾는 데 천착하며(6장), 중국 둥베이 선양의 한국인 이주자들은 상호의존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안전의 감각을 얻기 위해 ‘자립 불능의 루저’라는 자의적 낙인을 재생산하며 자기 영역 바깥에 위치시킨다.(7장)


저자가 “아직은 농익지 못한 물음, 고민, 제안을 담았다”고 밝힌 9장은 비인간 빈곤 문제를 구체적으로 전개하기보다 “새로운 시작” 정도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13), 미래의 담론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전제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저자는 빈곤 담론이 확장하는 대신 오히려 인간 다수가 “나도 피해자다”를 외치며 각자의 안전을 확보하려 애쓰게 된 작금의 상황을 지적하는데, 나는 이 상황이 새로운 문제화의 정치를 추구한 담론들의 등장과 인과적으로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페미니즘 진영의 문제 제기가 청년 남성에게는 “그러고 보니 군대는 왜 우리만 가냐”와 같은 문제 제기를 촉발했고, 그럼으로써 같은 담론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아니라 같은 담론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유한 진영 간의 대립 장을 형성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연대는 자동 발생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동거(同居)’의 역량을 강조하는 9장의 메시지는 굉장히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이것은 다른 세계에 연루되는 경험이 동반되어야만 길러질 수 있는 역량이다. 여성 대학생들이 남성 홈리스의 “예쁘다”, “(화장 안 하니) 얼굴이 바뀌었네”와 같은 말에 느끼는 불편함은 남성 홈리스와 연대하겠다는 결심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해결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재구성하면서 다른 여성과의 연대의식을 느꼈듯, 관찰자의 자리를 떠나 홈리스와 활동가의 경험에 다가서고 ‘무임승차의 불공정성 문제’처럼 청년 세대에게 익숙한 언어에 낯섦을 느껴야 그들과의 연대감을 강화할 민감성을 가질 수 있다. 빈곤이 구조적 문제라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이 조직은 홈리스의 자활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와 같은 질문지를 작성하는 모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것이다.


4. 나가며


인류학적 작업 방식과 결합하여 수행하는 문제 제기에 초점을 맞추어 조문영의 『빈곤 과정』을 검토하였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은 ‘자립 불가능한, 노동하지 못하는 빈자’나 ‘스냅샷으로서의 빈곤’ 관념에 효과적으로 균열을 낸다. 상호의존의 보편적 불가피성, 분배노동, 과정으로서의 빈곤이 그 자리에 틈입한다. 둘째, 인류학적 담론과 문화기술지의 방법을 종합하는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상술한 목표에 적합하다. 일례로 저자는 특정 활동을 경유한 모든 청년의 경험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는 않았다는 부연과 그 증거를 보태는 식으로 일반화를 지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문화기술지의 방법에 적합할 뿐 아니라 기존의 담론에 균열을 낸다는 목적에도 적합하다. 한편 푸코나 해러웨이 등이 제기한 이전 인류학적 담론의 문제의식과 방법을 수용한 것은 빈곤이 개인의 삶을 넘어 다양한 관계 속에서도 부유하는 양상을 기술할 수 있게 함으로써 르포와 구별되는 인류학적 작업의 장점을 보여 준다. 셋째, 이 책은 연대를 지향하되 그것이 담론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환기하고 ‘동거의 역량’이라는 필요조건을 제시한다. 이러한 역량의 습득은 다양한 관계에 연루되는 동시에 그것의 비대칭성을 성찰하는 태도를 내면화해야 가능하다.


동거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비록 이 책의 근본적 목적은 빈곤 레짐에 대한 문제제기와 빈곤의 의제화에 있지만, 나는 이미 책으로써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빈곤에 연루되는 방법 중 하나는 『빈곤 과정』의 문화기술지들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독서는 몸의 체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타자의 삶에 ‘가성비’ 좋게 연루될 매체이자 다음 연루의 발판이다. 내 삶의 서사를 『빈곤 과정』의 문화기술지 속 연구 참여자들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빈곤’이라는 화두와 연결시키는 경험은 빈곤과의 연루를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누가 포기를 해? 남편 죽고 차 사고 나서 다리 다쳤잖아. 2년 동안 방에 누워만 있었어. 아무것도 못했어. 내 아들딸이 대소변 다 받아내고. 2위안도 못 써서 벌벌 떨었어. 돈 없어서 집에 있는 거 죄다 팔았어. 그걸 어떻게 내가 안 돌아왔다고 쉽게 말해?"

"농사를 안 지은 건 자동 포기에 해당돼요. 대대를 찾아가요."

"날 거치지도 않았잖아. 난 매년 겨우 살아. 애들이 다 컸는데 [돈이 없어] 배우자도 못 구해. 내가 확 죽으려고 했는데 딸이 울면서 말렸어. 아빠도 없는데 엄마까지 없으면 어떻게 사냐고……." - P167

전화를 끊었다. 쑨위펀은 여전히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님이 그러는데 이게 법률적으로는 아줌마 얘기가 맞지만, 이 마을뿐 아니라 하얼빈 전 지역에서 정책이 이런 방식으로 시행되고 있어서 딱히 방도가 없대요." 내 궁색한 번역에 쑨위펀은 소송을 하면 돈이 얼마나 들지 물었다. 왕쥔이 옆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에이 토지 보상받는 액수의 곱절은 들 거예요." 쑨위펀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껴입으며 내게 덤덤히 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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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론의 모든 것 - 신비평부터 퀴어비평까지
로이스 타이슨 지음, 윤동구 옮김 / 앨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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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열 학부생의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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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 입문 - 해석학에서 문화과학으로 문명공동연구 5
아힘 가이젠한스뤼케 지음, 박배형 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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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 군대에서 이 책 읽었다고 말씀드렸더니 두 눈 휘둥그레해지면서 ˝그걸 읽었어? 그 책은 입문이 아니야~˝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심. 제목에 속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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