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사라져갈 때 - 식민 말기 한국의 모더니즘적 상상력
자넷 풀 지음, 김예림.최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우리가 ‘식민 말기’라고 부르는 1930~1940년대는 당대인들에게는 다르게 상상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를 넘어 하나의 ‘지역’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민족의 청사진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고, 도래할 해방을 모르는 지식인들은 절망적 현실에 조응하는 미래 감각을 경유하여 현재를 재구성해 나가야 했다. 자넷 풀의 『미래가 사라져갈 때』(문학동네, 2021)는 이러한 고투들을 식민 말기 ‘조선 모더니즘’의 자리에 기입하기 위하여 쓰였다. 여기서 풀이 주목하는 것은 근대성의 세계사라는 맥락 속에서 당시 ‘조선 모더니즘’에 각인되어 있던 파시즘적 시간성이다. 몇몇 저자의 이른바 ‘비주류’ 장르에 속하는 개별 작품들을 검토함으로써 이 새로운 시간 형식의 스펙트럼을 추적하고 ‘식민 말기’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1장에서는 최명익이 미래를 현재의 집요한 반복으로 상상하는 작가로 분석된다. 그의 단편소설 「비 오는 길」은 진보에 대한 믿음이 훼손되고 인과의 시간성이 일상의 모자이크적 디테일들로 ‘사진화’한 현장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최명익은 산업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통근의 시간을 서술하면서 한편으로 일상을 역사화하고 있다. 「비 오는 길」 속 통근하는 병일의 도시 걷기는 거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다는 감각을 체현함으로써 부르주아의 출현이 구성한 ‘산책자’의 도시 경험을 전도한다. 요컨대 식민지 부르주아로서 병일은 도시를 객체화하는 제국의 부르주아 ‘주체’와 달리 내면을 틈입해 오는 거리의 위력에 저항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면서 ‘나만의 영역이나 시간’이라는 판타지를 파열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사진적’인 디테일의 과잉을 통해 최명익은 식민 체제의 황민화 정책이 동질화하려 한 일상의 비균질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매끈한 제국자본주의적 주체성과 시간성이 포섭하지 못하는 잔여를 가시화하기 위해 그는 전략적으로 일상에 매몰되는 제스처를 취했다.


2~3장에서 분석되는 저자들은 역사철학자 서인식과 작가 이태준이다. 흔히 전향자(轉向者)로 알려진 서인식의 노스탤지어 비판을 다루는 2장은 제국의 수사로써 탈식민화된 조선을 상상하고자 한 그의 시간적 실천을 분석한다. 이것은 과거로의 귀환을 지향하는 노스탤지어 바깥에서 전통의 가치를 구제하는 동시에 미래와 연결하려는 시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현대’를 전통에 대한 부정의식과 긍정의식의 변증법적 종합을 예비하는 전 지구적 전환기로 규정함으로써 복고주의의 함정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전통을 헤게모니 투쟁의 매개로 지목하는 것은 현존하는 식민 권력에 대한 묵인의 함의를 피하기 어려우며, 식민본국과 식민지의 소멸을 꿈꾸는 그의 유토피아주의에는 실질적 불평등을 레토릭으로 회피하려는 제국 담론의 반복이라는 혐의가 씌워진다. 여기서 풀은 서인식이 동양주의의 제국주의적 함의와 일본의 전체주의적 행태를 명시적으로 지적한 바 있음을 환기하며 그러한 비판을 재고시키고 있다.


비슷한 작업이 3장의 이태준에 대한 분석에서도 전개된다. 제국 담론을 따라 ‘동양 문화’를 사사화(私事化)한 그의 수필이 재생산하고 은폐하는 것들을 지적하면서, ‘조선 문화’를 과거로 미끄러뜨리는 담론이 어떻게 전유되는지 서술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수필에서는 ‘사적 동양’이 식민 주체가 생산한 지식과 공명할 뿐 아니라, 골동품의 소유와 배치로써 현전(現前)하는 과거가 가정의 자율적 실내 공간이라는 부르주아적 개인성의 지반을 성역화하며 지금-여기와 연결됨으로써 제국주의적 모험과 기념품 수집의 욕망에 연루된다. 동시에 「고완」 속 아버지의 연적은 지금-여기에서 식민지 이전을 감각게 하는 육체의 귀환을 수반하면서 이태준의 다단한 자기를 구성한다고 풀은 쓰고 있다. 이때 육체는 경험의 핵심으로서 상상력과 결합하여, 국가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유토피아적 충동의 제공처가 된다.


사적 공간의 소유라는 부르주아적 열망이 자본과 일본의 동화정책에 의해 교란되는 양상을 들여다보는 4장을 거쳐, 5장은 파시즘과 가장 직접적으로 결탁한 최재서의 국민문학론에 다다른다. 박태원의 ‘자화상’ 연작으로 대표되는 도시 변두리 소설을 분기하는 제국 자본과 사라져 가는 토착문화가 갈등하는 일상 속 도덕 경제와의 교섭장으로 읽어내면서, 풀은 죄의식과 결백이 혼입된 도덕 경제의 복합성과 일상의 결정 불가능성을 반영하는 스타일을 분석하는 데 4장의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5장 속 조선은 파시즘적 황민화 정책에 더욱 잠식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유럽식 ‘근대’에 대한 대안적 미래를 상상한 최재서의 욕망과 결부하는 풀의 독창적 사유가 전개된다.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전통적 헤게모니의 종말을 예고하는 상황에서, 국민문학론은 하나된 대동아공영권을 신질서 구축에 참여할 주체로 호출함으로써 ‘위기’의 징후들이 일소된 미래에 상응하는 새로운 미학을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모더니즘은 ‘동양 문화’라는 환상을 생성한 식민주의적 기획을 은폐하면서 파시즘의 비전과 통합된다.


그러나 최재서의 『국민문학』에 수록된 소설들은 황민화로써 실천되는 파시즘적 모더니즘의 열망이 결코 단성화될 수 없음을 제국의 언어로 보여 주었다. 김남천의 「어떤 아침」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6장은 소설 속 외견적 통합으로부터 차이들의 해소 불가능한 굴절성을 포착하는 멜랑콜리를 징후적으로 읽어내는데, 이는 일본어와 조선어 쓰기를 각각 일제에 대한 자발적 협력과 저항으로 읽어내는 이분법을 거부하려는 풀의 기본 테제와 부합한다. 풀은 언어의 항시적인 전유 가능성과 동시에 일본어 쓰기의 딜레마를 지적한다. 예컨대 김사량의 재현 정치학은 제국의 시간을 대체하기 위해 조선인 빈곤층의 구술사를 지식인의 유창한 일본어로 전설화함으로써 제국이 생산한 민족지적 거리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어떤 아침」의 가치는 이와 대조되게 황민화 서사의 불가능한 약속을 가시화하면서 일상을 제국 시간의 틈새로 의미화한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렇듯 부재하는 미래 속에서 새로운 시간의 형식을 모색한 미학적 실험들의 풍부한 성취가 인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이 책에 제기됨직한 비판 중 하나는 ‘파시즘’의 외연에 대한 의문이다. 풀에게서 ‘파시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경우에 그의 분석은 단결된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전체주의적 동원령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그리고 그와 공진화한 부르주아적 주체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다. 물론 후자의 요소들이 파시즘과 긴밀히 연동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이 책의 서론 또한 파시즘이 근대성의 이탈이 아니라 하나의 귀결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파시즘이라는 표현에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는 사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을 자유주의적 제국과 파시즘적 제국의 경합으로 이해할 때 포착될 수 있는 최소한의 복잡성을 희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조선 문학을 ‘파시즘이 각인된 모더니즘’의 자리에 위치시키려는 기획의 달성 여부는 희미해진다. 만약 파시즘을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나 "식민주의 없는 식민주의"와 같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면, 풀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어떻게 협의의 파시즘을 산출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증하거나 인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자와 관련된 논의들은 부가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식민 말기’의 시간적 탐색들을 검토하여 당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된다. 풀은 사실상 판이한 두 가지의 성취를 해냈는데, 정교하고 세밀한 독법으로 텍스트의 가치를 구명한 것이 그 중 하나이고 확장된 콘텍스트를 통해 기존 문학장의 지형도를 흔들었다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다시 말해 그는 흔히 내용적 한계로 인식되던 일상에의 천착을 텍스트를 조건짓는 틀로 재의미화할 때 비로소 포착 가능한 다양한 실천들을 읽어냈으며, 당대 조선을 국제 정세와 조응시킴으로써 국(문)학을 넘어서는 한국(문)학의 한 지평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바 ‘식민 말기’에 대한 재독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기꺼이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