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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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전역 후 역세권청년주택 건물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애초에 입주하려던 원룸이 당첨되지 않아 비싼 보증금과 월세까지 감수하면서 내 형편에 ‘사치’인 1.5룸을 계약했다. 입대 전에 살던 3평 남짓의 원룸이 우울증 악화의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는 자기진단에 덧붙여, 최소한의 활동 반경과 ‘내 집’의 의미를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자기합리화’를 거친 결과였다.


직접 고른 가구와 집들이 온 친구들의 선물이 어우러진 거실을 둘러보고, 빼곡해지는 방명록을 읽을 때의 기쁨이 주는 힘은 작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비견할 만큼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자격’에 관한 심문의 순간들이 있었다. 제대로 적응하려 노력해 보지도 않고 섣불리 도망쳐 온 ‘분수에 맞지 않는’ 집에서 숨 쉬는 것은 아닌지, 엄마의 소득을 끌어 얹은 집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고 있는지, 취업 준비 대신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이따금 무기력에 빠질 ‘여유’가 허용될 만한 것인지 등. 한편으로 이제 나의 게으름과 우울을 설명할 하나의 서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난한 청년의 서사였다. 비역세권의 3평짜리 단칸방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나의 방황은 ‘등 따숩고 배부른 철부지 서울대생의 한탄’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셈이었다. 밥 한 끼와 친구 생일에 보낼 기프티콘을 저울질하는 계산의 만성화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득분위, 높은 시급의 과외비가 기입되는 통장, 집안의 부엌과 침실을 깔끔하게 구획하는 문이 공통으로 내가 가난하지 않다는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의 ‘자격’에 대한 의심은 이중적이었다. 10평의 역세권 1.5룸에 거주할 ‘자격’과 삶의 술어로 ‘가난’을 사용할 ‘자격’ 사이에서 그 의심은 부유(浮游)했다.


조문영의 『빈곤 과정』은 나와 같은 청년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연구 대상은 ‘집’이 없는 중국 하얼빈의 농민공과 대기업 해외 자원봉사단에 참여한 한국 대학생을 아우른다. 그럼으로써 빈곤에 접속되고 더 적극적으로 연루될 계기를 다양화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 중 하나라면 사회적 차원의 ‘빈곤 문제’에 무관심하던 나에게서는 그 의도가 달성되었다고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형적인 빈자와 전형적인 빈자 범주 바깥의 행위자, 비인간 행위자를 두루 엮어내면서 이른바 주류 빈곤 담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빈곤의 실체를 탐색한다. 그러나 이것을 빈곤 담론의 범주를 확장하고, 빈민에 대해 더 두텁게 씀으로써 빈곤의 실상을 더 정확하게 서술하는 작업으로만 축소하여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저자의 목적은 빈곤의 의제화에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이다. 요약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의 작업이 인류학적 작업의 장점을 잘 보이면서 ‘균열과 연루를 통한 연대’를 지향한다고 쓰고 싶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이며 왜 유의미하고도 적절한 해석인지, 그의 글들을 따라가며 확인해 보자.


2. 빈곤/노동과 빈곤/자립의 이분법을 낯설게 보기


1. 관료-기계의 사각지대

휴학생은 과외교습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는 법령에 따라 교육청으로 향한 날, 교습비 상한선에 맞춰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시급으로 환산하니 7800원,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이었다. 신고제의 유명무실함을 방증이라도 하듯 20년 전에 정해진 교습비 기준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카페에서 장학금에 대해 이야기하던 친구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 일을 하면 소득이 생기고, 소득이 생기면 그만큼 돈을 안 줘. 그럼 뭐 하러 힘들게 일해?”


제도에는 언제나 결함이 있다. 『빈곤 과정』은 그 결함을 지목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단순히 교습비 기준을 개정하고, 근로연계복지를 도입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결함이 아니다. 1~2장에서 저자는 빈곤 레짐의 전제가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왔음을 보이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를 쟁점화한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먼저 관료-기계를 경유한 공공부조 정책의 도입은 수급자로 하여금 가난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자립 불능자’라는 자기인식을 내면화하게끔 한다. 한편으로, 수급 여부가 빈곤 담론에서 중요한 의무통과점이 됨으로써 비수급자는 빈곤을 ‘우리의 의제’가 아닌 ‘저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자립’을 ‘임금노동’을 통해 성취 가능한 목표로 두고 ‘빈곤’의 대립 항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고용 없는 성장’이 정상화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빈민운동이 전개되던 난곡동에 자활사업 제도가 들어서면서 ‘자립’의 의미가 변모한 사례는 특히 빈곤을 자립 불능과 등치시키는 복지 담론이 왜 문제화될 만한지 잘 보여 준다. 저자에 의하면 자활사업 도입 이전 빈민운동에 참여한 당사자들에게 자립이란 각자도생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존의 그물망을 함께 새로 짜는 실천”이었고 나아가 “외부 자원과의 연결을 통해 상호의존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었다(93). 오늘날 빈민은 자활사업에 참여할 ‘자격’을 인정받으면 취업을 위해 ‘체계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에 ‘피고용인’으로 입장하여 ‘전문가’에게 근로 의욕을 평가받는다. 관료-기계의 언어는 이렇듯 용이한 관리를 위해 ‘자립’마저 감시의 대상으로 포획할 수 있다. 그러나 ‘정해진 방식대로의 자활’이라는 아이러니한 목표는 관료-기계가 원하는 효율을 내지 못했고 정책 대상자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역사적이고도 불가피하지 않은, 의존의 문제화가 불러온 역설이었다.


2. 빈곤의 ‘과정’에 주목하다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105)


3장 「노동의 무게」는 의존의 문제화를 문제화하는 의식을 견지하면서, 저자가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만난 여성 쭤메이의 노동 궤적을 그의 위챗 포스팅 내역과 함께 추적한다. ‘폭스콘 연쇄 자살 사건’을 일으킨 저임금 노동 착취에 대한 비판의식은 폭스콘에서의 쭤메이를 두텁게 쓰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는 폭스콘에서 ‘열성’ 자원봉사자였고, 폭스콘 공장에서 나와 기본급도 없는 보험 판매를 시작한 이유로 ‘자유’와 ‘역량 계발’을 꼽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쭤메이는 노동 현장에서 동등한 성원으로서 환대받지 못했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거부하던 결혼이란 선택지를 끝내 받아들였다. 글로벌 생산 체인이 쭤메이에게 열어 준 ‘일시적’ 가능성이 그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수탈한 뒤 그를 다시 소외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소결이다.


결국 애초의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회귀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쭤메이가 어느 정도 ‘사회적 공장’의 기만적 통치술에 농락당한 열정페이의 희생자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 제기는 신자유주의의 위선적 착취를 넘어 ‘자립적인 임금노동자는 빈곤 담론 바깥의 존재’라는 경계 짓기를 겨냥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쭤메이는 부당한 구조의 힘에 의해 독립적인 여성의 자리에서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 여성의 자리로 밀려 왔을 뿐인가? ‘자립 시도를 좌절당한 피해자’와 같은 자기의미화를 쭤메이는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쭤메이의 표현에 따르면 ‘아이를 돌볼 자유’를 준비하기 위해 그는 삶에서 임금노동의 영역을 자발적으로 축소한다. 그의 돌봄노동은 쭤메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이고,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새롭게 구성될 친족에게 (돈의) 분배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분배노동’이다.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든, 이 지점에서 ‘그래서 쭤메이는 자립적인 노동자 여성이냐, 의존적인 빈곤 여성이냐?’라는 질문이 무의미해진다. 피착취자의 기호에 대해 쭤메이가 갖는 이러한 원심력은 그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만 볼 수 있다.


빈곤의 ‘과정’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4장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선명하게 제시된다. 빈곤이 물질적 결핍뿐 아니라 자신의 권리 주장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체념의식과도 결부된다는 주장은 중요하지만 자칫 빈곤을 스냅샷처럼 파악하는 시선에만 머무를 수 있다. 저자는 쑨위펀(가명)의 ‘집 찾기’ 여정에 동행한 경험을 기술하면서, 국가와 자본뿐 아니라 저자를 비롯하여 쑨위펀을 둘러싼 타자들과 끝내 쑨위펀 자신까지 ‘집을 가질 자격이 없음’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어떻게 동원되었는지를 묘사한다. 저자는 도시의 아파트를 장만하겠다는 쑨위펀의 계획이 현실적으로 엉성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성찰적 문화기술지를 수행함으로써 그러한 ‘중립적’ 판단마저 쑨위펀의 빈곤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빈곤에 대한 실증 연구와 행정학적 접근만으로는 제기할 수 없는 메시지다.


3. 청년 담론, 페미니즘, ‘인류세’와 빈곤의 교차 가능성


내가 쑨위펀의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책의 뒷장을 넘기기를 미룰 정도로 동요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난한 사람이 절박하고도 정당한 꿈을 열망하다 실패하는 이야기는 감정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이 순전히 주인공의 불행을 소비하고 그를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결과는 아닐까? 저자가 쑨위펀의 ‘집’이 특정한 건물과 장소를 고정적으로 가리킨 것이 아니었음에 주목하여, 그의 ‘집’은 “세계 속 자기 ‘자리’를 만드는 부단한 과정”(186)이었다고 해석한 대목을 보자. 쑨위펀에게서도, 쭤메이에게서도 발견되는 이 ‘자리 찾기’의 서사는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연결될 계기를 제공한다. 집이 친구들을 초대하고 우정을 나눌 공간이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과 내 ‘자격’에 맞는 집에 대한 고민은, 쑨위펀과 나의 차이와 함께 동질성을 확인시켜 준다. 더불어 이로써 내가 가난하다는 막연한 감각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빈곤 담론에 연루시킬 만한 구체적 매개체가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상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빈곤 과정』의 5~8장은 실존의 결핍과 일상화된 불안의 정동이 빈곤 담론의 경계를 어떻게 흩뜨리는지 살핀다. 특히 8장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체화한 여성 대학생들이 남성 홈리스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우선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에 제기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로써 불안정성이 일상화된 사회의 ‘취약한 삶’들을 연결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렇게 하여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로 명명된 연세대학교의 여학생들은 다른 프레카리아트인 홈리스와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나는 안전하지 않다’라는 감각이 남성 홈리스를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기호화해 왔음을 성찰한다. 이러한 기호화의 반(反)사실성과 비윤리성을 인식함으로써 이들은 남성 홈리스를 ‘항구적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삶’을 공유하는 같은 프레카리아트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 사례는 페미니즘이 여성 해방의 언어로 작동하는 동시에 홈리스 배제의 언어로 작동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비단 페미니즘뿐인가?


기존의 담론이 포섭하지 못하는 문제를 문제화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담론화하는 순간 배제의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청년담론의 주요 발화자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지방대 청년’, ‘용접공 청년’과 같이 특정화되어 담론장에 등장하는 “이상한 채굴주의” 작동을 문제화하는 사유와, ‘인류세’ 담론이 축산업 시스템에 연루됨으로써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를 누락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모두 이러한 위험과 결부된다. 저자의 소묘로부터도 취약한 삶의 연대 가능성을 낙관하기만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글로벌 빈곤 레짐에 포획된 이중행위자로서의 대기업 실무자들은 비판의 칼날을 진정성 게임에 스펙 쌓기를 위해 섞여든 ‘불순한’ 대학생에게 겨누고, 대학생들은 봉사 경험에 ‘과몰입’하는 대신 그것을 적당껏 에피소드들로 분절하여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찾는 데 천착하며(6장), 중국 둥베이 선양의 한국인 이주자들은 상호의존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안전의 감각을 얻기 위해 ‘자립 불능의 루저’라는 자의적 낙인을 재생산하며 자기 영역 바깥에 위치시킨다.(7장)


저자가 “아직은 농익지 못한 물음, 고민, 제안을 담았다”고 밝힌 9장은 비인간 빈곤 문제를 구체적으로 전개하기보다 “새로운 시작” 정도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13), 미래의 담론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전제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저자는 빈곤 담론이 확장하는 대신 오히려 인간 다수가 “나도 피해자다”를 외치며 각자의 안전을 확보하려 애쓰게 된 작금의 상황을 지적하는데, 나는 이 상황이 새로운 문제화의 정치를 추구한 담론들의 등장과 인과적으로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페미니즘 진영의 문제 제기가 청년 남성에게는 “그러고 보니 군대는 왜 우리만 가냐”와 같은 문제 제기를 촉발했고, 그럼으로써 같은 담론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아니라 같은 담론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유한 진영 간의 대립 장을 형성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연대는 자동 발생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동거(同居)’의 역량을 강조하는 9장의 메시지는 굉장히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이것은 다른 세계에 연루되는 경험이 동반되어야만 길러질 수 있는 역량이다. 여성 대학생들이 남성 홈리스의 “예쁘다”, “(화장 안 하니) 얼굴이 바뀌었네”와 같은 말에 느끼는 불편함은 남성 홈리스와 연대하겠다는 결심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해결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재구성하면서 다른 여성과의 연대의식을 느꼈듯, 관찰자의 자리를 떠나 홈리스와 활동가의 경험에 다가서고 ‘무임승차의 불공정성 문제’처럼 청년 세대에게 익숙한 언어에 낯섦을 느껴야 그들과의 연대감을 강화할 민감성을 가질 수 있다. 빈곤이 구조적 문제라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이 조직은 홈리스의 자활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와 같은 질문지를 작성하는 모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것이다.


4. 나가며


인류학적 작업 방식과 결합하여 수행하는 문제 제기에 초점을 맞추어 조문영의 『빈곤 과정』을 검토하였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은 ‘자립 불가능한, 노동하지 못하는 빈자’나 ‘스냅샷으로서의 빈곤’ 관념에 효과적으로 균열을 낸다. 상호의존의 보편적 불가피성, 분배노동, 과정으로서의 빈곤이 그 자리에 틈입한다. 둘째, 인류학적 담론과 문화기술지의 방법을 종합하는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상술한 목표에 적합하다. 일례로 저자는 특정 활동을 경유한 모든 청년의 경험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는 않았다는 부연과 그 증거를 보태는 식으로 일반화를 지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문화기술지의 방법에 적합할 뿐 아니라 기존의 담론에 균열을 낸다는 목적에도 적합하다. 한편 푸코나 해러웨이 등이 제기한 이전 인류학적 담론의 문제의식과 방법을 수용한 것은 빈곤이 개인의 삶을 넘어 다양한 관계 속에서도 부유하는 양상을 기술할 수 있게 함으로써 르포와 구별되는 인류학적 작업의 장점을 보여 준다. 셋째, 이 책은 연대를 지향하되 그것이 담론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환기하고 ‘동거의 역량’이라는 필요조건을 제시한다. 이러한 역량의 습득은 다양한 관계에 연루되는 동시에 그것의 비대칭성을 성찰하는 태도를 내면화해야 가능하다.


동거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비록 이 책의 근본적 목적은 빈곤 레짐에 대한 문제제기와 빈곤의 의제화에 있지만, 나는 이미 책으로써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빈곤에 연루되는 방법 중 하나는 『빈곤 과정』의 문화기술지들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독서는 몸의 체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타자의 삶에 ‘가성비’ 좋게 연루될 매체이자 다음 연루의 발판이다. 내 삶의 서사를 『빈곤 과정』의 문화기술지 속 연구 참여자들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빈곤’이라는 화두와 연결시키는 경험은 빈곤과의 연루를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누가 포기를 해? 남편 죽고 차 사고 나서 다리 다쳤잖아. 2년 동안 방에 누워만 있었어. 아무것도 못했어. 내 아들딸이 대소변 다 받아내고. 2위안도 못 써서 벌벌 떨었어. 돈 없어서 집에 있는 거 죄다 팔았어. 그걸 어떻게 내가 안 돌아왔다고 쉽게 말해?"

"농사를 안 지은 건 자동 포기에 해당돼요. 대대를 찾아가요."

"날 거치지도 않았잖아. 난 매년 겨우 살아. 애들이 다 컸는데 [돈이 없어] 배우자도 못 구해. 내가 확 죽으려고 했는데 딸이 울면서 말렸어. 아빠도 없는데 엄마까지 없으면 어떻게 사냐고……." - P167

전화를 끊었다. 쑨위펀은 여전히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님이 그러는데 이게 법률적으로는 아줌마 얘기가 맞지만, 이 마을뿐 아니라 하얼빈 전 지역에서 정책이 이런 방식으로 시행되고 있어서 딱히 방도가 없대요." 내 궁색한 번역에 쑨위펀은 소송을 하면 돈이 얼마나 들지 물었다. 왕쥔이 옆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에이 토지 보상받는 액수의 곱절은 들 거예요." 쑨위펀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껴입으며 내게 덤덤히 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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