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의 대가를 감수한다면 사유와 동행하는 삶을 구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바디우가 <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때 필요한 것은 객관적인 조건이 아니라 사유로 나아가는 결단과 그 결단을 유지하는 용기다.
결단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자동성이 지배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종의 단절이 필요하고, 그 단절은 결단을 통과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내리는 결단은 종종 삶의 방향을 바꾼다. 사유를 향한 결단은 자동성과의 부분적인 결별이다. 그로써 삶은 사유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다. 그 결단이 다른 결단, 자동성으로 복귀하는 결단을 통해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다. 그 결단을 지속하고자 할 때 우리는 장애물에 부딪히고 그 장애물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말하자면 용기란 ‘지속의 용기’인 셈이다. 자동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유를 지속할 때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다르게 구축된다. 자동성이 지배하는 일상과 거리를 두는 새로운 일상이 나타날 테고, 그 일상 속에서 사유의 실천이 펼쳐질 것이다. 삶을 바꾸는 것은 용기다.
<사유하라>
선생님께 많이 배웠던 기억이 난다. 배운 대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