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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초코 브루드 라떼 

 

그 사람은 모자를 항상 비스듬히 썼고, 앞 머리카락을 답답하게 내렸다. 머리카락 때문에 모자가 거추장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올린 모습을 내 기억에는 본 적이 없다. 머리카락 아래 그 이마 위에 마치 표식이라도 있는 듯이. 계속 가리고 다닌다. 언젠가 바람이 몰아쳐서 그 답답한 모자와 앞 머리카락을 휙 날려버려서 그 멋진 문장(紋章)이 내 눈에 들어왔으면 했다. 헌데 아무래도 그 답답한 모자를 벗을 기미가 전혀 없고, 마치 앞 머리카락은 한번도 씻지 않은 것처럼 아교가 묻어 있다는 듯이 반질반질하고 무거워 보인다. 

 

나는 오늘 커피를 5잔이나 버렸다. 분쇄된 원두를 부드러운 융을 대고 커피를 내렸는데, 마지막에 계속 딴 생각을 하다가 융이 마를 때까지 커피 물을 다 뽑아내는 실수를 연거푸 5번이나 했다. 그렇게 되면 융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분쇄된 원두의 마지막 쓴 물까지 내려내게 되고,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마실 수가 없다. 융을 5장이난 새것으로 갈아 대더니, 결국 커피물을 다 버리고 달콤한 믹스 커피를 입에 대고 있다. 달콤하고 뜨거운 커피가 입 안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나아졌다. 달콤함은 숨어있는 마력이다. 이것을 맛에서 빼낼 수 없다. 커피는 쌉싸름한 맛과 이 달콤함이 더해져서 어두운 매력을 뿜어낸다. 검은 커피 물이 밀크와 섞여서 이상야릇한 빛깔의 음료로 바뀌고, 그 사이에 달콤한 시럽이 첨가되어서 이 빛깔의 음료가 목구멍을 넘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원두 커피는 그러나 달콤함보다 고소함이 더 먼저이기에, 오늘은 5잔을 개수대에 버렸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커피를 입 안에 넣고 음미할 때, 그 사람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 모자에 그 앞머리는 정말 보기만 해도 답답했다. 그 모자에 그 머리카락. 그리고 항상 긴 바지를 입는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지 않았다면 아마 그 모자를 벗지 않았을까 싶지만, 다른 손님들 때문에 도저히 에어컨을 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항상 아메리카노에 반 샷을 더 추가해서 먹는다. 그 반 샷이 주는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면 주문할 수 없는 그런 미각을 지녔나 보다. 그리고 항상 뜨거운 아메리카노이다. 참으로 격정이 흐르는 순간이다. 그 모자, 그 앞 머리카락, 반 샷 추가된 아메리카노. 그는 뜨거운 액체를 호호 불지도 않고, 탕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들이킨다. 그 이미지가 내게는 격정이다. 다른 손님들이 더운 여름 시원한 음료로 여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아이스 xxx를 시킬 때, 그는 유별나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뜨거울 때 다 마시고 나가버린다.  

 

그렇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몇 번 주문하고, 마시고, 나가버리는 행동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이 분명 나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커피 맛에 관심이 물론 먼저 생겼으리라. 그리고 내 매의 눈에 덜컥 잡혀버린 것이다. 오늘은 그래서 그 사람 옆에 슬며시 갔다. 손에 든 작은 볼에는 로키로드쿠키가 담겨 있다. 나는 그 사람 뒤에서 왼쪽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그 사람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사람은 뒤를 돌아보며, 나와 그 쿠키를 번갈아 보더니 ‘네’하고 목소리를 올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드세요.’ 나는 가까이에서 그 모자 아래, 그 앞 머리카락 아래 어떤 이마와 표식이 있을 지 매의 눈으로 관찰했지만, 알 수 없었다. 대신 그 사람의 치아가 살짝 벌어진 것을 알았다. 윗니 두 개가 여리여리하고 틈이 보임. 

 

나는 매의 눈으로 매장 안에 있는 손님들을 샅샅이 관찰한다. 매의 눈은 그러나 절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한다. 매장 손님들이 바리스타가 마치 스토커 같다고 한다면 좋아하겠는가. 손님이 와서 주문하는 과정을 마치 리듬이 섞인 문장을 듣는 것처럼 기분을 파악하고, 손님에게 가끔 커피 배리에이션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원두는 싱글일 수도 있고, 블렌딩한 것일 수도 있다. 원두를 시키는 손님은 의외로 없다. 그 원두 맛을 알기에는 손님들 혀는 달콤함과 차가움에 길들여져 있다. 내가 추천하는 배리에이션은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이다. 많은 여성 손님들이 이 달콤함과 그 속 깊숙한 다크함에 호들갑을 떨고는 한다. 브류이기에 커피를 내렸고, 라떼와 섞여서 부드러운 느끼함이 함께하며, 초코를 두 차례 불러들이는 이름에서 여성 손님들 뇌는 이미 자극이 충분히 된다. 그리고 입 안에 그 시원하고 달콤 다크한 커피가 들어가면 뇌 속 전류가 120% 충전된다. 나도 안다, 그 기분. 내가 만든 것이니까. 내가 바리스타인 것이 내게는 커피와 시럽 궁합처럼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내 로키로드쿠키를 그 앞니로 똑 똑 부러뜨리는 것을 본다.  

 

매장을 닫는 시간은 11시 11분이다. 물론 간발의 차이로 1~2분 늦어질 수 있지만, 절대 늦지 않게 나는 손님들에게 30분 전에 굿바이 로키로드쿠키를 준다. 그걸 받아 든 손님들은 어색하지 않은 웃음으로 미안해 하며 카페 닫는 시간을 지킨다. 그 사이에 나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나의 애마 Tico를 타러 간다. 마지막 남은 티코일 지도 모른다. 이 지구 상에… 이 티코는 나만이 몰 수 있다. 그래서 티코는 내가 시동을 걸면, ‘우우웅’하고 반겨준다. 아쉽게도 핸들이 슈퍼 핸들이라서 이 티코를 몰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주며 핸들 조작을 하려면 깍두기에 참기름을 발라서 코너를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아주 아슬아슬하다. 미묘한 핸들링으로 나는 깍두기 모양의 티코를 완숙하게 몰아간다. 티코는 내게 아주 소중하다. 이 애가 없으면, 나는 아마 뚜벅이 바리스타로 모양새가 빠질 것이다. 오늘 마감에 나타난 그 사람은 내 로키로드쿠키를 받고는 맛있게 먹고, 천천히 자리를 떴다. 모자에 살짝 손을 올리고는 인사를 하며 나갔다. 항상 아무말 없이 나갔던 그 사람이. 

 

나의 작은 방은 한낮의 열기에 푹푹 쪄서 찜찔방이 따로 없었다. 양치질을 하고, 브래지어를 끌어내고 가벼운 차림으로 매트 앞에 선다. 바리스타인 내가 하루종일 매장에서 손님 장단을 맞춰주는 예리한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요가를 하기 때문이다. 무너진 호흡을 바로잡는 나의 복근과 허리 근육은 이 밤에 다시 단련된다. 대나무 피리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로 나는 양손을 합장한다. 가슴 가까이에. 피리 소리가 저 멀리에서 바람을 따라 들려오면,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마시고 내쉰다. 그리고 수리야나마스까라를 시작한다. 양 손을 머리 위로, 숨 들이마시며. 상체와 하체가 위,아래로 반대 작용하는 힘을 느끼며 호흡을 몇 차례한다. 대나무 피리 소리가 그 굵고 긴 관을 통과하는 것처럼 내 숨이 나의 두 발을 거쳐서 하체를 지나 복부와 허리를 휘감고 척추를 하나 하나 타고 올라와 뒷목을 풀어주고 나서 합장한 손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동시에 다시 호흡을 그러모아서 또다시 반복하며 몸을 이완시킨다.  

 

대나무 피리와 피아노 반주는 절묘하게 서로의 소리를 주고 받는다. 아무도 먼저 뽐내려고 하지 않는다. 둘은 화합을 보여준다. 내가 호흡과 몸동작을 통(通)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기니에게, 그러니까 나는 호흡과 몸동작 그리고 소리까지 함께 한다. 몸동작이 유(有)이면, 호흡과 소리는 무(無)이다. 존재자인 내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호흡과 소리.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나의 몸. 오늘 로키로드쿠키를 깨무는 그 사람 몸동작을 유심히 보며, 그 사람이 무척 소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바르게 행동하는 통에 그 소심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내 눈은 피해갈 수 없지. 그 모자에 그 앞 머리카락은 소심함의 분출구이다. 개자세를 하며 나는 숨을 깊게 쉰다. 내 두 다리 사이로 반대편 벽이 보이고, 내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진다. 한 발을 갖고 와서, 허벅지와 고관절을 이완시키는 동작을 하며 숨을 내쉰다. 수리야나마스까라를 3세트 해주고 나서 반달 자세, 학 자세, 삼각 자세로 동작을 마무리한다. 

 

샤워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그 날 그 날 매장 매출을 기록하고 일기를 쓴다.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로키로드쿠키를 준 날이니까.  

 

어김없이 밤 10시 33분이 되면 그 사람이 들어온다. 오늘도 그랬다. 그러고보니, 그 사람은 올 해 여름이 막 시작될 때부터 내 카페 고객이 되었다. 1주일에 4-5번 혼자 온다. 항상 같은 모자를 썼고, 같은 헤어스타일이다. 바지는 면바지만 입는다. 오늘은 내가 그 사람이 가기 전에 미리 굿바이 로키로드쿠키를 주었다. 그 사람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마시고는 금방 자리를 비웠는데, 오늘은 문 닫기 직전까지 앉아있다가 내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내일 올까? 

 

분침과 시침이 한 곳에 머무를 때, 나는 카페 문을 연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매장 안으로 슬쩍 들어오자 그라인딩한 커피향이 더 무겁게 깔린다. 숨쉬기가 조금 힘들 정도로 꽉꽉 채워진 커피향에 익숙해 지려면 집중이 필요하다. 나는 소리로 집중한다. 분쇄기 소리는 멈추었고, 대신 클래식 음악을 카페 안에 울리게 한다. 메르쿠리우스의 날인 오늘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이다. 다양한 연주자가 있지만, 내가 선호하는 연주는 마냥 아름답고 섬세한 소리를 들려주는 연주자가 아니다. 마치 아이스링크 위에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호(弧)를 그리는 것처럼 날렵하고 힘있는 활 연주를 하는 연주자를 선택한다. 이 점이 참 미스터리한 것이, 같은 4/4 사이즈의 바이올린 활이 현 위에서 긋는 장력의 힘이 연주자마다 다르고, 활과 현이 닫는 각도와 마찰력이 내는 울림의 매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악기 소리는 그 사람 목소리를 닮았다는 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 연주자에게 내재된 노래가 악기를 통해 나오는 것이고, 결국 악기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이올린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면 밀도 높은 커피향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귀와 코가 함께 작용을 하는 이 시간 나는 어느 순간보다 명료해진다. 

 

수요일은 초코초코브루드라떼에 들어가는 다크 초콜렛을 만드는 날이다. 딱딱한 다크 초콜렛을 볼에 넣고 녹인다. 다크 초콜렛은 말 그대로 아주 쓰다. 그 안에 나는 설탕과 레드 와인을 넣는다. 레드 와인을 넣는 이유는 살짝 식초를 넣어서 입맛을 당기게 하는 효과처럼 달콤 다크한 초콜렛에 풍미를 더한다. 식빵에 건포도가 살짝 들어간 듯한 맛이랄까. 씁쓸하고 달콤한 다크 초콜렛 맛에 살짝 산미가 느껴지면 커피의 맛과 상충하면서 동시에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 상충하기 때문에 그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을 맞추자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는 아주 독특한 음료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맛은 넛티와 비터니스, 그리고 마일드이다. 그래서 내가 만든 다크 초콜렛과 내가 그라인딩한 커피 원두는 서로 부딪히면서 동시에 조화를 이룬다. 어렵지 않다. 각각을 향기 맡고, 미각으로 느끼며 맛을 보고, 좋아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둘을 조합할 수 있다. 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맛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남들 입맛을 따라한다. 자신의 혀가 느끼는 그 묘한 느낌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맛 또한 찾을 수 없다.  

 

메르쿠리우스의 날에 초콜렛을 만드는 이유는 수요일이 바로 일주일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신은 신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였다. 박쥐같다고나 할까. 박쥐를 귀가 얇다고 하는데 이해를 하면 그렇지 않다. 박쥐는 두 세력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고 이쪽 저쪽 말을 다 듣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한다. 둘 다 인정하면서 동시에 둘 다 버린다. 헤르메스 신은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뱀이 교차하는 창을 들고, 동분서주하며 신들의 소식을 접하고 전해주고 그리고 판단한다. 헤르메스는 미술 작품에서 기둥으로 변신해서 작품에 비밀을 가져다 준다. 미술가들은 헤르메스 신이 지닌 그 능력을 미술 작품 속에 교묘히 넣어서 작품이 주는 표면적인 이미지 이상을 부여할 수 있었다. 기둥, 날개, 혹은 연금술사들이 사랑하는 노을 빛깔로. 나의 초코 초코 브루드 라떼는 수요일에 1주일의 균형을 맞춰주는 비법의 배리에이션이다. 

 

나의 초콜렛이 다 완성이 되어가자, 손님이 들어온다. 운이 좋은 손님은 따끈한 초콜렛을 넣은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를 마실 수 있었다. 손님은 쉬폰 소재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발목을 살짝 덮는 스니커즈를 신고서. 원피스 무늬는 바나나와 고릴라가 방사형으로 뒤덮혀 있고, 흰색 바탕에 노랑과 네이비 색깔이 섞여서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원피스는 아주 시원해 보인다. 그리고 그 스니커즈가 주는 액센트에 나는 아주 흐뭇해졌다. 깜찍함과 보이쉬함을 그 여성 손님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이쉐도우 그라데이션이 남다르다. 이 여름에 눈두덩이에 그라데이션이라니. 게다가 그 색상이 연두와 노랑이 베이스이고 포인트는 네이비였다. 눈매가 네이비 색 때문에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는데, 아이라이너를 깔끔하게 그려서 눈매가 살아났다. 두꺼운 아이라이너가 아니라 한 획으로 뽑아낸 아이라이너였다. 너무 튀는 눈매 표현 때문에 전체적으로 떠 보일 수 있는데 치크와 입술 색깔이 은은한 팥죽색 버건디이다. 손님은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를 수요일 마다 마시러 와야겠다고 좋아한다. 나는 로키로드쿠키를 하나 끼워준다. 환한 웃음을 보이며 돌아서는 손님. 오! 더 놀라운 것은 원피스 뒤에 빨간색 리본이 묶여있다.  

 

아까 본 두 가지 액센트. 스니커즈와 빨간 리본 덕분에 나는 아주 정력이 넘친다. 정력이라고 하니 에로틱한 장면이 연출될 듯 한데, 바로 그거다. 바리스타의 커피 뽑는 기술은 에로틱하다. 뜨거운 김이 쉭쉭 거리는 커피 머신기에서 악마의 액체라고 일컫는 커피는 크레마를 뽑아내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압력에 의해 바리스타가 원하는 크레마를 추출해 내고 그것으로 그날의 커피 맛이 결정된다. 남녀가 만나서 서로 끌리고 긴장과 이완이 적당히 마모되는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과 육체적 접촉을 말하자면 커피 크레마를 뽑는 원리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시원하든, 뜨겁든 마시는 자의 미각에 의지해서 기호가 갈린다. 남녀의 육체적 사랑이든 정신적 사랑이든 둘 사이의 문제 아니겠는가? 휘파람이 나온다. 나는 손님이 나간 후에 커피 머신을 부드러운 천으로 한 번 닦아준다. 나의 애마 티코 못지 않은 나의 애장머신이다.  

 

나도 차가운 카페라떼에 로키로드쿠키를 입에 물었다. 시원 쌉싸름함과 달콤 톡톡이 어울린다. 쿠키는 앞니에서 톡하고 부러지는 맛이 있다. 로키로드쿠키는 들어있는 마시멜로 덕분에 쫄깃하기까지 하다. 친구와 카톡을 하며 오후 한낮에 쉬고 있는데, 정수리가 간지럽다. 눈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모자를 벗고 서있다. 앞머리가 곱게 빗겨져있고, 분명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해 보인다. 나는 주문대로 간다. 그 사람은 어떤 배리에이션이 좋냐고 묻는다. 나는 오늘은 다크초콜렛을 넣은 초코초코브루드 라떼가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람 옆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성숙한 몸매와 풍성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자이다. 그 사람은 아메리카노 핫과 아이스 초코초코를 시키고는 둘이 함께 자리에 앉는다. 함께 온 여자는 그 사람과 잘 어울렸다. 그 여자는 어느 남자에게나 잘 어울릴 여자 같아 보인다. 두 가지 음료를 가져다주고는 내 매의 눈은 관찰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오래된 인연이었다. 둘 다 말이 많지 않고, 적당히 얘기하고, 적당히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이런 그 사람에게 애인이 있을 줄이야. 내 매의 눈이 참새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뜨거운 에스프레소로 마음을 달래자.  

 

한참을 주문을 받고 한참을 계산대 옆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훤칠한 남자가 한 명 들어온다. 그러고는 그 성숙한 여인이 손을 들며 그 훤칠남에게 인사를 하고는 둘이 팔짱을 낀다. 그렇담. 그 사람 애인이 아닌가보다. 나는 다시 매의 눈을 상공 높히 뜨게 날개짓을 해본다. 훤칠남은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킨다. 세 사람은 신나게 떠든다. 나는 갑자기 벽 한 구석에 있는 거울을 바라본다. 나의 짧은 커트머리와 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 앞 머리카락은 한 쪽 방향으로 비슴듬히 이마 위에 있다. 이런 모습으로는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듯 하다. 한숨을 쉰다. 역시 나의 애마와 나의 커피 머신기만한 애장남이 없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앉아서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이걸 끝내려면 역시 소리를 바꿔줘야 한다. 나는 매장에 흐르던 음악을 재즈로 바꾼다. 피아노 곡이다. 매끄럽고 알찬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멜로디가 들리자 그 사람이 나를 넌지시 쳐다본다. 나는 살짝 일어나 혹시 모를 주문을 기다린다. 

 

- 허비 행콕이죠? 

- 네.  

- 앨범 표지가 검정과 빨강으로 대비되는 디자인으로 기억되는데. 

- 맞아요. 저는 그 중에 이 곡을 가장 좋아해요.  

- 지난 번에 준 쿠키는 뭐에요? 

- 아. 굿바이 로키로드쿠키에요. 어땠어요? 

- 입 안에서 뭔가가 녹더라구요. 

- 마시멜로에요. 저는 마시멜로를 좀 많이 넣어요. 제가 좋아하거든요. 그 쿠키에서만요. 

  함께 오신 분들은 먼저 가셨네요. 친구 분과 오신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 사람 대답을 들어야 할 순간이었는데, 손님이 왔다. 그는 주문을 받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재즈 음반을 들으며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손에 검정색 비닐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계산대 위에 살그머니 올려놓더니, - 쿠키에 대한 답례입니다. 나는 한심하게 고마워요라고 밖에 말 못했다. 그 사람은 다시 나갔다. 나는 비닐 안을 보았다. 금붕어 2마리가 들어있었다. 하나는 주황색, 하나는 까망색. 금붕어 눈알이 돌출되어 있다. 금붕어 두 마리는 내 방 침대 곁에서 잘 살고 있다. 이름을 지어줬다. 은과 호라고. 그냥 동시에 은호!하고 부른다. 그래서 어떤 금붕어가 은이고 호인지 잊어버렸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심한 냉방병에 걸리고 말았다. 카페를 이틀동안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 땀이 났고, 몸에 기운이 없었다. 누워만 있자니, 몸이 더 쳐졌다. 요기니인 내가 꾸물거리고만 있을 수 없지. 나는 정좌를 하고 숨을 고르게 한다. 교호 호흡을 시작했다. 왼손 검지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나머지 콧구멍으로 3초간 숨을 들이마신다. 숨을 멈추고 하나,들,셋 세고 막았던 콧구멍을 열고, 반대편 콧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막고 3초간 숨을 내쉰다. 다시 내쉬었던 콧구멍으로 3초간 들이마신다. 이 호흡을 무념무상이 될 때까지 한다. 콧구멍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호흡에 빠지고나면 머리가 환하게 밝아지고 몸이 정화된다. 

 

 호흡과 명상을 마치고 먹을 것을 챙겨본다. 스크램블 에그를 해야겠다. 계란 2개를 깨서 기름을 살짝 두른 후라이팬에서 몽글몽글하게 볶는다. 소금과 설탕 간을 해서 입에서 살살 녹아버리는 식감을 낸다. 우유 한 잔과 스크램블 에그로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다. 이틀째 노는 날이다. 시간이 얼마없다. 오늘 오랜만에 평일 나들이를 간다. 화장품 매장, 문구 매장, 옷 매장, 구두 매장, 그리고 서점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다. 평일 낮인데, 날씨가 아직 더워서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다. 내가 가장 오래 시간을 들여서 구경하는 책 코너는 요리책 코너이다. 한 장 한 장 세세하게 봐야만 레시피와 요리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요리책은 너무 크고 빳빳한 종이에 되어 있으면 싫다. 쉽게 접히고, 편하게 넘길 수 있고, 적당한 책 사이즈가 부엌 싱크대 위에서 용이하다. 페이지 위로 콧물이 똑 떨어졌다. 냉방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나는 휴지로 닦고는 코를 훔쳤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여전히 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는 문학 코너 책장을 천천히 보고 있었다. 한 발 앞으로 갔다.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책 제목을 훑으며 읽어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한 발 더 앞으로 가자 그 사람이 책 한 권을 꺼냈다. 더 앞으로 다가갈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콧물이 자꾸 나오고 재채기까지 나올려고 해서 가까이 가기가 민망했다.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저돌적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내 목소리에 내가 더 놀랐다. 그 사람은 내게 책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지 두 팔을 살며시 그 사람 어깨 위로 올리고 책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은 난감해했다. 그리고 나는 재채기를 정면에서 해버렸다. 다행히 그 사람 가슴팍에 해댔다. 나는 고개를 빼고는 휙 돌아서 나와버렸다. 기분이 상해버렸다. 내 행동에 내가 실망했고, 그 사람이 책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삐쳤다. 오돌오돌 몸이 떨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따뜻한 스프가 먹고 싶었다. 아니면 죽. 그러고보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딱 달라붙어있었고, 옷은 요가를 할 때 입은 옷에 가디건만 걸친 채였다. 대실망이다. 나는 역시 뭔가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다. 어서 빨리 장소를 옮겨야했다. 발을 구르며 걸었다. 이 꼴에 인사를 하다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걸었다. 어딘가로 나도 모르게 걷고 있었다. 끌리는 남자가 얼마만인데,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단말인가. 아니다. 실수가 아니지, 이게 원래 나인걸. 내가 어디가나! 나는 코를 팽 풀고는 따뜻한 죽을 먹으러 갔다. 볶은 김치죽이다. 붉그죽죽한 죽이 한 그릇이다. 숟가락으로 퍼서 종지에 넣고 식혔다. 한숨이 나왔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다면 좋겠다고 어리석은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가 같이 오자고 했다면 오지 않았을까? 좀 더 적극적일 걸 그랬나! 간간하게 볶아진 김치죽은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갔다. 구시렁거리는 나는 먹기에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아까 집에서는 평상심이었는데, 왜 지금은 구시렁거리는 걸까? 숟가락을 소리나게 놓았다. 그 사람 이름도 모르지않는가. 금붕어를 준 걸 보면 관심이 있다는 건데. 왜, 서점에서는 그토록 서먹하게 대했을까? 생각할수록 궁금해졌다. 죽을 먹고 나는 다시 서점으로 갔다. 

 

그 사람이 뽑았을 법한 지점에서 책을 찾아보았다.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그 사람이 꺼려하는 태도였던 이유가. 난 로맨스 소설은 중고교 시절 이후로는 안 읽는다. 닭살이다. 내용이 항상 뻔하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남들 연애사에 관심 두기가 억울했다.  

 

그 사람을 만났다. 만남이긴한데, 내가 망쳤다. 첫째, 내 모습이 엉망이었다. 둘째, 그 사람이 불편해했다. 셋째, 내가 팽 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금붕어 이름을 얘기해주었더라면 분명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 수 있었을텐데, 난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 알고 싶었다. 나도 문학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왔기에. 이제 생각이 났는데 마구 재채기까지 했다. 나 아직 그 사람 이름도 모르잖아. 매의 눈이 이럴 때는 맹점이다. 눈은 관찰을 하지만, 입은 조용하다. 중요한 정보를 알기 전에 그 사람을 내 머릿속 포트폴리오에 이미지화 해놓는 것에 특별나지, 정작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작업을 하려면 매의 눈보다 참새의 입방아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특히 여자라면. 매의 눈은 바리스타로 충분하다. 제길.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밤새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냉방병과 불면증이 겹쳐서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내 목소리가 허스키가 되어버렸다. 카페 문을 열고 기운없이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고, 멍하게 앉아서 그 사람이 올까 안 올까 신경을 곧두세웠다. 꼭 금붕어 이름을 얘기해줘야지. 꼭. 그 날 쉰 목소리로 하루를 마감했다. 그 사람은 안 왔다. 11시 11분에 정리를 할 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마감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모자를 벗고 가슴에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그 쿠키가 생각이 났어요. 

-...  

바보. 나는 쿠키를 싸서 주고는 금붕어 이름 얘기하는 것을 쏙 빼 놓았다. 그 사람은 쿠키를 받고는 잠시 서성이다가 모자를 쓰고는 나갔다. 잠깐 멍하니 서있다가,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뛰어서 나갔다. 그 사람은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없었다. 돌아서는데, 문가에 그 사람이 쿠키를 물고 서 있다.  

-저기 제가 집까지 태워드리죠.  

그 사람은 모자를 살짝 들었다가 놓는다. 카페 문을 닫고 나오며 그 사람과 나는 나란히 걸어서 티코가 주차된 곳까지 걸었다.  

 

집은 근처가 아니라서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들었다.  

-금붕어 이름을 지었어요. 은과 호라고요. 금붕어들은 제 방에서 잘 살고 있어요.  

-금붕어가 간혹 혼잣말을 들어주는 친구같죠. 제 방에는 수족관이 있어요. 괜찮으면 들어와서 보세요.  

그 사람 표정을 보고 싶었는데, 시야를 앞에 두어야해서 불가능했다. 내 목소리가 그렁그렁해서 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숨소리에 가래가 섞여서 참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람 집에 들어가서 수족관을 볼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냉방병이 시작되더니 독감까지 걸려버렸어요. 

-제가 감기에 특효인 차를 끓여 드리죠. 

그래. 들어가자. 나는 티코를 어느 골목 모퉁이에 세우고 그 사람이 산다는 투룸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이 먼저 계단으로 올라간다. 나는 조용히 뒤따랐다. 현관문을 열자 방 안에서 시트러스 향이 났다. 아니 난향 같기도 했다. 방 안은 적당히 깨끗했다. 창문이 넓어서 커튼이 반쯤 창을 덮고 있었고 그 앞에 바로 침대와 수족관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모자를 여전히 벗지 않았다. 나는 어떻할까. 앉아야하나, 서있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 사람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지 않고 있는 그. 서 있는 나. 둘 다 아주 아주 서먹했다. 수족관. 맞어 수족관을 물어보면 되겠다. 은은한 불빛이 도는 수족관에는 물고기가 안 보였다. 한참을 보고 있자.  

-이 물고기들은 밤에 잠을 자는 물고기에요.  

그 사람은 수족관 귀퉁이에 손가락을 톡하고 쳐본다. 그러자 보라빛과 레몬빛이 그라데이션이 된 물고기가 빼꼼히 주둥이를 내민다. 수족관은 내가 기르는 금붕어 어항에 비하면 원룸에서 아파트로 비견된다. 수족관 안에 조약돌이 하얗고 반짝인다. 

 

그 사람은 여전히 모자를 벗지 않았고, 차를 한 잔 나에게 건넨다. 나는 안경을 고쳐쓰고는 물어본다.  

-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인가봐요. 

-... 

괜히 물어봤나 싶었다. 그러자 그가 스윽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한 번 뒤로 젖힌다. 그러자 그 표식이 드러난다. 왼쪽 이마 구석에 검붉은 자국은 데인 자국같다. 피부가 그 부분만 다른 질감으로 느껴진다. 그 사람은 모자를 다시 쓰려고 했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집 안에서 모자는 답답하죠.  

-... 

그 사람은 내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차를 마시며 끓어오르는 가래를 참았다. 목구멍이 너무 간지러워서 기침이 나올려는 찰나. 그가 휴지를 몇 장 꺼내서 준다. 입에 휴지를 대고 기침을 했다. 가래가 나왔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차를 마시자 정말 폐에 박혀있던 가래 덩어리가 빠져나오는 기분이다. 

-이거 무슨 차에요. 향도 맛도 없어요.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했다. 나도 그냥 있었다. 아까는 시트러스 향 내지 난향이 은은했는데, 지금은 조용한 가운데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가위,바위,보라도 해야하나. 우물쭈물 하고 있자니 이상했다. 차를 다 마시자 가슴이 시원했다. 박하차인가? 박하처럼 시원하다. 

 

그 사람은 찻잔을 들고 개수대에 놓고는 옆에 삐딱하게 섰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있다. 우리는 둘 다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항상 내가 커피를 만들어주었는데, 이제 그 사람이 나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그 사람 미간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는 내 앞에 왔고 안경을 벗겼다. 안경을 벗은 나는 가까이에서 그 사람 표식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키스를 하며 우리는 한참 있다. 내 입 안에서 그 사람 혀가 움직이며 어금니를 따라 앞니까지 움직였다. 나는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시원했다. 우리는 길게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물을 마셨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물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다. 우리 몸이 느껴졌는지 싶을 정도로 키스는 길었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이미 침대 위였다. 침대 위에서 시트러스 향이 났다. 이곳은 정말 수족관이구나. 시원한 이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의 이마와 살짝 기른 머리카락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모자 아래에 있던 그 사람의 머리 모양이 눈을 감은 내게 느껴지고, 그 사람은 내 어깨와 가슴과 겨드랑이를 천천히 만져주었다. 수족관 너머에서 보면 우리 모습은 스크린에서 보는 모습 같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눈이 떠졌다. 그 사람 눈이 나와 마주쳤고, 그것으로 우리는 부드러움 속을 뚫고 맹렬하게 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숨이 멎었다 쉬었다 그 박자에 따라 둘의 몸은 흔들렸고, 역시 수족관 너머에서 보면 마치 한 쌍의 해마 같을 것이었다. 나는 느끼고, 숨 쉬고, 그리고 수족관 너머의 그와 나의 모습까지 상상하며 한 편으로 그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걸 알았다. 아무렴 어때.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는 걸.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에 눈을 뜨자 내 방 안이다. 기침도 멎었고, 가래도 없었다. 어젯밤에 내가 어디에 있었더라. 나는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그 모자를 보았다. 내 방 안에 그의 모자. 나는 이마에 손을 짚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나는 깔깔깔깔 웃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 그 사람이 내 방에 나를 데려다 주었고, 그 사람이 나갈 때 내가 모자를 그의 머리에서 내 머리로 옮겼다. 그 사람이 처음으로 웃었다.  

- 왓츠 유어 네임? 

마치 술을 한 잔 한 것처럼 나는 꼬부랑 영어로 물었다.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내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침대에 쓰러져 자고 일어난 것이다. 

 

양치질을 했다. 아직도 어금니에서 앞니까지 그 사람 혀가 힘을 주며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양치질을 하며 내 얼굴 왼쪽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보조개. 나는 보조개가 없는데. 시트러스 향에 가까운 샴푸로 머리카락을 오래오래 문지르고, 샤워를 하고,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 사람과 몸을 섞었구나. 꿈같기도 했지만, 내 몸이 뭔가 바뀐것이 느껴지자 분명 현실임을 인정했다. 보조개가 옴폭 들어간 부분을 손가락을 눌렀다. 그 사람 이마에 그 표식이 느껴졌다. 어젯밤에 내가 그의 머리를 만지며 손가락 끝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은?  

 

우리는 통성명도 아직 못함... 나는 바리스타, 그 사람은 손님. 우리는 서로 쿠키와 금붕어를 주고 받았고, 서로의 집을 방문했고, 서로의 침대를 보았고, 그리고. 그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일지, 잠시 고민을 해본다. 게다가 보조개라니. 왜 보조개가 생겼지? 바리스타 요기니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요가 자세를 생각해본다. 거꾸로 서기를 한다. 뒤집힌 내 머리 속으로 어젯밤이 떠오른다. 거꾸로 된 나의 몸은 여전히 느껴진다. 한참을 거꾸로 있었다. 어젯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다시 재생되고, 재생된다.  

 

여름이 다 가고 있다. 비가 며칠 내리자 뜨거운 바람이 선선하게 바꼈고, 밤마다 창문으로 가을을 알려주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본다. 그 사람이 카페에 오지 않은 지 하루, 이틀, 셋, 넷, 다섯, 여섯, 칠, 팔 , 구 , 십... 뭐야 십일이 넘어가잖아. 나는 모로 누워서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음... 분명 그 기분은 잊을 수 없고, 나는 그 사람과 잘 지낼 자신이 있는데, 그 사람은 원 나잇 스탠드였나! 흥... 그러라지 누가 기다린대. 사실 기다린다. 그저께는 티코로 그 사람 투 룸에 갔다가 불 꺼진 창을 보고는 돌아섰다. 쳐들어갈까했지만, 그러기에 내 모습이 초라하고 자존심이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은 내 안경을 갖고 있다. 나는 그 사람 모자를 갖고 있다. 서로 원한 것이 물물 교환이었다 이거지. 칫. 별로 좋아보이지도 않는 모자를 나는 밤마다 쓰고는 거울 앞에서 서서 표정 관리를 한다.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듯이 다양한 얼굴 표정으로 모자를 썼다 벗었다가 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을. 늦여름. 그 둘 경계선 사이에서 내 마음은 설레임과 배신감 사이에서 널뛰기를 했다. 그네를 타기도 하고, 시소를 타기도 하고, 그러다가 과녁에 꽂아버린다. 완전히 잊어야지. 그래서 미용실에 갔다. 갈색 머리카락을 까맣게 염색하고 앞머리는 뱅 스타일로 고쳤다. 안경은 새로 맞췄다. 반짝이는 초록색으로. 까맣고, 하얗고-내 희망사항이지만,- 초록빛으로 얼굴을 연출한다. 요새 내 크레마는 조금씩 더 진해졌다. 배신감에 휩싸이면 비터니스가 강해졌고, 넛티는 물러갔으며, 그라인더가 분노의 분쇄기가 되었다. 습도가 사라지는 가을에 내 커피는 점점 쓴 맛이 강해져서 카페 손님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얼굴을 구겼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내 얼굴빛이 정말 창백해져 있었다. 가을이 다 가고 있었다. 나는 요가를 꾸준히 했고, 그 가을 결단을 내렸다. 카페를 친구에게 맡기고 요가 공부를 하러 발리로 떠나기로. 바로 준비를 마치고 10월 마지막 날에 비행기를 탔다. 발리에서 10일 코스로 요가 자격증을 따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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