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상자, 수면(睡眠)

 

  -저 어디에 있게요? 선생님.

아이가 잘 하는 놀이이다. 아이는 내가 오기 전에 항상 숨어 있다. 숨는 장소도 일정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아이는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숨어서, 내가 찾기를 바란다.

지난번에는 피아노 의자 아래에서 훤히 보이는 몸통을 보이고 웃으며 내게 물었는데, 이번에는 벽장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짐짓 어려운 듯이 기웃거리며 어디에 있을까하며 아이 물건을 주섬주섬 만졌다. 아이는 키득거리며 웃는다.

-여기에 있지요.

아이가 벽장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아이는 고학년인데,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서 남자아이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높고 곱다. 벽장에서 나오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오늘 피아노 레슨은 잘 될 것 같다. 아이는 귀가 예민하고 절대음감이 있어서 피아노 소리를 아름답게 울리는 타건을 할 줄 안다. 아이의 손은 매끄럽고 고운데다가, 손톱이 뾰족하게 다듬어져있다. 처음에 나는 손톱이 길어서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는 요령 있게 건반을 건드린다. 피아노 건반은 누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건반이 내려가는 깊이를 따라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소리가 아름답게 울린다. 아이는 오늘도 톡톡거리는 손톱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려준다.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듣자 얼마 전에 갔던 호수가 떠오른다.

 

  호수에 다다랐을 때, 물안개가 덮여있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침부터 엄마와 다투는 말을 해서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속이 불편해서 집에 있기가 싫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서 경차를 몰고는 호숫가로 왔다. 가을이라서 물안개가 자욱했다. 차창을 내리자 짙은 안개가 콧속으로 스몄다. 안개는 습하고 차가웠다. 아무런 냄새가 없지만, 무게는 느껴졌다. 무게. 안개가 공기 중에 떠있는데 왜 무게가 느껴졌을까.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안개는 내 호흡을 길게 늘이며 걸음을 무겁게 했다. 발밑에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밟히며 자글자글 소리를 냈다. 호수는 소리가 없었다. 고요함과 습함 사이에서 나는 걸었다. 엄마와 말다툼은 요점이 없었다. 나는 요점을 분명히 하려고 말을 하는데, 엄마는 감정에 중점을 둔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딸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나는 마치 남자인 것만 같다. 나는 엄마보다 논리적이다. 엄마는 내가 주관 있게 이야기를 하면 너는 생각이 너무 강해라며 어깃장을 놓는다. 나는 내 생각이 강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금 남다르기는 하다. 그게 나인데, 엄마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를 계속 담금질을 하듯이 부드럽게 연마하려고 말을 한다. 나는 말을 섞다가 지친다. 그러면 말이 끊기고 내 마음은 육중한 철문이 닫히듯이 갑갑해진다. 안개를 보며 그 마음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철문은 오히려 녹이 스는 것 같다. 내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 과거를 되짚어본다. 현재를 떠올려본다. 미래를 바라본다. 그 누군가가 내게 있다면 나는 이 고독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없고, 미래에 만날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분홍빛 꿈을 꾼다. 아침 햇살이 서서히 안개를 걷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선생님!

아이는 또 이상한 질문을 할 것이다. 아이는 예술적 기질을 가진 만큼 독특한 생각을 가졌다. 나는 그런 아이가 좋다.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 것뿐이다. 나도 그랬기에, 나는 아이가 질문을 하면 재미있게 들어주고, 나도 재미가 떨어지지 않게 아이에게 도로 질문을 한다. 그래서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의 생각을 주어 담는다. 아이는 그러나 고집이 있어서 다시 반문을 한다. 그런 반문은 가끔은 짜증이 난다. 그럴 때는 내가 어른이기는 하나보다 싶다. 고분고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른들에게는 조금씩 생긴다. 그게 아마 나이가 들면 생기는 권위가 아닐까. 반문을 하는 아이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다. 이 아이는 예술가 기질도 있고, 고집도 있고, 성깔도 있다. 나중에 이 아이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나는 아이가 반문을 하는 것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러자 아이는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다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이 아이가 굳이 피아노를 배우지 않고 독학을 해도 충분히 잘 할 것이라고 아이 어머니에게 얘기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피아노 레슨을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상자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고 나에게 얘기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도착하기 전에 방 안에서 오늘은 어디에 숨을지 온통 쑤신다고 했다. 그것은 아이에게 한 가지 애정표현인 것이다. 다정하게 웃거나, 공손하게 말하는 것을 못하지만, 아이는 제가 어디에 있게요 하는 질문으로 나를 반기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가 방 안에 없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방안에 흐르는 정적 때문에 갑자기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나는 큰 소리로 어머니 아이가 방 안에 없어요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며 저 여기있는대요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조화이지 싶었다. 어머니는 레슨이 끝나자 아이가 조금 독특하다고 이해해 달라며 내게 상자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자는 아이에게 아늑한 공간이며 숨어 있는 것은 그 아이에게 즐거움이었다. 나는 아이가 측은해졌다. 아마 아이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내게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이 반가웠다.

 

  오늘 배우는 새 곡은 마블홀이다. 멜로디가 3박자 속에서 묘하게 음정이 반음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래서 느리게 흘러가는 멜로디가 꿈꾸는 느낌을 준다. 아이는 그 반음정을 놓치지 않고 피아노의 검은 건반을 명료하게 울린다. 반음 부분이 깨끗하게 들려서 마치 종소리같다. 나는 흐뭇하다. 이 아이는 분명 예술가가 될 충분한 소질이 있다. 나는 피아노를 전공하며 이 아이만큼 음정에 민감한 사람을 아직 못 봤다. 아이가 마블홀을 다 치자. 이 곡이 마음에 든다며 마블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너 대리석 알아? 건물에 들어가보면 아주 매끄럽고 구슬같이 빛나는 돌이 바닥에 깔린 것 본 적 있지? 그게 마블이야. 마블홀에 들어가면 아마 자기 발소리가 너 피아노 소리처럼 똑똑히 들리겠지.

 

  아이는 마블이 무엇인지 몰라도 소리로 충분히 표현하고 느낀다. 마블이 무엇인지 알아도 소리를 들을 줄 모르면 다 허탕인 것을 이 아이는 뛰어난 음감과 손가락 감각으로 피아노로 표현한다. 사람 마음도 이런 것 아닐까. 말이 아무리 번드르르해도 마음 속을 간파하지 못하면 한마디로 끝나는 것을 열 마디를 해도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 포장은 알 수 없다. 포장은 그 사람 스타일을 알려주는 것뿐이지, 그 사람 속은 결국 겪어봐야 안다. 내가 그 사람과 악기를 연주한다면 아마 얘기가 다를 것이다. 악기는 호흡이 함께 하는 것이니까. 말을 하는 것은 그럼 어떨까? 만약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계속 맞춰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분명 언젠가는 깨질 관계일 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왜 코가 끝이 굽어있어요?

-그걸 매부리코라고 하는 거야.

-매부리코?

-선생님 어렸을 때 마녀라고 많이 놀림 받았어.

-마녀면 좋은 거잖아요.

-?

-마법을 부릴 줄 알잖아요.

-하하하. 너 덕분에 선생님이 마법이 생겼다. 고마워.

  아이는 기분 좋게 내게 덕담까지 했다. 아이가 보는 눈은 분명하고 의미가 있다. 나도 어릴 적 눈으로 본 사람을 생각해보면 한 번에 간파하는 일이 많았다. 아이는 꾸밈이 없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질문을 할 줄 안다. 어른이 되면 그것이 버릇없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 시선을 잃어버리면 관찰자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관찰자는 죽고 그 대신에 눈치 보는 사람이 들어서겠지.

 

  차창을 내리고 경차로 달렸다. 이른 봄이라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있었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요새 나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꼭 엄마 때문이 아니다. 친구 정희 때문이다. 정희와 나는 고교 동창인데, 대학에 와서 친해졌다. 정희는 나와는 다른 과이다. 그녀는 경영학과를 다닌다. 그녀는 나보다 한 뼘은 더 넘게 키가 크다. 우리는 많이 걷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오늘 또 걷다가 서로의 대화가 싸늘하게 식어서 끝났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면 내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뭐가 문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내가 매우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그러면 나는 꼭 울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처참해진다. 우리는 처음에 그러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만남이 고역이 되었다. 그녀는 큰 근심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내가 그 근심거리인 것인지 분명치 않게 말을 한다. 우리는 강변을 따라서 많이 걷는다. 오늘도 그 길을 걸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걷다가 그녀가 점점 심각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통에 긴장이 되었다. 내가 너무 내 멋대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정희와 걷는 것을 좋아하고,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만남이 점점 어긋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야말로 관찰자는 죽고 눈치 보는 사람만 있다. 관찰자가 되기에는 이제 내게 정희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중요한 말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생각에 몹시 다다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친구 정희는 꼭 처음인 마냥 소중하다. 우리는 함께 밤길을 걷다가 말이 트였다. 그녀는 대학 생활이 좀 별로인 듯 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와 그 밤길을 걸으며 그녀를 동경(憧憬)하게 되었다. 그 날 밤, 하늘에는 반달이 차갑게 떠 있었다. 나는 묘했다. 반달과 정희. 나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고교 시절에 잠시 마주치거나 얘기 나누었을 때는 몰랐던 내 감정은 그 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 감정을 반듯이 세워서 내 마음에 곱게 모셨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된 것과 같았다. 나는 열아홉 살이 되었고, 대학 청춘 시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성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 시간이 맞물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별 물건이 없다. 나는 경차를 깔끔하게 썼다.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쓰는 버릇이 있다. 물건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나는 먼지가 쌓일 정도가 되어야 장소를 정리했다. 좀 건조하고 냉랭한 경차 안에 나 홀로 있다. 도로를 따라 경차는 가볍게 속도를 낸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올리기도 한다. 핸들을 아웃코스에서 지그시 당기는 기분으로 조작하며 천천히 풀어준다. 속도를 느끼는 순간에는 마음이 고요하다. 아무리 큰 사운드의 음악을 틀었다 해도 속도가 주는 집중력에 마음은 단 하나로 모여진다. 나는 지금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어디에도 발 붙지 못하는 나의 이십대 마음을 말이다. 다행이다. 내게 경차가 있어서. 계기판을 보고 기름이 어느 정도 들어있나 가늠해본다. 반 이상을 썼다. 나는 드라이브를 마치고 천천히 브레이크로 속도를 줄이고 앞에 보이는 주유소로 향한다. 주유소에 도착하자 알싸한 기름 냄새가 난다. 3만원어치 기름을 넣고 계기판을 보니 주유 눈금이 서서히 올라간다. 나는 좀 더 달리려고 핸들을 꺾어 좌회전을 하며 주유소를 빠져나간다.

 

  생각해보니 정희와 가장 처음 있었던 시간이 고교 시절 영화를 함께 본 시간이었다. 나는 그 때 말이 없고 조용해서 정희가 말을 더 많이 했다. 우리는 학교 특별 활동 시간에 함께 영화관에 갔다. 단체로 갔는데, 정희가 내 옆에 앉아서 보았다. 스크린에는 거대한 우주선이 떠 있고, 그 우주선에서 광선 검을 든 주인공이 로봇들과 싸우고 있었다. 블랙 투구를 쓴 로봇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주인공은 블랙 로봇이 하는 말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그가 주인공에 게 ‘I’m your father.‘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비명과 동시에 한 쪽 팔을 광선 검에 잃는다. 그리고 우주 속으로 떨어지는 주인공. 사실 이 영화는 어렸을 때 오빠와 함께 본 영화이다. 다시 보아도 그 장면은 가슴을 움찔하게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정희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장면이 인상적이었니? 정희는 딱히 대답을 안 했다.

 

  과거를 떠올리니 현재의 정희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한 번은 그녀와 나 사이에 누군가가 있는 건가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나는 너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그래서 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 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정희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게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살얼음을 내딛는 심정으로 서로의 말을 들어야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무심코하는 말이 정희에게는 비수에 꽂혔고, 그러면 다시 내게 화살이 되돌아왔다. 지겨웠다. 더 이상 그만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정희는 친구였다. 친구란 모름지기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 그녀가 연락을 안 한다면 이대로 서서히 소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희는 꼭 그럴만한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하고 나를 만났다. 우리는 걷고, 이야기 나누고,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헤어지고.

 

  외곽 도로를 타고 달리는 경차는 미세하게 진동을 하고 있다. 왜 이리 외로운지 모르겠다. 겨우 스무살이 지났는데 왜 사는 게 이리도 지겨운 것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관계란 무엇인가 싶다. 엄마와 나, 정희와 나. 둘 다 여자들이다. 나는 여자들이 그래서 싫다. 동성이 주는 친숙함과 편안함 속에는 이상한 자학이 들어있다. 내게 무엇이 결핍이 되어있는 것일까. 수다를 떨 줄 모르는 것이 나의 결핍일까? 정희 심중을 꿰뚫지 못하는 나의 아둔함이 결핍일까? 엄마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나의 고집이 결핍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궁핍하게 만드는 걸까?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순간에도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나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좀 더 밟는다. 경차가 소리를 왜앵 내며 앞으로 내달린다. 정희에게 전화를 하자. 그래야겠어. 이번에는 내가 뭔가 말하고 말겠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문자를 날린다. 그리고 그 곳으로 간다.

 

  기다린지 1시간이 다 되는데, 문자 답도 없고, 전화도 없다. 나는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 망쳐지면 내 의지가 산산 조각나서 나는 정희에게 할 말을 한 마디도 못할 것만 같다. 시켜 놓은 페퍼민트 차가 식어서 쓴 맛이 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정희가 인기척을 낼 때까지 수면(睡眠)을 해야겠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정희가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에게 먼저 말을 시킨다.

나는 가슴이 시리다. 말을 하기도 전인데, 벌써 나는 지고 들어간다.

-나는 우리 사이가 힘들어. 왜 그런지 너가 더 잘 알거라고 생각해.

-나는 힘들지 않아. 뭐가 어떻게 힘든 지 얘기해봐.

-...

나는 할 말이 점점 없어진다.

-나는 전공이 너와 달라서 그런거겠지. 너의 생각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우리는 자주 만나는 편이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쉽지 않아. 나에게는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해.

정희는 천천히 차를 마신다.

정희 눈빛은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내 눈빛은 정처없이 나부낀다.

나는 너무나 배신감이 든다. 나는 이렇게도 힘이 든데, 그녀는 어쩌면 저리도 평안해보일까.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정희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나는 패배자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정희의 찻잔이 달그락 소리가 날 때, 나는 벌떡 일어선다. 나는 그냥 나와 버린다.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흐린 하늘에 눈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것이 내 속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계속 걷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정희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다. 나는 핸드폰을 끈다. 걸으며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내 눈은 빨갛게 변하고 눈물은 소리없이 흐른다. 나는 그녀에게 처절하게 패한다. 나는 정희 그녀가 나를 짓뭉개는 것을 수없이 참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으리라. 걷다보니 길 옆에 나뒹구는 큰 종이 상자가 눈에 띤다. 바람에 종이상자 뚜껑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무심코 그 종이상자를 집어든다. 내 몸이 너끈히 들어갈 만한 크기이다. 아이가 생각난다. 아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고 나를 기다렸다. 어둡고 좁은 공간. 그 속에서 조용히 맞이하는 자신만의 세계.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상자 안에 내 몸을 살포시 집어넣는다. 뚜껑을 닫자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상자 안에서 마분지 냄새가 난다. 나는 그 속에서 1부터 100까지 세어보겠다. 하나, , ... 밖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인도 아래에는 차들이 쉭쉭 지나간다. 나는 숫자를 세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며 셈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에게 이 상자 속의 나를 찾아달라고 해야 할 지 생각해본다. 아무도. 아무도 없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는 여전히 외롭고, 지치고, 패배자이다. 상자 안은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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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회에 단편을 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감기도 찾아왔고, 써 놓은 단편도 마땅치 않고...

쉽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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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워커

 

 

흑백 사진

 

 

지인은 배가 고팠다. 11월 중순의 바람은 배고픈 지인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며 사납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지인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다. 그런데 그녀는 버건디 립스틱을 바르고 짧은 카키색 스커트에 인조 가죽 워커를 신고 삐딱하게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 씨발, 왜 안 오는 거야.’

지인은 그 작은 입술로 거친 말을 내뱉었다. 옆에 지나가던 아줌마가 움찔하고는 허둥대며 지나갔다. 지인은 그 아줌마의 꼬락서니를 멀거니 쳐다보더니, 담배를 찾았다. 아직까지 안 오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담배로 허기를 채워야했다. 후욱하고 길게 담배를 내뿜는 그녀를 지나가는 행인들이 거의 모두들 쳐다봤다. 지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갸름한 두 눈매로 그들을 하나씩 쏘아보며 나 담배 피운다 그래서 뭐하는 눈빛을 보냈다.

 

까만 색 스포츠 카가 지인 앞에 섰다. 두 젊은 남자가 차에 타고 있었다. 지인은 걸어서 그들에게 가더니 한참 기다리게 했으니, 먼저 밥부터 먹여줘.’라고 내뱉었다. 두 젊은이는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내에 붙어있는 강변 부지로 갔다. 그곳에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마미 천사라는 곳에 들어갔다. 손이 커 보이는 아주머니가 셋을 보더니, 뜨거운 우동 국물을 한 사발 가져다주었다. 아주머니는 지인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쉰다. 지인은 아주머니에게 삐딱한 눈으로 국물 죽이네요라고 말한다.

 

두 젊은이는 지인이 마구 마구 닭똥집을 씹어 먹는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본다. 지인은 이걸 먹고 둘을 때려눕히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먹는다. 지인은 학생이 아니다. 지인은 거리에서 자신을 내놓고 살아온 지 반년이 넘었다. 지인은 끝장을 본다면 보는 성격이었다. 한 명만을 상대하지 않았다. 3명까지도 상대해 보았다. 그 대신 지인은 돈보다 먹을 것을 밝혔다. 돈을 밝히면 그들 대부분은 사기를 치거나, 지인을 험하게 다뤘다. 지인은 처음 몇 번 그렇게 당하고 나서는 돈보다 먹을 것을 사달라고 요구했다. 1주일에 5일을 열심히 일했다. 낮에는 햄버거를 팔았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퇴근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오늘은 돈 많은 고삘이가 그 대상이다. 둘 다 지인이 먹는 것을 보고는 헤벌쭉해졌다.

 

카 섹스가 시작되었다 지인은 절대 옷을 다 벗지 않았다. 먼저 준비한 연고형 피임약을 질 주변에 흥건히 묻혔다. 그 고삘이 둘은 땡땡해진 자신들의 성기를 어쩔 줄 몰라서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지인은 여유로웠다. 빨리 해줄수록 그들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다. 지인이 입고 있던 블루종을 벗자 나시를 입은 상체가 드러났다. 그녀는 상체만 벗었다. 짧은 치마 속의 그녀의 일부는 그녀 것이었다. 고삘이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달려 들었다. 그러자 지인은 워커를 신은 한 쪽 발로 살며시 그의 가슴을 누르고는 그녀의 손으로 남자의 바지를 벗겼다. 단 한 번에 삽입이 되었다. 지인은 숨을 쉬는 법을 알았다. 고삘이 남자애는 몸을 마구 움직이려고 했다. 지인은 두 허벅지로 그 남자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고는 움직이는 것을 자제시켰다. 리드미컬한 움직임 속에서 고삘이의 얼굴은 환희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지인은 그 표정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다른 고삘이 한 명이 멍하니 그 친구 표정을 보며 자기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절정에 오르고 나자 남자애는 뻗어버렸다. 다른 한 명이 그새 기운이 다 빠졌는지 몸을 어기적거리면 지인 앞으로 왔다. 지인은 이번에 손으로 그의 성기를 살짝 쥐었다. 지인은 그 남자애 표정으로 봐서 삽입이 필요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손으로 모든 것을 마쳤다. 카 섹스는 그렇게 끝났다. 지인이 옷을 입고 나왔을 때까지 둘은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받은 돈은 몇 푼 안 되었다. 그녀는 별로 내색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몸이 욱신거렸지만, 워커를 신은 그녀의 다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지인은 걸어서 시내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가서 그녀의 은행 ATM기에 받은 돈을 넣었다. 꽤 많은 돈이 그 통장 안에 있었다. 그녀가 사는 방식은 아주 깔끔했다. 적당한 금액과 넉넉한 밥 그리고 그녀가 주도하는 섹스. 그녀는 그렇게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있다. 지인은 절대 돈을 밝히지 않는다. 그녀는 섹스의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배고픔에 주린 그녀의 배를 항상 먼저 챙긴다. 버건디 립스틱으로 바른 입술이 그녀의 인상을 더 차갑게 만든다. 그녀의 갸름한 눈은 앞을 보고 있고, 워커를 신은 그녀의 다리는 12월 중순 겨울에 더 없이 추워보이게 한다. 그녀는 어서 그녀가 씻을 곳을 생각해본다. 그녀는 집이 없다. 그녀가 갈 곳은 야간 알바를 뛰는 찜질방이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얼큰한 라면을 먹고, 또 일을 할 것이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이미 그녀가 중학교 때 이혼하고 둘 다 집을 나갔다. 친척 집에 얹혀살았지만, 살 곳이 못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이 자신이 살 길임을 알았다.

 

지인은 찜질방에 도착해서 뜨거운 물에 씻는다. 라면을 먹는다.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하자 지인은 그 차가웠던 얼굴이 해사하게 바뀐다. 그녀는 자신의 짐꾸러미에서 다소 커 보이는 책자를 꺼낸다. 흑백 사진이 잔뜩 실린 사진집이다. 그녀는 그것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며 한 장씩 넘긴다. 그녀는 나중에 꼭 사진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매일 주문을 건다. 그녀는 흑백 사진을 좋아한다. 그것은 군더더기가 없다. 그것은 그녀가 남자를 상대하며 느꼈던 움직임처럼 살아있다. 그녀는 누드 사진을 좋아한다. 사진 속의 그녀들 동작을 하나하나 상상해본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처럼.

 

찜질방 밖에는 첫눈이 내린다. 첫눈이 내리는 밤거리는 흑백사진 같다. 지인이 걸었던 거리가 눈에 살포시 쌓이고 있다. 그녀가 땅에 찍은 워커 발자국이 하나하나 소복이 눈에 쌓이고 있다. 어떤 눈송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흩날린다. 바람이 그 눈을 어딘가로 데려간다. 찜질방 창문으로 휘잉하는 밤바람 소리가 들린다. 지인은 잠깐 그 곳을 응시하더니, 찜질방 이곳 저곳을 청소한다. 그녀가 씹어 먹은 닭똥집과 라면이 그녀를 이렇게 힘쓰게 한다. 지인은 여지없이 고등학교 여학생 얼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얼굴에 있는 작은 주근깨가 꼭 기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인은 일을 마치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찜질방 한 귀퉁이로 베개를 갖고 간다. 그녀는 내일 치를 일을 또 생각한다. 철저한 몸놀림, 철저한 식습관, 철저한 시간 관리. 그녀는 야생 동물처럼 살지만, 그녀는 생각이 있는 인간이다. 그녀는 그것을 안다. 그녀는 그것을 알기에 눕자마자 잠을 청한다. 내일은 눈이 덮인 땅을 워커로 지그시 밟아볼 것이다.

 

안녕 미미

 

오늘도 행복했는가. 대답 대신 그녀는 입술을 모아서 침을 퉤 뱉었다. 뱉은 침을 보더니 그녀는 워커로 지그시 문지른다. 이번 주는 계속 허탕이다. 아무래도 날씨가 추워진 탓이다. 삼일 내내 카섹스를 치르고 돈을 주지 않은 남자들이 다 차를 몰고 튀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그녀의 침을 퉤하고 뱉었다. 지금 그녀는 몹시 배가 고프다. 한 중년 남성과 카섹스를 치뤘는데, 도대체 그녀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옷을 다 벗고 싶지 않았던 그녀를 그 남자는 다 벗겼고, 그녀는 그러자 부끄러워졌다. 그녀의 몸은 이상하게 순종적으로 변했다. 그 남자는 처음에 그녀의 질 속에 손가락을 넣어서 한참 애무했다. 지인은 그것이 싫었다. 손가락으로 그의 손을 탁 치자, 그의 표정이 싹 바뀌더니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못 쉬고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그녀가 힘을 못 쓰는 것을 알자 무겁게 그녀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하나도 느낌이 없었다. 답답하게 짓눌러오는 그 남자의 몸과 입 냄새 뿐이었다. 지인은 아무래도 이번에는 돈을 많이 받아야할 것 같았다. 일이 끝난 후 그가 주는 돈을 받고, 지인은 더 주세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지인의 손에서 얼른 그 돈을 뺏더니 그녀를 차 밖으로 밀쳐냈다. 그녀는 벌거벗은 상태로 차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녀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그녀는 처음으로 울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녀였다.

 

걸어오는데 워커까지 망가져버렸다. 한 쪽 굽이 덜거덕거려서 그녀의 걸음은 뒤에서 보면 위태로워보였다. 배는 고프고, 걸음걸이는 시원치 않고, 지인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나마 옷을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길거리 여자라고 다들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ATM기로 갔다. 그녀는 수수료를 절대 물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 날은 급했다. 지인은 이대로 찜질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우선 적당한 워커를 사야했고, 주린 배를 채워야했고, 몸을 씻어야했다. 이 세 가지를 다 하려면 아무래도 그녀의 언니를 찾아가야한다. 그녀는 우는 것을 그치고 전화박스로 갔다. 잠시 생각을 하고 전화번호를 누른다. 오랜만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녀의 언니는 그녀가 거리에서 몸을 내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아예 언니 동생을 끊자고 했다. 그녀의 언니는 지인만큼 이쁘지 않았다. 지인이 자신의 미모로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것을 언니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 속의 시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지인은 전화기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한참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지인. ... 나 좀 만나러 와 줘. 지인은 그러고는 울기 시작했다. 언니는 택시를 타고 지인이 있는 전화 박스로 왔다. 지인은 전화박스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언니는 혀를 끌끌 찼다. 언니의 눈이 그녀 구석구석을 핥듯이 뜯어보는 것을 지인은 아무 힘없이 바라봤다.

 

둘은 택시를 타고 언니가 사는 1.5룸으로 왔다. 지인은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어서 이 기분을 떨쳐내고 싶었다. 언니는 그동안에 김치찌개를 끓였다. 지인은 샤워를 오래했다. 샤워기 물소리가 계속 들렸다. 찌개가 다 식어서야 지인이 욕실에서 나왔다. 지인은 언니가 자신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였는데도 제대로 숟가락질을 못했다. 지인의 몸에서 열이 났다. 언니는 그녀를 이불 위에 눕히고 약국으로 갔다. 언니는 사후 피임약을 구하지 못했다며, 지인에게 너 어쩔래하고 말했다. 지인은 걱정 마 피임은 항상 철저히 하니까 라고 말했다. 언니와 지인은 그렇게 밤을 보냈다. 지인은 밤새 몸을 뒤척였고, 언니는 잠을 자듯이 부동자세였지만, 지인이 내는 뒤척임을 다 듣고 있었다.

언니는 지인에게 다음 날 아침에 함께 살자고 했다. 거리 일은 그만두라고 했다. 지인은 아침을 먹고 언니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나왔다. 그녀는 언니 역시 돈벌이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언니는 공부를 하고 싶어 했고, 그녀가 언니와 살면 분명 공부하는 목표를 접어야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인은 언니가 준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어제 밤에 찾은 돈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워커를 사야했다. 그녀는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구두 가게는 다양한 구두를 전시하고 있었다. 지인은 하나씩 꼼꼼히 살핀다. 그녀는 적당한 높이에 그녀가 좋아하는 블랙 색상에 신고 오래 걸을 수 있는지를 살폈다. 구두를 신고 걷자 가게 사장은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쳐다보며, 아가씨 잘 어울리네 딱 자기 거잖아 라며 칭찬을 했다. 지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거리로 나설 것이다. 딱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만 이 짓을 할 것이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워커를 골랐다. 이번에 고른 워커는 스웨이드 재질로 되어있고, 바닥이 미끄럼 방지로 되어있는 굽이었으며, 다른 워커들보다 튼튼해 보였다. 값도 더 비쌌다. 그녀는 워커를 신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 그녀는 워커를 신고 또 땅을 밟을 것이다.

 

햄버거 가게에 도착하기 전에 ATM기에 다시 들렸다. 워커를 사고 남은 돈을 입금했다. 그녀가 번 돈은 고스란히 ATM기로 들어갔다. 통장도 없었다. 그녀는 돈을 빼서 쓸 때는 딱 세 가지였다. , 화장품, 워커. 그녀는 밥은 거리에서 해결했고, 찜질방에서 해결했고, 햄버거를 먹었다. 그녀는 그리고, 많이 걸었다. 그녀는 다리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그녀만이 아는 감각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잘 살필 줄 알았다. 그녀는 강행군 속에서도 자신의 컨디션을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녀는 하루에 한 끼는 꼭 밥을 먹거나 고기를 먹었고, 햄버거와 라면으로 나머지 두 끼를 때웠다. 그녀는 매일 배고픈 그녀의 배를 위해 살았다. 그녀의 몸은 성인이 되지 않았지만, 점점 굴곡이 튼튼해졌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걸 보여주었다. 그녀의 허벅지는 워커로 걸은 근육과 밤일을 하며 얻은 감각으로 육감적으로 변해있었다. 거리를 걷는 그녀의 다리를 쳐다보는 남자들이 많았다. 지인은 그 시선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걸으며 속도를 냈다.

 

길바닥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새로 산 워커는 눈을 뽀드득 밟으며 앞으로 나간다. 오늘 그녀는 입술에 팥죽색 립스틱을 발랐다. 버건디는 이제 치웠다. 그녀는 좀 더 몸값을 높이기 위해 우아해질 필요가 있다고 머리를 굴렸다. 이제는 돈을 더 받고 몸을 내줄 것이다. 그녀는 물론 밥을 사달라고 할 것이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스위스제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예전에 거금을 들여 산 것이다. 그녀는 이제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이다. 만약 또 다시 그녀의 옷을 다 벗기려 드는 작자가 나타나면 이 칼을 손에 쥐고 위협을 할 작정이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배운 길거리 팁이었다. 그녀는 스위스제 나이프를 손에 쥐는 연습을 해보았다. 칼을 꽂으면 오히려 손을 다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대로 쥐고 휘두르려면 요령이 필요하다. 지인은 몸을 느슨히 하고 자신의 손과 발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상상했다. 그녀는 몸에 있어서는 뭐든지 쉽게 배웠다. 그녀 몸의 감각은 하나의 촉이 되어서 그녀를 휘감았다.

 

오늘 밤 손님은 돈이 많은 사람이다. 전화를 했을 때 그 목소리와 말투가 그동안 만난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아무래도 팔굽혀펴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와 함께 팔 힘도 길러야할 것이다. 그녀는 약속한 장소로 가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몸도 준비를 해야 하지만, 우선 말투와 눈빛으로 상대를 기선 제압 시켜야 한다. 그녀는 숨을 고르게 쉬며 그녀의 워커 소리를 들었다. 횡당보도 건너편에 하얀 색 차가 깜빡이 불을 켜고 서있다. 그 사람 차다. 그녀가 처음 보는 차종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 안에 향기가 가득하다. 차 안이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말없이 시동을 켜고 출발한다. 지인은 앞 유리창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 밥부터 사 주세요. 남자는 말이 없다. 지인은 침을 꼴깍 삼킨다.

 

신주쿠 파라다이스

 

지인이 간 곳은 신주쿠 파라다이스라는 재즈 바였다. 그녀가 아는 악기라고는 피아노 밖에는 없었다. 나머지 악기들은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둥근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홀짝이며 유쾌한 말소리를 냈다. 악사들은 흥에 겨워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서 그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두꺼운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하관이 뾰족했다. 몹시 마른 몸이었다. 웨이터가 왔다. 그가 이곳 단골인지, 인사를 하더니 따로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가지 요리를 갖고 나왔다. 다행히 술은 없었다. 지인은 안심을 하고 천천히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지인은 천천히 요리를 씹으며 썬글라스 너머의 그의 눈을 한없이 쳐다보았다. 아직까지도 말이 없는 그 사람은 요리를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요리가 나와서 그녀는 다 먹지 못했다. 배가 불러요. 웨이터가 다시 왔다. 그는 웨이터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요리 접시가 치워지고, 달콤한 케잌과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지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마치 동화 속의 공주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쾌적한 곳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포크로 크림을 떠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달콤함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지인은 정신을 차려야했다. 케잌에 뭐라도 들어있으면 어쩌겠는가.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그러자 자신이 포크로 케잌을 먹기 시작했다. 아주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포크를 건네주었다. 지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포크를 그 남자에게 던졌다. 그리고 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뭔가 이상하다. 지인은 자신의 가슴이 발랑발랑 뛰는 것이 이상했다. 그녀는 그런 기분으로는 철저하게 작업을 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 앞에 가자 엘리베이터 보이가 그녀를 위해 안내를 했다. 그녀는 아래로 내려간다고 말했다. 보이는 목을 까딱하고는 2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버튼이 눌러진 층마다 섰다. 신주쿠 파라다이스는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바였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왠지 그 남자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보이가 저지할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뛰어나갔다. 그녀는 몹시 무서워졌다. 아무래도 발을 잘못 들여놓은 것 같았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가서 정신없이 뛰어가 보니, 헬스장이 나왔다. 그곳만이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트니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지내는 세상에서는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헬스장 끝에 다다르니, 수영장이 나왔다. 한 사람이 와서 그녀에게 수건과 락커 열쇠를 쥐어주었다. 그녀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 사람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녀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적당히 미지근했다. 물이 맑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된 김에 물속에서 몸이나 풀고 나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 머리를 90도 각도로 고꾸라뜨리고는 잠수를 했다. 숨이 모자라면 푸하고 물 밖으로 나와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이곳은 시간관념이 없는 곳 같았다 불이 환하고,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었다. 넉넉한 미소를 띠고, 그녀에게 목례를 했다. 그녀는 둥둥 물에 몸을 맡기고는 편하게 드러누웠다. 그 때, 수영장 저쪽 편에 있는 의자에서 하관이 뾰족한 그 남자를 보았다. 그 사람은 여전히 두꺼운 썬글라스를 끼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수를 해서 수영장 밖으로 나갔다. 샤워실로 가서 대충 물을 끼얹고는 수건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소지품을 챙겼다. 워커만 달랑 신었다. 그 때, 그녀를 안내해 준 사람이 다가왔다. 지인씨 사장님이 기다리십니다. 그녀의 갸름한 두 눈이 커졌다.

 

두꺼운 썬글라스를 낀 그 사람은 사장이라고 했다. 그것도 그의 입으로 들은 것이 아니고 함께 합석한 사람을 통해서였다. 사장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관이 뾰족한 그 사람의 목소리는 아마 갈라진 허스키가 아닐까하고 지인은 생각했다. , 저를 만나는 거죠? 그녀는 물었다. 사장님은 지인씨를 고용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에요. 거절할게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호텔에서 일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내일 알려드립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이 호텔에서 기거하세요. 지인은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나를 고용한다고. 그녀는 놀라서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사장은 그쯤이면 됐는지 합석한 사람을 돌려보낸다. 그리고는 양복 안 주머니에서 새 휴대폰을 꺼낸다. 그것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는 휴대폰을 받고 물끄러미 액정을 쳐다본다. 그러자 문자가 뜬다. 문자는 사장이 보낸 것이다. 저는 이 곳 사장 알렉스입니다. 제가 한국어를 하지 못해서 말이 없었습니다. 글을 쓸 줄 알지만, 말은 할 줄 모릅니다. 오늘 지인씨가 마음 편하게 먹고 하룻밤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세요.

 

지인이 들어간 방은 커플 룸이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창문을 열자 한 겨울 바닷바람이 쌀쌀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룸을 한 바퀴 걸어보았다. 그녀의 워커는 푹신한 양탄자를 밟아서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지인은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굉장한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러기에는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양손에 스위스제 나이프와 새 핸드폰이 잡혔다. 둘은 무게가 똑같았다. 그녀는 그 두 가지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런 무식한 무기로 남자를 저지하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핸드폰에 홈 화면은 색색의 조약돌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둘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는 양 손으로 저울질을 해본다. 그녀는 더 무거운 쪽으로 마음을 굳혀야겠다고 생각한다. 둘의 무게는 그러나 놀랍게도 비슷했다.

 

지인은 속옷만 입고 폭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 너비는 그녀가 한 쪽 방향으로 한 바퀴 굴러도 되었다. 그녀는 가운데 누워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편한 잠자리가 오히려 잠을 달아나게 했다. 그녀는 넓은 양털 베개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잠을 청했지만 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액정화면을 바라보고는 터치를 했다. 그녀의 폴더 폰과는 달랐다. 스마트 폰은 색색의 아이콘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거나 눌러보고, 잘 모르면 끄고를 반복했다. 밝은 스마트 폰 화면 때문에 눈이 부셨다. 그 때, 그녀의 폴더폰 화면에 문자가 떴다. 찜질방 아주머니였다. ‘지인아 왜 안 보이니?’ 그녀는 당분간 못 볼 수 있을 거라며, 죄송하다고 답장을 썼다. 그러자 스르르 잠이 왔다. 지인은 폴더 폰과 스마트 폰을 양털 베개 아래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녀의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Carry your world

 

지인은 유니폼을 입었다. 은빛 색깔의 유니폼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차이니즈 칼라로 디자인 된 드레스였다. 그 옷에 그녀는 여전히 워커를 신었다. 알렉스가 그녀의 워커를 허용했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일종의 마사지와 여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총괄 책임을 맡았다. 물론 상사가 한 명 더 있었다. 상사는 나이가 지긋한 노년의 여성분인데, 지인에게 항상 너그러운 미소를 보냈다. 지인은 딱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를 받지도 않았다. 그냥 그녀는 워커를 신고 걸어 다니고, 눈인사를 하고, 간혹 손님들을 상대로 대화를 하는 정도였다. 그녀는 이 여유로움 속에서 실낱같은 무료함을 즐기고 있었다.

 

지인의 이름은 이곳에서 Charm으로 통했다. 알렉스가 지어 준 이름이었다. 그는 그 이름이 매력이라고 말해주었다. 지인은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반짝였다.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된다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마음대로 하라. 단 상사가 이야기 하는 것에서는 꼭 말을 들으라고 했다. 참은 그러기로 했다.

 

첫 날 참은 고객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녀가 고객이 심하게 화를 내며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는 고객 옆으로 왔다. 그리고 손님, 이곳에 쉬러 오셨으니 제가 처리할까요?’라로 말하자. 고객은 얼른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참은 전화를 하며 이야기했다. ‘이곳은 000님이 쉬러 온 곳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면 스틸 인 스틸 호텔로 와서 참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무료로 이 곳에 들어오시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고객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참에게 더치커피를 시켰다. 참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이 장소는 이름이 없었다. 오직 정해진 고객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호텔의 주요 고객들이었다. 이 곳에 오려면 엘리베이터 보이가 특수층을 눌러주지 않으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첫 날 참과 전화통화를 한 사람이 기어이 스틸 인 스틸 호텔에 찾아왔다. 엘리베이터 보이는 참이 말해준대로 그 사람을 이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사람은 50대 여성이었고, 이런 호텔에는 한 번도 투숙해본 적 없는 자린고비였다. 그녀와 전화통화를 한 고객은 오히려 이 여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전화로만 통화했지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참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50대 여성에게 다가가, 오셨는데 일단 서비스를 받아보라고 했다. 50대 여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고, 참이 너무나도 매력 있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50대 여성과 전화통화를 하던 고객은 아무 일 없이 무마되었다.

 

나이가 많은 상사는 참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 이곳에서 일한지 한 달이 되었네요. 그동안 일한 급료를 줄게요.’ 참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받았다. 얇은 봉투는 빳빳했다. 그곳에 수표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금액을 보고 잠시 숨이 멎었다. 그녀가 지난 반년 넘게 밤일을 하는 금액만큼 들어있었다. 그녀는 상사를 쳐다보았다. ‘사장님이 그만큼을 주셨답니다.’ 참은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이런 큰돈을 한꺼번에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참은 사장님을 만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상사는 전화를 걸어서 사장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참은 앉아서 생각했다. 너무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야겠다. 나는 이렇게 큰돈을 받을 만큼 일하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금액을 주어서 자신을 길들인다면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없다. 그녀는 꼭 그렇게 말하리라고 입술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두꺼운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참과 알렉스는 스마트 폰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 봉급을 받았어요. 금액이 정말 많이 들어있더군요. 저한테 왜 이렇게 많은 금액을 주신 거죠? 참은 그만큼 받을 정도로 일을 잘 하니까요. 첫 날 저희 고객이 참을 칭찬했어요. 그 분은 까다로운 손님 중에 한 명인데, 참이 잘 해결해 주었죠. 덕분에 다른 손님들까지 조용하게 쉬다가 갔고요. 참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을 했다. 제가 언제까지 사장님 아래에서 일하게 되는 거죠? 저는 오래 일하고 싶지는 않아요. 일을 정해줘서 하기는 하지만, 저는 이런 일을 오래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보다 ... 사장은 손을 들어 참이 말하는 것을 저지했다. 알렉스는 Carry your world 라고 말했다. 참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피식 웃는 그녀의 입술을 보고 그는 입가를 살짝 올렸다. 제 세계가 어떤 줄 알고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저는 가방 끈도 짧고, 밤일을 주로 했고, 햄버거를 팔고, 찜질방에서 지냈어요.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 곁으로 갔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손을 내밀고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참은 사장실에서 나오며 외출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이곳에 올 때 입은 옷을 입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호텔에서는 훈훈하게 난방이 되어있어서, 밖으로 나오자 굉장히 바람이 매서웠다. 한기가 그녀의 온 몸을 핥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것이 좋았다. 밤일을 하고 걸어가는 그녀 자신이 떠올랐다. 그녀는 일을 마치고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살아있는 기분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스틸 인 스틸에서 한 달을 일하고는 그녀는 첫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사장은 그녀에게 말한 대로 24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찜질방에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저녁에 나와서 꼬박 2시간을 걸었다. 바닷가를 지나치며 철썩대는 파도소리를 오랜만에 들었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사먹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지인아! 아주머니가 그녀를 보자 발을 쿵쾅대며 뛰어왔다. 찜질방 사람들이 잠시 그곳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지인은 예전보다 더 해사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반겼다. 둘은 잠시 손을 잡고는 웃었다. 지인이 아주머니에게 줄 선물을 꺼냈다. 아주머니는 항상 V제품 속옷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 선물을 주며 아주머니에게 이제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지인이 너 무슨 좋은 일 생긴 거지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인은 슬며시 웃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머니가 맡아두었던 그녀의 소지품을 챙겼다. 옷 보따리와 흑백사진집이 전부였다. 지인은 아주머니와 오래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아주머니가 울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우는 아주머니에게 저 좋은 곳으로 간 거 맞아요. 그러니 웃으셔야죠 라고 말했다.

 

지인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제는 밤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스틸 인 스틸 호텔은 어딘지 모르게 그녀에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돈을 또 어디에서 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지금 난기류에 있는지 아닌지 짐작해보았다. 사장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 그 점이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사장에게 직접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러면 덜컥 사장의 말에 걸려들 것 같았다. 그녀는 스틸 인 스틸 호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사장과 자신의 관계를 일단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사장과 계약서를 쓰거나, 아니면 녹취를 해서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시 바닷가를 지나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배경에 있는 하늘이 퍼렇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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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네가 입대 한 후로 우리는 어느 날 시간을 내서 사진을 찍었어. 지난 초겨울에 사진을 찍었는데, K도 나도 왠지 바빴어. 그냥 사진을 보내지 말까싶다가도 너무 아깝더라. 그리고 K 얼굴이 잘 나온 사진도 한 장 건졌거든. 네가 좋아 할 것 같다. K는 마지막 학기를 두고 휴학을 하게 되었어. 지금은 피아노 학원 강사로 지내며 아이들과 꽤 친해졌어. 요즘 K가 잘 웃는다. 걔 말로는 자기도 아이들과 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줄 몰랐대. 초봄이 되어서 K가 연노랑 머플러를 하고 있는 사진을 내똑딱이로 찍었어. 자 봐봐~! 예쁘지? 나는 도서관에서 살아. 임용고시 준비로 매일 책상 앞이야. K는 나보고 가끔 산책도 하고, 필요하면 알바도 조금 해보라고 했어. 2달 동안 도서관에 콕 박혀 있었더니, 나 살도 포도포동 쪘다고 K가 나를 걱정한다. 어쩌면 K랑 함께 면회를 갈까 하는데 별로 기대하지는 말아. K가 좀 무심한 건 너도 알지? 그래도 가끔 우리가 함께 출사한 날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꺼내는 K 표정을 보면 나도 그 때가 새록새록 떠올라. 지난 4년이 어떻게 흘러갔나 모르겠어.K와 네가 함께 연습실에 있던 그 첫 대면이 나는 잊어지지 않아. 네가 꼭 치아키 같았어. 알지?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물론 K는 노다메랑은 거리가 멀지. 노다메랑은 완전 반대이지만... ! 놀랄 소식 하나 더. K가 담배를 끊었어. 아이들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자신에게 담배 냄새가 나는 것이 두려워졌대. 어느 날 한 어린 남자 애가 선생님 고민 있으세요?’ 라고 묻더래. ‘?’하고 K가 갸우뚱하자 아이가 말하기를 저희 아빠도 고민 있으면 선생님이랑 같은 냄새가 나요. 어른들은 고민 있을 때 똑같은 것 같아요.’ 하고 말하더래. 그 말 듣고, K가 그날 이후로 담배를 싹 끊었어. K 아무튼 독해. 아무리 아이 얘기를 들었다지만 담배 끊기가 그리 수월할까? 면회를 못가더라도 네가 휴가 받아 나오면 K와 내가 대환영하며 맞이할게. 이번 휴가를 우리와 함께 보낼 수 있는 거지? , 그럼 우리 그날을 기대하며...

      

p.s 도서관에서 편지 쓰는 인간은 나밖에 없을 걸. ^^*

 

삼총사 중 Y로부터...

 

   Y가 공부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나올 때 쯤, K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치마를 입고 저만치서 손을 흔들고 있다. K는 피아노 강사가 되자 치마를 즐겨 입게 되었다. 그리고 보이그틀랜더를 잘 손에 쥐지 않았다. 예전에는 청바지에 담배를 입에 물고, 카메라를 얼굴에서 떼지 않았던 K였는데, 그 때와 지금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바뀌었다. Y는 그런 K가 처음에는 신기했다. K는 말이 없고, 표정도 잘 안 바뀌었고, 조용하며 담배를 피웠다. 사진도 찍었고, 피아노도 쳤지만, 치마를 입지는 않았다. 그랬던 K가 이제는 물이 올라 흐드러지는 꽃처럼 처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혹시 K에게 남자가 생긴 걸까? Y는 순간 이상한 상상을 해보았다. 아니야. 나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어. Y는 쓸데없는 상상이라고 여긴다.

 

 

   가까이 다가온 K에게서 따뜻하고 달콤한 향이 난다. Y는 그런 K를 보며 참지 못하고 물어본다. 남자 친구 생긴 거야? K는 순간 활짝 웃는다. 그렇게 활짝 웃는 KY는 본 적이 없다. KY의 팔짱을 끼고 걷는다. 그래 보이니? 아니야. 내가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내게 생기를 줄지 몰랐던 것뿐이야. 요새 아이들이랑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데. 네가 보면 질투가 날 걸! KY의 팔짱을 꼭 끼고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러 카페로 향한다. 둘은 뒤에서 보면, 언니와 동생 같다. 공부하는 동생을 챙기는 언니. 예전에는 둘이 바뀐 상태였는데, 무릎까지 오는 붉은 색깔 스커트를 입은 K가 입시 공부하는 동생을 챙기는 모습처럼 보인다. K는 성숙한 여성처럼 어깨 너머까지 흘러내리는 머릿결을 찰랑거리고 있고, Y는 짧은 단발이다. 백 팩을 어깨에 짊어진 Y는 청바지에 블루종을 걸쳤고, K는 붉은색 치마 위로 3가지 어두운 색깔로 직조된 상의를 입었다. K는 여전히 워커를 신었지만, 굽이 이제는 꽤 높다. 그래서 Y보다 한 뼘 더 높았다. 둘은 꼭 붙어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둘 다 멀리서 봐도 흠뻑 웃음에 젖어 있다. 지훈 없는 KY는 잘 지낸다. 그것이 잠시 동안 찾아온 행복일지 몰라도 둘 사이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둘은 그 평화에 안온하게 몸을 기댄다. 그것이 그 나이에는 쉽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 시간을 충분히 지켜내고자 한다. 카페 문을 경쾌하게 열고 들어간다. 아담한 사이즈에 편안한 소파를 갖춘 카페는 2층에 있다. 둘은 항상 앉는 구석 자리에 몸을 파묻는다. 그리고 카페모카와 카페라떼를 시킨다. 둘은 이제 무슨 얘기를 하든지 그 대화 속에 지훈이 등장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훈이 보낸 편지를 꺼내보는 Y이다.

 

   안녕. 항상 편지 챙겨주는 Y. 고맙다. K는 편지 안 쓰는 거냐? 못 쓰는 거냐? 무심한 K에게 안부를 전해주렴. 조금 있으면 이등병을 끝내고 휴가를 나갈 수 있을 것이야. 군대에 들어와서 피아노를 칠 수 없어서 가끔 화장실에서 벽에 대고 손가락을 놀리고는 했다. 그런데, 머릿속이 꽉 막혔는지 멜로디가 기억이 안 난다. 아주 바보가 되어버렸어. 곧 소등이다. 소등이 되면 저절로 잠이 청해진다. 집 생각할 것 같지? 아냐. 온종일 몸이 고되게 지내서 몸이 수평으로 눕자마자 잠이 스르륵 든다. . 그럼 휴가 나가서 보자.

 

                                    너희들의 친구 지훈이가.

 

   지훈이가 보낸 편지를 K가 읽는다. Y가 편지를 보내지만, 지훈 편지를 읽는 이는 K이다. 이 순차적이 삼각형 꼭지점 진행을 셋은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익숙하다. YK가 편지를 읽는 내내 따끈한 카페 라떼를 마신다. 세 사람은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흘러가면 삼각형이 굴러 굴러서 둥근 원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보면 어색할까? K는 편지를 다 읽고 Y에게 건넨다. Y 집주소로 온 편지이다. 지훈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는 Y이고, K는 둘 사이에 편지를 읽는 이이다. 편지를 채 뜯지도 않고 YK에게 편지를 건네면, K가 편지를 개봉하고 읽는다. 이 순서를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KY이다. 지훈은 Y에게 K 안부를 물어달라고 하지만, 이 행위를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만약 K가 지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면 지훈 답장이 달라질까? K는 지금 상태가 좋다고 느낀다. YK와 지훈이 잘 되길 바라고, KY와 지훈이 잘 되길 바라고, 지훈은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너희들의 친구 지훈이가...’라고 쓴 대목에서 아마도 지훈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K에게 Y가 없으면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된다는 것을. 지훈은 그럼에도 K에게 품은 마음을 접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마음으로 Y를 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편지를 다 읽은 둘은 잠시 커피를 홀짝인다. 따뜻한 커피향이 둘을 느슨하게 해준다. 상의를 벗은 K는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우아한 색감에 귀여운 리본을 맬 수 있는 블라우스이다. K는 휴학을 하고 자신을 많이 가꾸기 시작했다. 아마 K는 전공 공부가 많은 갈등을 가져온 것 같다. K는 안으로 꾹꾹 눌러진 에너지가 많은 내성적인 타입이다. 그런데 피아노는 그 에너지를 편안하게 보여주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악기이다. 예술 전공 공부가 으레 그렇듯이 동기와 선후배간에 살얼음 같은 시기심이 K 정신 상태를 바싹 바싹 마르게 했다. 그 긴장을 깨기에는 K가 어찌 보면 너무 순수하다. 그 긴장에 몸과 마음이 지치면 그 때마다 손을 잡아 준 이가 지훈이다. 지훈은 20대가 갖기 힘든 너그러움과 여유가 있다. 지훈은 피아노를 누구보다 천천히 음미하며 치는 것을 잘 했다. 다른 동기들이 빠르게 연습하여 테크닉에 치중할 때, 지훈은 느리고 우아하게 타건을 해서 피아노 소리에 섬세하게 반응을 했고, 실기 시험에서 실수가 적었다. 레슨 교수는 지훈에게 콩쿨을 나가 볼 것을 여러 차례 권했지만 지훈은 상에는 욕심이 없었다. 콩쿨을 준비할 여력을 K에게 쏟았다. K는 몸으로 피아노를 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K 특유의 침울한 감성이 맞아 떨어져서 피아노 소리가 깊었다. K는 호흡을 잘 사용할 줄 알아서 많은 연습을 하지 않아도 소리를 단번에 제대로 낼 줄 알았다. 그러나 레슨 촌평에는 민감했다. 부족한 테크닉을 지적당하면 정신줄을 놓고 피아노를 칠 때가 종종 있어서 페달을 뗀 자전거가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불안하게 몰아갔다. 그러면 성마른 레슨 교수는 닦달을 했고, K는 그 긴장을 뚫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내리막길을 내달려야했다. 그 행위는 정말 할 짓이 못 되었다. 거듭할수록 K는 피아노를 어려워하고 즐길 수 없었다. 지훈은 K가 피아노에서 아주 손을 떼지 않도록 격려와 위로를 해주었고, K가 피아노 치는 것을 자주 들어주었다.

 

   Y는 블루종 안에 겨자색 후드티를 입었다. K의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와 붉은 스커트, Y의 진청바지와 겨자색 후드티가 카페 구석에서 빛을 낸다. 조용히. 지훈이 휴가 나오면 우리 어디 갈까? 지난 번 휴가에는 가족들과 보냈으니까, 이번에는 분명 우리와 함께 시간 보낼 거야. K는 왼손으로 머그잔을 쥐어서 입술에 갖다 대고는 넌지시 Y를 쳐다본다. 오랜만에 보이그틀랜더를 꺼내볼까? 거짓말같이 그동안 베사 L을 방구석에 방치했다. 날도 점점 따뜻해지니까 출사가면 좋을 것 같아. Y는 자기도 똑딱이를 들고 나오겠다며 이번에는 꼭 셋이서 함께 사진을 많이 남기자고 했다.

 

   ... 손가락 끝을 조금 당기는 느낌을 갖고 손가락을 떨어뜨려보자 은지야. 옳지. 이제야 느낌을 아는구나. 잊지 말아... K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방에서 들리자 한 남자아이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선생님! 선생님! 군인 아저씨가 밖에 있어요. K는 남자아이의 책가방을 들어주며 정리함에 놓고는 방에 들어가서 시계바늘이 11자가 될 때까지 연습하라고 알려준다. K는 잠시 생각해본다. 지훈이 온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로 온 거지. K는 머뭇거린다. 그 때, 유리문 너머로 군인 모자를 쓴 키가 큰 지훈이가 손을 들어올리고 K를 부른다. K는 나가지 않는다. 대신에 방금 그 남자 아이에게 군인 아저씨보고 끝나기 전까지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말해줄래? 라고 부탁한다. 남자아이는 의기양양해서 군인 아저씨에게 말하러 간다. 말하고 돌아온 남자아이 손에는 케이크와 카드가 들려있다. 그제서야 K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알아챈다. K는 학원이 끝나기 전까지 초조해진다. 학원 아이들이 케이크를 들고 온 아저씨가 선생님 애인이냐고 묻는다. K는 그 말을 듣자 괜시리 얼굴이 붉어진다. 유리문 너머로 보인 지훈은 좀 마르고 다부져 보였다. 예전에 피아노를 치던 그 새하얀 얼굴의 지훈이 아니었다. 학원이 끝나서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K는 케이크와 카드를 잊어버린다. 원장실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나가버린다.

 

안녕

K는 여전히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

모자를 벗은 지훈은 말라보이기 보다 체격이 더 좋아져있다. 하얀 얼굴은 여전하지만 얼굴 아래에 긴 목이 예전보다 두꺼워졌다. 근육이 생긴 지훈의 모습을 보니, 학생 느낌이 전혀 없다.

군발이 맞구나.

지훈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웃음소리가 크게 난다.

너는 여전하구나. Y 말대로 치마를 입었네. 이제는 남자친구 사귈 때가 된 거 아냐?

K 역시 환하게 웃는다.

둘은 남들이 봐도 군대 간 남자친구와 여자친구 같다.

커피를 마시며 말이 점점 줄어든다. K는 피아노 선생님 일을 하며 얼마나 즐거운 지 이야기를 끌고 갔지만, 이등병을 막 끝낸 지훈은 험하게 지낸 군대 이야기를 되도록 피하기 때문이다. 둘 다 말이 없어지고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카페 안에 음악 소리만 둘의 정적을 깨워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훈이 담배를 꺼낸다. 눈을 한쪽 찡긋하며, 군대 가서 배웠다. 너한테 못 배운 담배를... 라고 말한다.

 

   밖으로 나간 지훈은 스타일이 바뀐 K가 마음에 사무치게 좋다. 군대에서 병장이 Y가 보낸 편지와 사진을 갖고 여러 번 언급했다. 휴가를 나와서 점을 찍어야한다고. 그 이야기를 콧등으로 들었던 지훈은 이제 K를 보니 얼마나 자신이 그녀를 원했는가를 알겠다. 하지만. 하지만. 지훈이 담배를 2개째 피울 때, K가 카페에서 나와서 지훈 뒤에 선다. 나도 한 대 줘 봐. 지훈은 K를 보고 말한다. 치마를 입고 담배를 물겠다고. 아니야 그러지마. 이제 다 피웠어. K는 그러거나 말거나 지훈 손에 쥔 담배를 가져다가 입에 문다. 담배를 피우는 K의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던가. 지훈은 K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다. K는 여전히 아름답고, 그 깨질 것 같은 아름다움 안에 침울함이 숨어있다. 지훈은 한 발짝 움직이더니 그녀를 천천히 안는다.

 

   지훈과 K는 저녁을 먹지도 않고 모텔방에 있다. 둘은 말없이 나란히 침대 맡에 앉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 핸드폰이 울린다. Y이다. K가 핸드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지훈이 뺏더니 던진다. 그리고 K를 꼭 껴안고 침대로 쓰러진다. 지훈은 몸이 길고 크다. K는 아담하고 작다. 그녀는 그의 몸을 받치기에 너무 섬세했다. 그리고 지훈은 격정이 앞서고 만다. 둘은 쓰러졌지만 옷 하나 제대로 벗기지 못하고 뒤엉켜서 안고 있다. K는 요지부동이고, 지훈은 성이 나서 어쩔 줄 모른다. 몸이 뜨거워진 지훈은 결국 화장실로 혼자 들어간다. 지훈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K는 핸드폰을 챙기지 못하고 모텔 방을 나간 후였다. 지훈은 담배를 입에 물고 뻐끔뻐끔 다 피운다.

 

   K는 정처없이 걷는다. 지훈의 뜨거운 몸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 화장실에서 자신을 풀어줄 동안에 K는 도저히 그 방에 있을 수 없었다. 벽에다가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괴로웠다. 이것이 남녀의 사랑이라면 K는 또 해낼 용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모텔방을 나오고 나서야 핸드폰이 방 안에 있음을 알았다. 들어갈 수 없었다. 지훈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정처없이 걷던 K가 도착한 곳은 Y의 집 앞이었다. 핸드폰이 없어서 연락을 할 수는 없고, K는 옷을 추스르고 기다렸다. 밤이 깊어질 때가 되어서야 Y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KY에게 치킨과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Y의 얼굴에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허허로운 표정이었다. 치킨과 맥주를 앞에 두고 둘은 한마디도 안했다. K가 맥주를 다 마시는 동안 Y는 치킨을 먹었다. 계산을 하고 치킨집을 나오며 K가 오늘 내 생일턱이야라고 힘없이 말했다. Y는 조금 웃었다.

 

   편지는 더 이상 없다. K는 다시 보이그틀랜더를 잡기 시작했다. Y는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삼각형은 너무나 잘 굴러가는 듯이 보였지만, 세 개의 꼭지가 마모되기 전에 삼각형은 균형을 잃고 조각이 나 버렸다. 지훈이 제대하기 전에 K는 자퇴를 하고 그동안 찍은 사진으로 만든 포트폴리오를 갖고 사진전을 열었다. 반응은 좋았다. K는 이제 사진을 찍는다. Y는 중학교 선생님이다. 지훈은 아직 제대 하지 못했다. 세 사람이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 K의 포트폴리오에 있었다. 똑딱이로 Y가 찍은 사진을 K가 세피아로 연출을 해서 다시 인화를 했다. 셋은 나란히 서 있다. 시선도 제각각이다. K의 시선은 렌즈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K는 전시회에서 그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훈이 제대를 하면 Y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생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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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빛 속에 물기가 스며있다. 차도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차르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규칙적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멀리서 반짝하고 빛나는 가운데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우산을 하나씩 들고 걸어간다. 굴곡이 있는 인도에는 물웅덩이가 작게 이곳저곳에 생겨있다. 공기는 시원하고 깨끗했다. 가을밤 황사를 내린 비가 말끔히 씻어 주었다.

   K는 맑은 공기에는 아랑곳없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맑은 공기 때문에 담배 맛이 더 깔끔하다. K 손에는 사각 봉투가 들려있다. 그 속에는 그 날 인화한 사진이 한 뭉치 들었다. 모두 흑백 사진이었다. K는 흑백사진을 좋아했다. 그는 보이그틀랜더 베사 L을 갖고 있다. 목측식 수동카메라이다. 구매했을 때 25mm 광각렌즈가 들어있었는데, 35mm 렌즈를 하나 더 구매했다. 광각을 찍기에는 그가 사는 도시에는 너른 광경이 없었다. 그는 스냅 사진을 좋아한다. 흑백 필름을 넣고 레버를 당긴 후에 버튼을 눌러서 찍으면 셔터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카메라 내부 셔터가 닫히고 열리는 속도에 맞춰서 K가 보는 거리 속 장면이 필름에 명백하게 찍힌다. 그리고 흑백이다. 흑백은 꾸밈이 없다. 렌즈 속에 들어오는 장면 시선이 조금만 날카로우면 사진은 꽤 훌륭해 보인다. K는 사각 봉투에 담긴 사진을 보려고 지나가는 길에 카페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앉아서 수다를 꽃피우는 곳에서 K는 조용히 사진을 보리라.

 

이 사진 어때?

제법 멋진 걸.

이 사진은?

창문 너머로 찍었다는 설정이 좀 식상하다.

그래? 그럼 이건?

이게 방금 것 보다 낫다. 바닥에 앉아서 찍었니? 사진 속 소실점이 하늘에 닿아있네.

. 그거 찍느라고 쭈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을 설설 기었다.

어디 다시 봐봐. . 하늘에 구멍이 나서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아. 지훈이 너 사진전 안하냐고 그러더라. 생각해 보았니?

사진전은 무슨. 그냥 이렇게 너나 나나 친구들 보면 그만이지. 대신에 인터넷 블로그에 꾸준히 업데이트하잖아.

지훈이 너 사진전 하면 작품을 사겠다고 그러던걸. 지훈이 너한테 관심 많아. 알고는 있지?

지훈이는 내게 피아노 파트너잖아.

너는 언제나 그러지. 관심 있는 남자들이 있어도 마음이 안 간다고. 대체 왜 그러니?

너도 마찬가지면서... 난 사진 찍으며 지내는 시간이 좋아.

 

    KY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도 함께 들어왔다. KY가 아니었으면 대학에 계속 발 붙히지 못했을 것이다. K는 전공 공부에는 점점 흥미를 잃고 동아리 활동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필름 카메라 동아리였다. 필름 카메라 동아리에서는 독특하게 자기 소개를 잘 하는 신입 멤버에게 35mm 흑백 필름을 한 통 주었다. K는 그 흑백 필름을 타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요가 동작인 나무 서기 자세로 사진을 찍는 동작을 연출하며 자신은 튼튼한 다리와 균형감각을 갖췄기에 카메라 이론을 배우면 실전에서 강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장점을 내세웠다. 한 가지 더, K는 거리 감각을 익히 공부했기에 나무 서기 자세로 자신을 소개하며 멤버 3명이 각각 앉아 있는 거리를 눈대중으로 맞추어서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동아리 총회장이 K가 말한 거리를 줄자로 재어서 확인했다. K는 동아리에 들어와서 한 달 만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이그틀랜더 베사 L을 구매했다. 당시 그 카메라는 한국에서 주류에 들지 않는 카메라였다. 동아리 선배들은 목측식 필름 카메라를 선택한 점에 대해 K에게 물었다. K는 대답했다. ‘이름에 꽂혔어요. 두 손으로 감싸서 쥐었을 때 아담한 디자인을 눈 여겨 보았죠.’ 베사 L25mm 광각 렌즈였기에 K는 곧 35mm 렌즈를 더 구매해야했다. 광각렌즈를 몇 번 찍어 본 K는 자신이 인물 사진에 더 끌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광각 렌즈로 접사를 찍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시야로 비쳐지는 표준 렌즈를 더 좋아했다.

 

    K가 흑백 사진을 찍게 된 것은 독일 표현주의 예술 영화를 보고 나서 부터였다. ‘칼리굴라 박사의 밀실이라는 흑백 무성 영화를 보고, 유채색으로 보이는 현실 세계와는 다른, 어두우면서 또렷한 실루엣 효과를 찾아냈다. 음영 속에 드러나는 얼굴에서 K는 생생한 인간 내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흡인력이 있었다. 흑백 사진은 선이 분명하고, 색은 두 가지이기에 군더더기가 없이 바로 줌인이 되었다. 다채로운 색이 주는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있지만, 흑백에는 솔직함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관악기 연주자의 호흡이 바로 악기 목소리로 뿜어 나와 마음에 고요함을 주는 것처럼 흑백 사진을 바라보는 K의 마음에는 평정이 깃들었다. K의 두 눈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고, 보이그틀랜더 렌즈를 통해 흑백 필름에 그 세계를 찍어낼 때 세상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소리가 되어 공명하는 것이다. K는 그렇게 찍은 세계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흑백 사진은 K가 세상을 조우하는 방식이다.

 

    K는 보이그틀랜더가 가진 따스한 색감 기능으로 칼러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햇빛이 오후 늦게 고즈넉해질 때에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때 찍은 컬러 사진의 색감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색감이 창백하지도 않았고, 뚜렷하지도 않았고, 다만 자연스러웠다. 그 무렵 햇빛은 피사체가 가진 색깔을 편안하게 안내해 주었다. 목측식 레인지 파인더를 통해 조리개를 조절하며 셔터를 누를 때, K의 눈에 들어오는 빛은 행복했다. 그 빛이라면 벗은 몸도 따스해 질 것 같았다. 그런 빛을 감각해 내는 안목은 K가 보았던 명화 덕분이었다. 해지는 바다 풍경을 그린 터너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가장 매혹적인 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순간을 포착한 영국 화가 터너의 작품을 어릴 적에 본 K는 그 아름다움에 공감했다. 투박한 선으로 슥슥 그려내었지만, 그림의 색이 주는 감동은 다른 그림들을 능가했다. K는 그렇게 느꼈다. 인위적이지 않았고, 평화로웠다. 그 평화 속에는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K는 그런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싶었다.

 

    거리로 나선다. K는 목에 베사 L을 걸었다. 바람을 스치며 걸어가며 K는 눈으로 장면을 머릿속에 담는다. 세상 모습에는 사각 프레임이 없다. 모든 것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적당한 지점에서 멈출 수 없다. 건물 너머에 건물들이 서 있고, 도로에 자동차가 행렬하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선을 두고 무작정 걸어간다. K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 역시 무작정 앞을 향한다. K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멈추고, 시선이 한 곳에 쏠리는 순간 꼿꼿이 선다. 한 발에 몸무게를 쏟는다. 베사 L 뷰파인더를 왼쪽 눈에 갖다 댄다. 햇빛이 산란되는 순간을 감지하고 피사체 실루엣이 마치 검정색 펜으로 테두리를 그린 것처럼 도드라져 보일 때 레버를 감고 버튼을 누른다. 이 때는 흑백 사진이다. 흑백은 실루엣이 어떠한가로 판단하고 선택한다. 피사체는 도드라진 실루엣 안에서 분명한 음영을 보여준다.

 

    한 쪽 다리에 몸무게를 지탱하는 버릇은 K가 발레를 배웠기 때문이다. (Bar)동작을 하면 두 다리에 균등한 힘을 기를 수 있다. 상체는 아랫배와 윗배를 팽팽하게 집어넣고 끌어올려 가슴뼈를 조여 준 후 자세를 잡고, 한 쪽 손을 바 위에 올린다. 반대 팔은 목선에서 어깨와 팔뚝을 거쳐 팔꿈치까지 적당히 긴장을 하고 두 번째 손가락까지 길지만 조각같이 만들어 가슴께로 올리고 한 쪽 다리로 균형을 잡고 다른 쪽 다리는 발가락 끝까지 단단하게 뻗어내서 부채꼴 모양을 반복해서 바닥에 그린다. 이 모든 동작 중심에는 호흡이 있다. 호흡을 조용히 멈추는 힘을 갖고 있을 때 자세는 우아하고 긴장감을 갖추어서 완성된다. K는 카메라를 들고는 동작 없는 발레를 하고 있는 것이다. K의 온 몸은 직선과 곡선이 함께 하는 발레 동작을 단순화해서 한 쪽 다리에 힘을 부여하고 순간을 찍어낸다. K가 본 세상이 한 쪽 다리에 실리면 베사 L은 찰칵 소리를 내는 것이다. 피사의 사탑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세상이 K의 한 쪽 다리로 기우뚱한다.

 

    K가 버튼을 누를 때 세상 소리가 그 작은 셔터 소리에 묻힌다. 그 작은 소리에 K는 가슴이 떨렸다. K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때가 바로 그 소리와 함께였다. K의 마음에는 텅 빈 운동장이 있다. 분명 누군가의 손을 잡고 들어선 학교 운동장이었다. 햇빛이 길어지는 늦은 오후, 한 쪽 손을 달랑달랑 거리며 걸어 들어간 운동장에 혼자 남겨진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어느 곳에도 그 누군가가 없었다. 어린 K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교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운동장, 텅 빈 K의 마음은 그러나 크게 울리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그 울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 울림을 대신 발에 실었다 무작정 뛰어서 운동장을 나서자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 건너가 보였다. 눈에 보이는 그 곳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엄마와 오빠가 놀란 얼굴로 K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망상일까? K는 베사 L을 목에 걸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그 기억이 진짜인지 망상인지 K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K는 평평하고 안정감 있는 높이의 굽이 있는 워커를 신었다. 블랙이다. 워커 안 K의 발과 그 위로 뻗은 발목은 단단하다. 걷고, 멈추고, 균형잡고 지탱한다. 삼각대가 세 개의 발을 갖추고 땅 위에 꽂혀 있는 것 못지않게 K의 두 다리는 베사 L을 공중에 고정 시켜야한다. K의 두 손은 너무 움켜쥐지도 않고, 너무 여리지도 않은 강도로 카메라를 감싼다. 한 쪽 다리를 축으로 시선이 고정되면, 왼쪽 눈에 뷰 파인더를 대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뷰 파인더 안에 들어오는 피사체는 아주 조그마하다. 그 작은 피사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동작은 한 호흡에 이루어진다. 마치 발레리나가 시선을 저 너머로 두고 호흡을 들이마셔 몸을 끌어올리며 점프를 하는 순간처럼 K의 시선이 피사체에 닫는 순간 호흡에 따라 발, 발목, 한 쪽 다리 그리고 두 손이 한 번에 연속 동작을 취한 후 찰칵하는 것이다. 보이그틀랜더 베사 LK는 한 몸이다.

 

 

    K는 담배를 잎에 문다. 가볍게 들이마신 후에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잡아서 입술에서 떼어낸다. Y가 캑캑거린다.

미안.

너 앞에서 담배 안 핀다는 걸 또 깜빡했네.

곧 졸업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

사실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든 게 있어. 흑백 사진과 칼러 사진을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대비가 되게 만들었지. 흑백은 주로 인물 사진이고, 칼러 사진은 주로 자연을 찍었어.

너 전공은?

그냥 아르바이트하는 정도로 만족하려고. 난 전공 공부 평생 할 마음이 없다

너는 선생님 할 거지?

그래야겠지. 나야 다른 데는 소질도 없는 걸.

요즘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데, 방학마다 여행 다니면 되잖아.

임용 공부할 것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너는 인내심이 있잖아. 소질 있는 사람보다 인내를 갖춘 사람이 결국은 해내.

KY는 둘 다 남자 친구가 없다. 둘 다 인물도 괜찮고, 대화도 잘 이끄는데, 둘이서 너무 친한 나머지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

좀 이따가 지훈이가 온다고 했어.

K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신다.

K의 코를 통해 담배 연기가 나온다.

지훈이 오면 난 갈게.

가지마.

...

K는 담배를 비벼 끈다. 그 때 카페 문을 열고 지훈이가 차가운 바람을 몰고는 나타난다. 눈썹이 길고 눈이 반짝이는 지훈이는 K를 보더니 웃는다. K는 안녕하고 말한다. Y가 엉거주춤 일어난다. KY가 일어나자 눈짓을 한다. 가지말라고. 지훈이가 K의 옆에 앉자, Y는 다시 불편하게 앉아버린다.

시험 끝나고 쉬지 뭐하러 왔니?

지훈이는 K의 말투에 익숙하다는 듯이 멋쩍게 웃더니 음료를 주문한다.

K 옆의 지훈이, 지훈이 맞은 편 Y.

모두 말이 없다.

Y가 문자를 보낸다. K의 핸드폰이 울린다.

나 가볼게. 잡지 마.’

K는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문다.

Y가 일어나자 지훈이가 그 자리에 대신 앉는다.

K는 지훈이를 삐딱하게 쳐다보고 담배를 다 핀다.

   K가 지훈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때였다. 라이터가 없었던 K는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담배 불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 남자는 잠시만요 하고는 건너편 편의점으로 가서 라이터를 사왔다. K는 고맙다는 말은 생략하고 그 남자에게 담배를 하나 건넸는데, 그 남자가 지훈이었다. 둘은 전공이 같다. 둘 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한다. 둘이 만난 그 때는 실기 시험 날이었다. 둘은 같은 대학교에 실기 시험을 보러 왔다. 둘 다 재수를 하고 있었다. K는 쇼팽 발라드 No.3를 실기 자유곡으로 쳤고, 지훈은 리스트 라 캄파넬라를 실기 자유곡으로 쳤다. 둘은 그 해 그 대학교에 합격했다. 학과 동기들은 둘을 과 커플로 바라보았지만, 막상 둘은 이렇다 할 연애를 하지 않았다.

 

   피아노 듀오 수업 시간에 바흐의 브란덴 부르크 협주곡을 피아노 듀오곡으로 편곡한 작품을 쳤는데, K는 연습이 부족해서 첫 장을 다 쳐내기도 전에 속도가 느려졌다. 지훈이는 K의 피아노 소리를 높이 인정했다. 지훈이는 남자로서는 아주 유려하고 부드러운 타건과 음색을 지닌 반면, K는 여자로서는 장중하고 힘이 있는 피아노 터치를 갖고 있었다. 교수님은 둘이 함께 듀오를 한다고 했을 때, 그 해 음악학과 정기 연주회 무대에 올라가라고 했다. 지훈이와 K는 아침 일찍 만나서 연습을 했다. K는 지훈의 소리를 잘 듣지 않았다. K는 브란덴 부르크를 치기에는 다소 급하고 열정적이었다. 반듯한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것처럼 일정한 템포를 유지해야 하지만, K의 연습이 부족한 손가락은 바흐 곡을 자꾸 낭만곡처럼 몰고 가려고 했다. 지훈은 참을성을 갖고 천천히 맞춰보고 K가 치는 피아노 two에 자신의 피아노 소리 밸런스를 맞추려고 했다. 지훈은 차분했지만, K는 차분하기보다는 침울했고 거칠었다. 둘은 결국 무대에 올라서 브란덴 부르크를 연주했다. 주제 멜로디 진행이 고조될 때마다 K의 무거운 피아노 터치가 부드러운 지훈의 피아노 소리를 넘어섰는데, 지훈은 그럴 때마다 더욱 템포를 여유있게 지켜냈다. 다행히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오는 부분에서 두 사람의 피아노 소리와 타건이 잘 어울렸고, 젊은 예비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으로는 성공적이었다. K의 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처럼, 지훈의 멜로디가 단아하게, 연주 속에서 빛나주었다.

 

나 이제 군대 간다.

K는 지훈의 눈을 쳐다본다.

너 졸업하면 가려고 했는데, 조금 일찍 가게 되었어. 마지막 학기를 두고 다녀오려고. 졸업 연주를 들으려고 했는데, 못 듣게 되었다.

K는 여전히 말이 없다.

지훈이 빠진다면 K 역시 학과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할 것이다.

둘은 사귀지 않았지만, K는 지훈이 덕분에 전공을 할 수 있었다. Y 덕분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지훈이 도움으로 피아노 공부를 여러 번 접으려던 K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K는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문다. 지훈이 그 담배를 뺏는다. K는 그러자 탁자에 있던 물을 벌컥 벌컥 마신다. 지훈이는 그런 K를 바라본다. 지훈은 안정되지 않은 K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할 말이 있는 듯이 쳐다보고 있지만, K가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을 지훈도 따라한다.

 

   Y는 지훈이와 K가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훈이가 술을 마시고 Y에게 전화를 했다. 군대 징집이 나왔는데 어떻게 K를 두고 자신이 떠나냐며 울고 있었다. Y는 전화기 너머로 조용히 듣고 있었다. Y가 지훈을 처음 만난 곳은 K가 지훈과 학과 연습실에 있을 때였다. KY와의 약속을 잊고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Y는 그럴 줄 알고, K를 만나러 연습실로 찾아갔다. 그 때 본 지훈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올려서 Y를 지목하며 K에게 말했다. 네 친구니?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치아키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하고 Y는 생각했다. K는 어둡고 조용한 눈으로 Y를 쳐다보았다. YK가 그 때 화가 났나 싶었다.

   셋이 함께 출사를 간 적도 있다. K는 보이그틀랜더를 Y는 똑딱이를 지훈은 삼각대를 들고 떠난 출사에서 날이 흐려졌고, 셋은 비를 피해서 작은 구멍가게에서 노닥거려야했다. 그곳은 어느 시골 골목이었다. 골목 끝에는 작은 동산이 있고, 그곳에 가면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K의 조리개로는 그 흐린 날 어두운 구멍 가게에서 사진을 찍을 수 가 없었다. Y가 갖고 온 똑딱이로 셋은 사진을 한 장 남겼다. 구멍 가게는 오래되어서 갈색 나무 판자로 지어져 있었고, 습한 공기 때문에 눅눅한 냄새가 났다. 구멍 가게 처마 밑으로 똑똑 거리며 빗물이 떨어졌고, 구멍가게 할머니는 작은 방에서 졸고 계셨다. 구멍 가게 안에 있는 난로 위에 양은 주전자가 쉭쉭거리며 증기를 내뿜었고, Y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똑딱이 소리가 났다. K는 여전히 웃지 않았고, Y는 함박웃음을 띠었고, 지훈은 그 긴 속눈썹 아래 눈빛을 반짝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똑딱이가 삼각대 위에서 플래쉬를 터뜨릴 때마다 방 안에서 졸던 할머니가 깜짝 놀랐다. 잠에서 깬 할머니는 세 사람에게 알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셋은 알사탕을 우물거리며 똑딱이로 찍은 사진을 구경했다.

 

   K가 사진이 별로라고 했다. 플래쉬가 얼굴 빛을 너무 창백하게 한다고 했다. 적목 현상 때문에 지훈이의 눈이 빨갛게 나온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셋이 함께 잘 나온 사진이 딱 한 장 있었다. Y는 그 사진을 세 장 인화해서 액자에 담아서 K와 지훈과 자신이 나누어 가졌다. 그 사진이 세 사람이 공유한 유일한 추억거리였다. 셋이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KY가 없으면 전공 공부 시간 외에는 지훈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Y는 지훈이 K를 만나러 오면 자리를 피해주려고 했다. 지훈, Y, K는 한결 같았다. K에게 보이그틀랜더 베사 L만큼 분신이 있다면 Y와 지훈이였다. 지훈은 KY가 함께 있으면 묘하게 편안했다. 솔직히 K와 지훈이 둘이서 있으면, K는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KY가 있을 때 지훈이 오면 셋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적당한 시간에 Y가 자리를 피했고, 지훈은 담배를 피우는 K를 물끄러미 쳐다보기에 바빴다. K는 지훈이와 피아노를 칠 때는 몰랐는데, 피아노가 없을 때 지훈을 만나면 긴장이 되었다. 지훈은 K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넌지시 물었다. 담배는 어떻게 배운 거야? K가 처음으로 웃었다. 나 혼자 사서 피워봤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비가 그친 보도 블럭은 말끔했다. 시내 거리를 온통 물청소를 한 것처럼 비 온 후 냄새가 났다. 하늘에 구름은 저 멀리 옮겨가고, 가을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K와 지훈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카페에서 나와서 걸어가고 있는 지 10분은 되었다. 둘은 곧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키가 큰 지훈은 K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간다. K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배 고프지 않니? 저기 찐빵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자. 지훈은 묵묵히 K를 쫓아 들어간다. 찐빵 가게에서는 만두도 팔았다. 만두와 찐빵을 1인분씩 시키고 두 사람은 앉아있다. 가게 안 난로가 훈훈하게 실내를 덥혀준다. 나 찐빵 정말 오랜만에 먹어. 너는? 지훈은 고개를 들고 K를 바라본다.

 

   나 어릴 때, 오빠랑 엄마랑 놀러갔다가 버림 받았다. 혼자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그 때 마음 속으로 오빠를 크게 불렀어. 그리고 들어간 가게가 찐빵 집이었어. 그곳에 엄마와 오빠가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놀라워했어. 그 장면이 요새 들어 자꾸 기억이 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하나 K가 입에 문다. 까만 앙꼬가 후두두 떨어진다. K가 목이 매인지 물을 마신다. K는 눈물이 찔끔나는 것을 물을 마시며 지훈이 모른 척 해주길 바란다.

지훈은 K가 그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앉아있다. 물을 다 마신 K는 마신 물만큼 많은 눈물을 흘린다. 찐빵이 아직도 입 안에 있어서 우물거리며 운다. 둘은 그렇게 찐빵 집에 앉아서 울기도 하고, 찐빵을 먹기도 하고, 말없이 앉아있기도 한다. 지훈은 K가 다 울었다고 생각했을 때, 휴지를 가져다준다. K가 찡그린 채로 웃는다.

나는 내가 싫어. 나는 내가 싫어.

K가 코를 팽 푼다. 지훈이 돌돌 말린 휴지를 풀어서 쓰기 좋게 접어서 준다. 그래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아하기는 힘들지. K는 지훈을 보며 말한다. 누구나? 그럼 너도 너가 싫어?

나는 피아노 재수하기 위해 레슨비를 알바비로 벌어야했어. 아버지가 피아노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거든. 첫 해 실기 시험에서 알바하느라 힘쓰다가 팔에 이상이 와서 실기 시험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걸.

K는 울음이 다 멈췄는지 딸꾹질을 한다.

지훈이 넌지시 웃는다. K는 톡 쏘아보며, 내가 우니까 좋냐?

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우리? 그 속에는 Y도 있어.

둘은 또 말이 없다. 가을밤 둘은 찐빵을 먹으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낸다. K는 왜 Y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지훈에게 얘기한 걸까? 지훈은 그러나, 좋다고 생각한다. K가 드디어 자신에게 속마음을 말한다고 여긴다.

너는 할 말 없어?

K가 지훈을 보며 말한다. 지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너처럼 드라마틱한 기억이 없는데. 나는 어릴 때, 형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 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어느 날 형이 내 머리를 바리깡으로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만들어버린 적이 있었어. 엄마가 결국 나를 미용실에 데려가서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려야 했지. 그 기억이 떠오르네. 라고 말한다.

K와 지훈은 마지막 남은 만두를 서로 먹으라고 말한다. 둘은 그것을 반으로 나눠먹는다. K는 지훈이 그닥 위로를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섣부른 위로가 되려 울음 바다를 일으킬 것이다. 다소 쌀쌀했던 반응이 K의 이런 고백을 일상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러나, 지나가는 말로 들려지게 해주어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따져보면 지훈이 KY와 함께 있을 때 했던 행동과 말들이 무심한 듯 하지만 모나지 않고 정중해서 둘은 편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K는 새삼 깨닫는다. K는 가게를 나오며 자신이 계산을 한다. 둘은 어정쩡하게 가게 앞에 서서 작별을 한다. K가 살며시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지훈이 살짝 손을 쥔다. 둘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KY와 함께 걷고 있다. 목에는 보이그틀랜더가 걸려있다. 둘이 걸어가는 사이에 초겨울 바람이 쌩하고 지나간다. 걸어가며 둘은 사진을 찍는다. KY가 웃고 있는 모습을 컬러로 찍고 있다. 둘은 사진을 찍어서 지훈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Y가 똑딱이로 찍는 사진은 주로 K가 보이그틀랜더 뷰파인더로 피사체를 렌즈에 담아낼 때이다. K의 얼굴은 보이그틀랜더와 함께 나온다. Y가 제대로 찍자고 해도 K는 좀체 카메라를 얼굴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두 사람이 걷는 곳은 주로 골목이다. 큰 거리를 걷다가 그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곳은 좁은 골목길에서 담장, 혹은 파란 대문, 혹은 전봇대 앞에서이다. 사진 속에 Y 얼굴은 환하다. Y는 항상 환하게 웃는다. K는 그런가하면 눈빛이 깊다. 일자로 다문 입술은 그 압도적인 눈빛에 지지 않을 만큼 꾹 다물고 있다. 둘은 똑딱이로 행인에게 함께 나온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치아를 보이며 웃는 Y와 한쪽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K가 프레임 안에서 정지해 있다. 둘 사이 빈 공간에 지훈이 서 있으면 딱 좋을 성 싶다.

 

너 카메라를 얼굴에서 떼는 순간을 내가 포착했지. 어때?

나는 내 얼굴 나온 사진 별로야. 나한테 카메라는 내 분신인데, 함께 나오면 더 좋을 것 같아. 그 사진은 보내지 말아.

KY가 잘 포착한 사진을 뺏는다. 사진 속에 K는 마침 카메라를 양손에 쥐고 얼굴에서 비스듬히 내려놓고 있을 때이다. 시선이 정면은 아니지만, K의 무표정함이 잘 살아 있다. Y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지훈이 너 얼굴을 고스란히 보고 싶어할텐데, ?

너처럼 환하게 웃는 사진이 보고 싶지 내 얼굴이 뭐가 좋다고.

YK가 지훈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결같다. 그렇다면 KY와 지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 마음도 Y와 같다. KY 사이에 지훈은 똑같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세 사람은 정삼각형을 이룬다. 어느 곳에 서 있던지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같은 변을 이루는 세 꼭지점을 지켜낸다. 세 사람은 하나이고, 셋 중에 어느 한 명이 빠지면 그것은 형태가 없어진다. 그냥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끝없는 길이 될 뿐이다. 지금, 그러나 둘 사이에 지훈이 없다. KY는 지쳤다. 서로가 지훈에게 보내 줄 사진을 찍어주느라 기운을 다 쓴 탓도 있지만, 지훈이 둘 사이를 느슨하게 해주었던 그 편안함을 찾을 수 없다. 너무 많은 배려로 인해 KY는 말이 없어진다.

   탁자 위에는 인화한 사진들이 다 비슷해 보인다. 한 명은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한 명은 혼자 우두커니 서서 웃고 있다. 각각의 여자 인물은 그 사진 속에서 허전한 공간 연출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찍어 준 사진인데, 왜 저 정도밖에는 웃지 않았을까? 왜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진들 뿐 일까?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독사진 속 인물의 존재감이 떨어진다. 절대 베스트 포토제닉 상을 받을 수 없는 포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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