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속에 물기가 스며있다. 차도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차르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규칙적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멀리서 반짝하고 빛나는 가운데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우산을 하나씩 들고 걸어간다. 굴곡이 있는 인도에는 물웅덩이가 작게 이곳저곳에 생겨있다. 공기는 시원하고 깨끗했다. 가을밤 황사를 내린 비가 말끔히 씻어 주었다.
K는 맑은 공기에는 아랑곳없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맑은 공기 때문에 담배 맛이 더 깔끔하다. K 손에는 사각 봉투가 들려있다. 그 속에는 그 날 인화한 사진이 한 뭉치 들었다. 모두 흑백 사진이었다. K는 흑백사진을 좋아했다. 그는 보이그틀랜더 베사 L을 갖고 있다. 목측식 수동카메라이다. 구매했을 때 25mm 광각렌즈가 들어있었는데, 35mm 렌즈를 하나 더 구매했다. 광각을 찍기에는 그가 사는 도시에는 너른 광경이 없었다. 그는 스냅 사진을 좋아한다. 흑백 필름을 넣고 레버를 당긴 후에 버튼을 눌러서 찍으면 셔터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카메라 내부 셔터가 닫히고 열리는 속도에 맞춰서 K가 보는 거리 속 장면이 필름에 명백하게 찍힌다. 그리고 흑백이다. 흑백은 꾸밈이 없다. 렌즈 속에 들어오는 장면 시선이 조금만 날카로우면 사진은 꽤 훌륭해 보인다. K는 사각 봉투에 담긴 사진을 보려고 지나가는 길에 카페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앉아서 수다를 꽃피우는 곳에서 K는 조용히 사진을 보리라.
이 사진 어때?
제법 멋진 걸.
이 사진은?
창문 너머로 찍었다는 설정이 좀 식상하다.
그래? 그럼 이건?
이게 방금 것 보다 낫다. 바닥에 앉아서 찍었니? 사진 속 소실점이 하늘에 닿아있네.
응. 그거 찍느라고 쭈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을 설설 기었다.
어디 다시 봐봐. 음. 하늘에 구멍이 나서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아. 지훈이 너 사진전 안하냐고 그러더라. 생각해 보았니?
사진전은 무슨. 그냥 이렇게 너나 나나 친구들 보면 그만이지. 대신에 인터넷 블로그에 꾸준히 업데이트하잖아.
지훈이 너 사진전 하면 작품을 사겠다고 그러던걸. 지훈이 너한테 관심 많아. 알고는 있지?
지훈이는 내게 피아노 파트너잖아.
너는 언제나 그러지. 관심 있는 남자들이 있어도 마음이 안 간다고. 대체 왜 그러니?
너도 마찬가지면서... 난 사진 찍으며 지내는 시간이 좋아.
K와 Y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도 함께 들어왔다. K는 Y가 아니었으면 대학에 계속 발 붙히지 못했을 것이다. K는 전공 공부에는 점점 흥미를 잃고 동아리 활동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필름 카메라 동아리였다. 필름 카메라 동아리에서는 독특하게 자기 소개를 잘 하는 신입 멤버에게 35mm 흑백 필름을 한 통 주었다. K는 그 흑백 필름을 타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요가 동작인 나무 서기 자세로 사진을 찍는 동작을 연출하며 자신은 튼튼한 다리와 균형감각을 갖췄기에 카메라 이론을 배우면 실전에서 강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장점을 내세웠다. 한 가지 더, K는 거리 감각을 익히 공부했기에 나무 서기 자세로 자신을 소개하며 멤버 3명이 각각 앉아 있는 거리를 눈대중으로 맞추어서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동아리 총회장이 K가 말한 거리를 줄자로 재어서 확인했다. K는 동아리에 들어와서 한 달 만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이그틀랜더 베사 L을 구매했다. 당시 그 카메라는 한국에서 주류에 들지 않는 카메라였다. 동아리 선배들은 목측식 필름 카메라를 선택한 점에 대해 K에게 물었다. K는 대답했다. ‘이름에 꽂혔어요. 두 손으로 감싸서 쥐었을 때 아담한 디자인을 눈 여겨 보았죠.’ 베사 L은 25mm 광각 렌즈였기에 K는 곧 35mm 렌즈를 더 구매해야했다. 광각렌즈를 몇 번 찍어 본 K는 자신이 인물 사진에 더 끌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광각 렌즈로 접사를 찍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시야로 비쳐지는 표준 렌즈를 더 좋아했다.
K가 흑백 사진을 찍게 된 것은 독일 표현주의 예술 영화를 보고 나서 부터였다. ‘칼리굴라 박사의 밀실’이라는 흑백 무성 영화를 보고, 유채색으로 보이는 현실 세계와는 다른, 어두우면서 또렷한 실루엣 효과를 찾아냈다. 음영 속에 드러나는 얼굴에서 K는 생생한 인간 내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흡인력이 있었다. 흑백 사진은 선이 분명하고, 색은 두 가지이기에 군더더기가 없이 바로 줌인이 되었다. 다채로운 색이 주는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있지만, 흑백에는 솔직함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관악기 연주자의 호흡이 바로 악기 목소리로 뿜어 나와 마음에 고요함을 주는 것처럼 흑백 사진을 바라보는 K의 마음에는 평정이 깃들었다. K의 두 눈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고, 보이그틀랜더 렌즈를 통해 흑백 필름에 그 세계를 찍어낼 때 세상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소리가 되어 공명하는 것이다. K는 그렇게 찍은 세계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흑백 사진은 K가 세상을 조우하는 방식이다.
K는 보이그틀랜더가 가진 따스한 색감 기능으로 칼러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햇빛이 오후 늦게 고즈넉해질 때에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때 찍은 컬러 사진의 색감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색감이 창백하지도 않았고, 뚜렷하지도 않았고, 다만 자연스러웠다. 그 무렵 햇빛은 피사체가 가진 색깔을 편안하게 안내해 주었다. 목측식 레인지 파인더를 통해 조리개를 조절하며 셔터를 누를 때, K의 눈에 들어오는 빛은 행복했다. 그 빛이라면 벗은 몸도 따스해 질 것 같았다. 그런 빛을 감각해 내는 안목은 K가 보았던 명화 덕분이었다. 해지는 바다 풍경을 그린 터너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가장 매혹적인 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순간을 포착한 영국 화가 터너의 작품을 어릴 적에 본 K는 그 아름다움에 공감했다. 투박한 선으로 슥슥 그려내었지만, 그림의 색이 주는 감동은 다른 그림들을 능가했다. K는 그렇게 느꼈다. 인위적이지 않았고, 평화로웠다. 그 평화 속에는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K는 그런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싶었다.
거리로 나선다. K는 목에 베사 L을 걸었다. 바람을 스치며 걸어가며 K는 눈으로 장면을 머릿속에 담는다. 세상 모습에는 사각 프레임이 없다. 모든 것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적당한 지점에서 멈출 수 없다. 건물 너머에 건물들이 서 있고, 도로에 자동차가 행렬하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선을 두고 무작정 걸어간다. K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 역시 무작정 앞을 향한다. K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멈추고, 시선이 한 곳에 쏠리는 순간 꼿꼿이 선다. 한 발에 몸무게를 쏟는다. 베사 L 뷰파인더를 왼쪽 눈에 갖다 댄다. 햇빛이 산란되는 순간을 감지하고 피사체 실루엣이 마치 검정색 펜으로 테두리를 그린 것처럼 도드라져 보일 때 레버를 감고 버튼을 누른다. 이 때는 흑백 사진이다. 흑백은 실루엣이 어떠한가로 판단하고 선택한다. 피사체는 도드라진 실루엣 안에서 분명한 음영을 보여준다.
한 쪽 다리에 몸무게를 지탱하는 버릇은 K가 발레를 배웠기 때문이다. 바(Bar)동작을 하면 두 다리에 균등한 힘을 기를 수 있다. 상체는 아랫배와 윗배를 팽팽하게 집어넣고 끌어올려 가슴뼈를 조여 준 후 자세를 잡고, 한 쪽 손을 바 위에 올린다. 반대 팔은 목선에서 어깨와 팔뚝을 거쳐 팔꿈치까지 적당히 긴장을 하고 두 번째 손가락까지 길지만 조각같이 만들어 가슴께로 올리고 한 쪽 다리로 균형을 잡고 다른 쪽 다리는 발가락 끝까지 단단하게 뻗어내서 부채꼴 모양을 반복해서 바닥에 그린다. 이 모든 동작 중심에는 호흡이 있다. 호흡을 조용히 멈추는 힘을 갖고 있을 때 자세는 우아하고 긴장감을 갖추어서 완성된다. K는 카메라를 들고는 동작 없는 발레를 하고 있는 것이다. K의 온 몸은 직선과 곡선이 함께 하는 발레 동작을 단순화해서 한 쪽 다리에 힘을 부여하고 순간을 찍어낸다. K가 본 세상이 한 쪽 다리에 실리면 베사 L은 찰칵 소리를 내는 것이다. 피사의 사탑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세상이 K의 한 쪽 다리로 기우뚱한다.
K가 버튼을 누를 때 세상 소리가 그 작은 셔터 소리에 묻힌다. 그 작은 소리에 K는 가슴이 떨렸다. K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때가 바로 그 소리와 함께였다. K의 마음에는 텅 빈 운동장이 있다. 분명 누군가의 손을 잡고 들어선 학교 운동장이었다. 햇빛이 길어지는 늦은 오후, 한 쪽 손을 달랑달랑 거리며 걸어 들어간 운동장에 혼자 남겨진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어느 곳에도 그 누군가가 없었다. 어린 K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교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운동장, 텅 빈 K의 마음은 그러나 크게 울리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그 울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 울림을 대신 발에 실었다 무작정 뛰어서 운동장을 나서자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 건너가 보였다. 눈에 보이는 그 곳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엄마와 오빠가 놀란 얼굴로 K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망상일까? K는 베사 L을 목에 걸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그 기억이 진짜인지 망상인지 K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K는 평평하고 안정감 있는 높이의 굽이 있는 워커를 신었다. 블랙이다. 워커 안 K의 발과 그 위로 뻗은 발목은 단단하다. 걷고, 멈추고, 균형잡고 지탱한다. 삼각대가 세 개의 발을 갖추고 땅 위에 꽂혀 있는 것 못지않게 K의 두 다리는 베사 L을 공중에 고정 시켜야한다. K의 두 손은 너무 움켜쥐지도 않고, 너무 여리지도 않은 강도로 카메라를 감싼다. 한 쪽 다리를 축으로 시선이 고정되면, 왼쪽 눈에 뷰 파인더를 대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뷰 파인더 안에 들어오는 피사체는 아주 조그마하다. 그 작은 피사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동작은 한 호흡에 이루어진다. 마치 발레리나가 시선을 저 너머로 두고 호흡을 들이마셔 몸을 끌어올리며 점프를 하는 순간처럼 K의 시선이 피사체에 닫는 순간 호흡에 따라 발, 발목, 한 쪽 다리 그리고 두 손이 한 번에 연속 동작을 취한 후 찰칵하는 것이다. 보이그틀랜더 베사 L과 K는 한 몸이다.
K는 담배를 잎에 문다. 가볍게 들이마신 후에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잡아서 입술에서 떼어낸다. Y가 캑캑거린다.
미안.
너 앞에서 담배 안 핀다는 걸 또 깜빡했네.
곧 졸업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
사실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든 게 있어. 흑백 사진과 칼러 사진을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대비가 되게 만들었지. 흑백은 주로 인물 사진이고, 칼러 사진은 주로 자연을 찍었어.
너 전공은?
그냥 아르바이트하는 정도로 만족하려고. 난 전공 공부 평생 할 마음이 없다
너는 선생님 할 거지?
그래야겠지. 나야 다른 데는 소질도 없는 걸.
요즘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데, 방학마다 여행 다니면 되잖아.
임용 공부할 것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너는 인내심이 있잖아. 소질 있는 사람보다 인내를 갖춘 사람이 결국은 해내.
K와 Y는 둘 다 남자 친구가 없다. 둘 다 인물도 괜찮고, 대화도 잘 이끄는데, 둘이서 너무 친한 나머지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
좀 이따가 지훈이가 온다고 했어.
K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신다.
K의 코를 통해 담배 연기가 나온다.
지훈이 오면 난 갈게.
가지마.
...
K는 담배를 비벼 끈다. 그 때 카페 문을 열고 지훈이가 차가운 바람을 몰고는 나타난다. 눈썹이 길고 눈이 반짝이는 지훈이는 K를 보더니 웃는다. K는 안녕하고 말한다. Y가 엉거주춤 일어난다. K는 Y가 일어나자 눈짓을 한다. 가지말라고. 지훈이가 K의 옆에 앉자, Y는 다시 불편하게 앉아버린다.
시험 끝나고 쉬지 뭐하러 왔니?
지훈이는 K의 말투에 익숙하다는 듯이 멋쩍게 웃더니 음료를 주문한다.
K 옆의 지훈이, 지훈이 맞은 편 Y.
모두 말이 없다.
Y가 문자를 보낸다. K의 핸드폰이 울린다.
‘나 가볼게. 잡지 마.’
K는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문다.
Y가 일어나자 지훈이가 그 자리에 대신 앉는다.
K는 지훈이를 삐딱하게 쳐다보고 담배를 다 핀다.
K가 지훈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때였다. 라이터가 없었던 K는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담배 불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 남자는 잠시만요 하고는 건너편 편의점으로 가서 라이터를 사왔다. K는 고맙다는 말은 생략하고 그 남자에게 담배를 하나 건넸는데, 그 남자가 지훈이었다. 둘은 전공이 같다. 둘 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한다. 둘이 만난 그 때는 실기 시험 날이었다. 둘은 같은 대학교에 실기 시험을 보러 왔다. 둘 다 재수를 하고 있었다. K는 쇼팽 발라드 No.3를 실기 자유곡으로 쳤고, 지훈은 리스트 라 캄파넬라를 실기 자유곡으로 쳤다. 둘은 그 해 그 대학교에 합격했다. 학과 동기들은 둘을 과 커플로 바라보았지만, 막상 둘은 이렇다 할 연애를 하지 않았다.
피아노 듀오 수업 시간에 바흐의 브란덴 부르크 협주곡을 피아노 듀오곡으로 편곡한 작품을 쳤는데, K는 연습이 부족해서 첫 장을 다 쳐내기도 전에 속도가 느려졌다. 지훈이는 K의 피아노 소리를 높이 인정했다. 지훈이는 남자로서는 아주 유려하고 부드러운 타건과 음색을 지닌 반면, K는 여자로서는 장중하고 힘이 있는 피아노 터치를 갖고 있었다. 교수님은 둘이 함께 듀오를 한다고 했을 때, 그 해 음악학과 정기 연주회 무대에 올라가라고 했다. 지훈이와 K는 아침 일찍 만나서 연습을 했다. K는 지훈의 소리를 잘 듣지 않았다. K는 브란덴 부르크를 치기에는 다소 급하고 열정적이었다. 반듯한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것처럼 일정한 템포를 유지해야 하지만, K의 연습이 부족한 손가락은 바흐 곡을 자꾸 낭만곡처럼 몰고 가려고 했다. 지훈은 참을성을 갖고 천천히 맞춰보고 K가 치는 피아노 two에 자신의 피아노 소리 밸런스를 맞추려고 했다. 지훈은 차분했지만, K는 차분하기보다는 침울했고 거칠었다. 둘은 결국 무대에 올라서 브란덴 부르크를 연주했다. 주제 멜로디 진행이 고조될 때마다 K의 무거운 피아노 터치가 부드러운 지훈의 피아노 소리를 넘어섰는데, 지훈은 그럴 때마다 더욱 템포를 여유있게 지켜냈다. 다행히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오는 부분에서 두 사람의 피아노 소리와 타건이 잘 어울렸고, 젊은 예비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으로는 성공적이었다. K의 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처럼, 지훈의 멜로디가 단아하게, 연주 속에서 빛나주었다.
나 이제 군대 간다.
K는 지훈의 눈을 쳐다본다.
너 졸업하면 가려고 했는데, 조금 일찍 가게 되었어. 마지막 학기를 두고 다녀오려고. 졸업 연주를 들으려고 했는데, 못 듣게 되었다.
K는 여전히 말이 없다.
지훈이 빠진다면 K 역시 학과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할 것이다.
둘은 사귀지 않았지만, K는 지훈이 덕분에 전공을 할 수 있었다. Y 덕분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지훈이 도움으로 피아노 공부를 여러 번 접으려던 K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K는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문다. 지훈이 그 담배를 뺏는다. K는 그러자 탁자에 있던 물을 벌컥 벌컥 마신다. 지훈이는 그런 K를 바라본다. 지훈은 안정되지 않은 K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할 말이 있는 듯이 쳐다보고 있지만, K가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을 지훈도 따라한다.
Y는 지훈이와 K가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훈이가 술을 마시고 Y에게 전화를 했다. 군대 징집이 나왔는데 어떻게 K를 두고 자신이 떠나냐며 울고 있었다. Y는 전화기 너머로 조용히 듣고 있었다. Y가 지훈을 처음 만난 곳은 K가 지훈과 학과 연습실에 있을 때였다. K는 Y와의 약속을 잊고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Y는 그럴 줄 알고, K를 만나러 연습실로 찾아갔다. 그 때 본 지훈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올려서 Y를 지목하며 K에게 말했다. 네 친구니?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치아키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하고 Y는 생각했다. K는 어둡고 조용한 눈으로 Y를 쳐다보았다. Y는 K가 그 때 화가 났나 싶었다.
셋이 함께 출사를 간 적도 있다. K는 보이그틀랜더를 Y는 똑딱이를 지훈은 삼각대를 들고 떠난 출사에서 날이 흐려졌고, 셋은 비를 피해서 작은 구멍가게에서 노닥거려야했다. 그곳은 어느 시골 골목이었다. 골목 끝에는 작은 동산이 있고, 그곳에 가면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K의 조리개로는 그 흐린 날 어두운 구멍 가게에서 사진을 찍을 수 가 없었다. Y가 갖고 온 똑딱이로 셋은 사진을 한 장 남겼다. 구멍 가게는 오래되어서 갈색 나무 판자로 지어져 있었고, 습한 공기 때문에 눅눅한 냄새가 났다. 구멍 가게 처마 밑으로 똑똑 거리며 빗물이 떨어졌고, 구멍가게 할머니는 작은 방에서 졸고 계셨다. 구멍 가게 안에 있는 난로 위에 양은 주전자가 쉭쉭거리며 증기를 내뿜었고, Y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똑딱이 소리가 났다. K는 여전히 웃지 않았고, Y는 함박웃음을 띠었고, 지훈은 그 긴 속눈썹 아래 눈빛을 반짝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똑딱이가 삼각대 위에서 플래쉬를 터뜨릴 때마다 방 안에서 졸던 할머니가 깜짝 놀랐다. 잠에서 깬 할머니는 세 사람에게 알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셋은 알사탕을 우물거리며 똑딱이로 찍은 사진을 구경했다.
K가 사진이 별로라고 했다. 플래쉬가 얼굴 빛을 너무 창백하게 한다고 했다. 적목 현상 때문에 지훈이의 눈이 빨갛게 나온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셋이 함께 잘 나온 사진이 딱 한 장 있었다. Y는 그 사진을 세 장 인화해서 액자에 담아서 K와 지훈과 자신이 나누어 가졌다. 그 사진이 세 사람이 공유한 유일한 추억거리였다. 셋이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K는 Y가 없으면 전공 공부 시간 외에는 지훈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Y는 지훈이 K를 만나러 오면 자리를 피해주려고 했다. 지훈, Y, K는 한결 같았다. K에게 보이그틀랜더 베사 L만큼 분신이 있다면 Y와 지훈이였다. 지훈은 K와 Y가 함께 있으면 묘하게 편안했다. 솔직히 K와 지훈이 둘이서 있으면, K는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K와 Y가 있을 때 지훈이 오면 셋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적당한 시간에 Y가 자리를 피했고, 지훈은 담배를 피우는 K를 물끄러미 쳐다보기에 바빴다. K는 지훈이와 피아노를 칠 때는 몰랐는데, 피아노가 없을 때 지훈을 만나면 긴장이 되었다. 지훈은 K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넌지시 물었다. 담배는 어떻게 배운 거야? K가 처음으로 웃었다. 나 혼자 사서 피워봤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비가 그친 보도 블럭은 말끔했다. 시내 거리를 온통 물청소를 한 것처럼 비 온 후 냄새가 났다. 하늘에 구름은 저 멀리 옮겨가고, 가을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K와 지훈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카페에서 나와서 걸어가고 있는 지 10분은 되었다. 둘은 곧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키가 큰 지훈은 K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간다. K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배 고프지 않니? 저기 찐빵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자. 지훈은 묵묵히 K를 쫓아 들어간다. 찐빵 가게에서는 만두도 팔았다. 만두와 찐빵을 1인분씩 시키고 두 사람은 앉아있다. 가게 안 난로가 훈훈하게 실내를 덥혀준다. 나 찐빵 정말 오랜만에 먹어. 너는? 지훈은 고개를 들고 K를 바라본다.
나 어릴 때, 오빠랑 엄마랑 놀러갔다가 버림 받았다. 혼자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그 때 마음 속으로 오빠를 크게 불렀어. 그리고 들어간 가게가 찐빵 집이었어. 그곳에 엄마와 오빠가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놀라워했어. 그 장면이 요새 들어 자꾸 기억이 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하나 K가 입에 문다. 까만 앙꼬가 후두두 떨어진다. K가 목이 매인지 물을 마신다. K는 눈물이 찔끔나는 것을 물을 마시며 지훈이 모른 척 해주길 바란다.
지훈은 K가 그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앉아있다. 물을 다 마신 K는 마신 물만큼 많은 눈물을 흘린다. 찐빵이 아직도 입 안에 있어서 우물거리며 운다. 둘은 그렇게 찐빵 집에 앉아서 울기도 하고, 찐빵을 먹기도 하고, 말없이 앉아있기도 한다. 지훈은 K가 다 울었다고 생각했을 때, 휴지를 가져다준다. K가 찡그린 채로 웃는다.
나는 내가 싫어. 나는 내가 싫어.
K가 코를 팽 푼다. 지훈이 돌돌 말린 휴지를 풀어서 쓰기 좋게 접어서 준다. 그래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아하기는 힘들지. K는 지훈을 보며 말한다. 누구나? 그럼 너도 너가 싫어?
나는 피아노 재수하기 위해 레슨비를 알바비로 벌어야했어. 아버지가 피아노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거든. 첫 해 실기 시험에서 알바하느라 힘쓰다가 팔에 이상이 와서 실기 시험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걸.
K는 울음이 다 멈췄는지 딸꾹질을 한다.
지훈이 넌지시 웃는다. K는 톡 쏘아보며, 내가 우니까 좋냐?
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우리? 그 속에는 Y도 있어.
둘은 또 말이 없다. 가을밤 둘은 찐빵을 먹으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낸다. K는 왜 Y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지훈에게 얘기한 걸까? 지훈은 그러나, 좋다고 생각한다. K가 드디어 자신에게 속마음을 말한다고 여긴다.
너는 할 말 없어?
K가 지훈을 보며 말한다. 지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너처럼 드라마틱한 기억이 없는데. 나는 어릴 때, 형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 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어느 날 형이 내 머리를 바리깡으로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만들어버린 적이 있었어. 엄마가 결국 나를 미용실에 데려가서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려야 했지. 그 기억이 떠오르네. 라고 말한다.
K와 지훈은 마지막 남은 만두를 서로 먹으라고 말한다. 둘은 그것을 반으로 나눠먹는다. K는 지훈이 그닥 위로를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섣부른 위로가 되려 울음 바다를 일으킬 것이다. 다소 쌀쌀했던 반응이 K의 이런 고백을 일상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러나, 지나가는 말로 들려지게 해주어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따져보면 지훈이 K와 Y와 함께 있을 때 했던 행동과 말들이 무심한 듯 하지만 모나지 않고 정중해서 둘은 편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K는 새삼 깨닫는다. K는 가게를 나오며 자신이 계산을 한다. 둘은 어정쩡하게 가게 앞에 서서 작별을 한다. K가 살며시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지훈이 살짝 손을 쥔다. 둘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K는 Y와 함께 걷고 있다. 목에는 보이그틀랜더가 걸려있다. 둘이 걸어가는 사이에 초겨울 바람이 쌩하고 지나간다. 걸어가며 둘은 사진을 찍는다. K가 Y가 웃고 있는 모습을 컬러로 찍고 있다. 둘은 사진을 찍어서 지훈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Y가 똑딱이로 찍는 사진은 주로 K가 보이그틀랜더 뷰파인더로 피사체를 렌즈에 담아낼 때이다. K의 얼굴은 보이그틀랜더와 함께 나온다. Y가 제대로 찍자고 해도 K는 좀체 카메라를 얼굴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두 사람이 걷는 곳은 주로 골목이다. 큰 거리를 걷다가 그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곳은 좁은 골목길에서 담장, 혹은 파란 대문, 혹은 전봇대 앞에서이다. 사진 속에 Y 얼굴은 환하다. Y는 항상 환하게 웃는다. K는 그런가하면 눈빛이 깊다. 일자로 다문 입술은 그 압도적인 눈빛에 지지 않을 만큼 꾹 다물고 있다. 둘은 똑딱이로 행인에게 함께 나온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치아를 보이며 웃는 Y와 한쪽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K가 프레임 안에서 정지해 있다. 둘 사이 빈 공간에 지훈이 서 있으면 딱 좋을 성 싶다.
너 카메라를 얼굴에서 떼는 순간을 내가 포착했지. 어때?
나는 내 얼굴 나온 사진 별로야. 나한테 카메라는 내 분신인데, 함께 나오면 더 좋을 것 같아. 그 사진은 보내지 말아.
K는 Y가 잘 포착한 사진을 뺏는다. 사진 속에 K는 마침 카메라를 양손에 쥐고 얼굴에서 비스듬히 내려놓고 있을 때이다. 시선이 정면은 아니지만, K의 무표정함이 잘 살아 있다. Y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지훈이 너 얼굴을 고스란히 보고 싶어할텐데, 왜?
너처럼 환하게 웃는 사진이 보고 싶지 내 얼굴이 뭐가 좋다고.
Y는 K가 지훈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결같다. 그렇다면 K는 Y와 지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 마음도 Y와 같다. K와 Y 사이에 지훈은 똑같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세 사람은 정삼각형을 이룬다. 어느 곳에 서 있던지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같은 변을 이루는 세 꼭지점을 지켜낸다. 세 사람은 하나이고, 셋 중에 어느 한 명이 빠지면 그것은 형태가 없어진다. 그냥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끝없는 길이 될 뿐이다. 지금, 그러나 둘 사이에 지훈이 없다. K와 Y는 지쳤다. 서로가 지훈에게 보내 줄 사진을 찍어주느라 기운을 다 쓴 탓도 있지만, 지훈이 둘 사이를 느슨하게 해주었던 그 편안함을 찾을 수 없다. 너무 많은 배려로 인해 K와 Y는 말이 없어진다.
탁자 위에는 인화한 사진들이 다 비슷해 보인다. 한 명은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한 명은 혼자 우두커니 서서 웃고 있다. 각각의 여자 인물은 그 사진 속에서 허전한 공간 연출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찍어 준 사진인데, 왜 저 정도밖에는 웃지 않았을까? 왜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진들 뿐 일까?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독사진 속 인물의 존재감이 떨어진다. 절대 베스트 포토제닉 상을 받을 수 없는 포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