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 H



                      H의 슬프고 어려운 산책 

    H는 결국 뛰쳐나왔다. 골목을 지나 그는 숨을 고르고 운동화를 제대로 신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길을 걸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 애써 변명했다. "산책이야, 그냥 산책. 평화로운 일상의 여유를 즐기는, 그런 무덤덤한 산책 같은 거." 
 H의 산책은 슬펐고, 어려웠다. H는 평온한 마음을 위해 아름다움이 필요했다. 눈앞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 노력했다. 쓰레기통 옆 민들레, 새 모양의 구름, 초록색 신호등, 찰랑거리는 머릿결, 버려진 캔 음료에 반사된 햇빛. 낙서로 더러워진 공책을 지우개로 지우듯. 그의 낙서는 J다.

    J가 빨간색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부터였다. H의 아버지는 어느 날 복통으로 간 병원에서 위암 말기를 진단받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가족이 으레 겪는 어떤 분노와 허무, 회환과 희망이 닿기도 전에 날아간 것이다. H의 가족, 그래봤자 H와 J는 비약적인 스토리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관을 안치하고 나서야 그 영화는 자신들의 삶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H와 J는 그렇게 조금씩, 조용히, 조각났다.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물건은 촌스러운 빨간 립스틱이었다. 간호사를 통해 전해 받은 싸구려 립스틱이 그가 J에게 남긴 유언이었던 것이다. 

    H는 세상을 알고 싶지 않은데 다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데리고 온 J, 아버지 죽음, J가 매일 새로운 남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것 뿐. 모두가 어쩔 수 없었고,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슬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그는 아직은 슬프고, 어려웠다. 아직은 그러고 싶었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걷고 있던 H는 갑자기 화가 났다. 그는 당장 무엇이라도 이기고 싶었다. H는 태양을 노려보았고, 새삼스럽게도 가을의 태양은 강했다. 그는 있는 힘껏 눈을 세게 감았다. 암흑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태양은 빨갛고, 강하고, 끈질겼다. H는 눈을 감은채로 걸었다. 무섭지 않았다. 보이는 것들이, 실재가 두려웠다. 자동차 엔진 소리,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새 소리, 아이 울음소리. 그 소음들의 접점에는 차가운 공백이 존재했다. H는 그 속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흡입 되었다. 푹신한 빨간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H는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는 그 소용돌이에서 몸을 잃었다. 얼굴만 남은 H는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J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몸을 뒤섞고 있었다. J는 찡그리지도 않은 채 신음소리를 냈고, 남자는 넥타이를 풀지도 않은 채 그녀의 몸을 애무하고 있었다. H는 있었지만 없었다. H는 분노하지도,궁금하지도,지루하지도,달관하지도 않았다. H는 벽장처럼 모든 것을 목격한 채 묵묵히 놓여 있었다. J와 남자는 절정인 듯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는 부르르 떨었다. J가 남자를 향해 비밀을 말하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곳은 지옥일까? 천국일까? 넌 알아?" 그녀는 말을 마치고 H를 바라보았다.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남자는 예약 알람이 설정 되어있는 것 마냥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바지로 가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J에게 주며 말했다. “열어봐. 선물이야.” J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리고 기대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열었다. J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그리고 잠깐 비웃었다가, 이내 무덤덤해졌다. H는 그 표정을 본적이 있다. 아, 언제였지.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당장 알아내지 않으면 큰 위험이 닥쳐올 것 마냥 그는 기억들을 게걸스럽게 헤집었다. 

    written by Black-bird

                                       집 

    어머니는 집을 떠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 적막해진 집을 처분하고 한적한 소도시로 이사를 했다. J는 집에 없었다. 선물은 그대로 나의 주머니 안에 깊숙이 들어있다. 작은 상자 속에 있는 것은 큐브이다. 아주 작은 큐브는 세밀하게 만들어져서 손톱을 이용해서 만지작거리면 부드럽게 조각이 맞춰진다. J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으로 이것을 맞춰나갈 것이다. J와 H는 가족이지만 피는 안 섞였기에 몸을 섞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나와 오직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그녀는 밤이 되면 내 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돌려세운 적이 없다. 그녀는 밤이 되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분홍색 책상 앞에 가서 앉는다. J를 위해 내가 마련한 책상이다. 그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매니큐어 손톱 손질 도구와 수많은 색깔의 매니큐어이다. 갈치의 짙은 은빛을 연상 시키는 매니큐어, 신부님의 긴 보라색 복식을 연상시키는 매니큐어, 달걀노른자를 깨뜨린 듯 한 매니큐어, 검은 타르를 연상시키는 매니큐어, 가장 이상한 매니큐어는 우윳빛 매니큐어이다. 나는 J가 이 우윳빛 매니큐어를 바를 때 심하게 욕망이 들끓는 것을 알겠다. 그것은 순수한 백치미를 떠올린다. 하얀 방을 떠올리기도 한다. 심하게 구역질이 나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에게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하얀색 방안에 있었다. 오직 수술 도구만이 은빛이었고, 그 밑에 깔린 어두운 녹색 천이 전부였다. 나는 아랫도리가 벗겨져있다. 내 나이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이곳에 왔다. 엄마는 포경선이 떴다며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나는 포경선이 왜 떴는지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눈을 나에게 고정시키고 애매한 미소를 짓더니, 너의 고래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무슨 암호 같기는 했는데, 고래라고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뱃멀미가 날 것 같았다. 시술은 금방 끝났다. 짧은 마취와 아랫도리의 미묘한 느낌이 전부였다. 그러나 마취가 풀리고 나서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나는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J에게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녀를 그냥 둔다. 그녀는 대신 매번 다른 색상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그 손으로 내 앞에서 밥을 먹고, 내 앞에서 대화를 하며 손을 까닥거릴 것이다. 그녀는 내게 하나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색깔로. 그녀는 색깔을 계속해서 변화시킴으로써 나를 조정한다. 나는 밥을 먹으며 그녀의 손톱을 바라보며 입맛을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좋다. 그녀의 손톱은 내게 자극제이다. 나는 우윳빛 색깔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하얀 옷을 입은 그녀가 내 앞에서 대화를 하기를 바란다. 그 날이면 아마 나는 밤마다 문을 나서는 그녀를 돌려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볼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상상하며 내 주머니 안의 큐브를 만지작거린다.

    written by kitty99

                                     오로라

    J는 아까부터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벗자 하얀 색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은 그녀가 서 있다. 방 앞에 걸린 발 너머로 그녀의 몸이 드러난다. 하얀 색 브래지어 앞에 손을 얹자 그녀의 보라색 매니큐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밤마다 나가기 전에 속옷을 점검한다. 그리고 새로운 색상의 매니큐어를 바른다. 하얀색과 보라색이라. 나는 갑자기 북반구의 오로라가 떠오른다. 하얀 설원 위에 부드러운 보라색 스카프가 드리워진 것 같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그 스카프가 그녀의 손톱 위에 있다. 나는 말한다. ‘보라색이네’ J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퍼플 이라고 해야지’ 라며 나무란다. 그녀는 하얀 색 속옷에 어울리는 스타킹을 찾아본다. 회색 스타킹인데 잔잔한 펄감이 있다. 그녀는 서서 그것 안에 발을 집어넣더니 천천히 종아리를 거쳐, 튀어나온 무릎을 지나, 살찐 허벅지에 다다른다. 왼쪽 다리로 서서, J가 돌아본다. ‘계속 거기에 서 있을 거야?’ 나는 무심히 지나친다. 커피 잔의 커피가 살짝 흐른다. 

    아홉시에서 열시 사이에 J는 항상 치장을 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그녀가 나갈 때, 훅 차가운 바람을 타고 그녀가 뿌린 만다린 향이 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향수는 그녀가 항상 뿌리는 향이다. 그녀는 도발적으로 보이는 치장을 굽 낮은 구두 속에 숨겨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외모에는 악센트가 있다. 손톱과 다리, 그리고 그녀의 무거운 입술에 칠한 빨간색 립스틱. 그녀의 빨강은 죽은 빨강이다. 그녀의 입술은 보라색 손톱과 비슷한 톤으로 어둡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죽은 빨강 입술은 활시위처럼 강약을 갖고 파르르 떨린다. 밖으로 나가며 내게 오더니 핑그르르 한 바퀴 돈다. 다리에 감겨 진 회색빛 펄이 불빛 나는 팽이처럼 눈을 부시게 한다. 오늘따라 그녀는 오로라처럼 더욱 빛난다. 나는 한 쪽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큐브를 손에 쥔다. ‘나 간다.’ J는 한참동안 치장을 마치고 언제나 내 앞에서 눈도장을 찍는다. 나는 큐브만 손에 꼭 쥐고 있다.

    J의 구두는 항상 낮다. 그녀는 자신의 발이 높은 힐 안에서 고통 받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블랙 단화를 신고 소리 없이 문 밖을 나선다. 사뿐히 밟고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혼자 상상한다. 그녀의 날렵한 종아리는 항상 계단을 걷기 때문에 잡혀진 곡선이다. 발끝으로 가볍게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그녀의 다리는 낮은 굽의 단화 덕분에 발레리나처럼 육감적이다. 그녀의 단화를 거쳐, 보드라운 스타킹을 지나 그 안에 있는 것은 내가 상상해 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녀가 내게 건네주지 않는 단 한 가지 비밀이 그것이 아닐까. 나는 그 비밀을 조심스레 더듬어보고 싶지만, 손 안의 큐브에 의식을 둔다.

    자정이 지났다. 내 방 책상 위에 커피가 식어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이런 나 자신을 J는 즐기는 것 같다. 내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을 청하면, 그녀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잠결에 그녀의 낌새를 알아채지만, 나는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그대로 누워있다. 내가 잠을 자는 시간은 그러니까 새벽 4시에서 아침 9시 정도까지이다. 종종 그녀가 나를 단련시키는 것 같다. 나의 욕망을 말이다. 나의 욕망은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유령처럼 배회한다. 나는 오직 내 숨소리에 의지해 그 시간을 버틴다. 이런 나 자신을 타일러본다. 잠을 청하자. 잠을 청하자. J는 내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동안 조용히 집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나는 스르르 잠이 든다. 또 밤이 지나간다.

    written by kitty99



                                 우윳빛

    J는 우윳빛 매니큐어를 들고서는 주방으로 간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뒤쫓는다. 그녀는 매니큐어 뚜껑을 열더니, 하얀 액체를 개수대에 따라버린다. 그녀는 울고 있다. 나는 그녀가 왜 우는지 모른다. 나는 왜 내가 그녀와 동거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버려진 하얀 액체를 손으로 문지른다. 그녀의 손바닥이 끈적이는 우윳빛 매니큐어로 덮였다. 그녀는 울면서 계속 문지른다. 나는 다가간다.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그녀가 눈물짓던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가 울고 있다. 나는 어쩔 줄 모른다. 아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준다. 그녀가 끈적이는 손으로 내 허리를 쥐어 잡는다. 그녀의 눈물로 내 가슴이 적셔진다. 

    J는 더 이상 밤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그 날, 우윳빛 매니큐어 속에서 함께 멘붕이 되었다. J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고, 나는 웃으며 계속 그녀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웃었지만, 그녀는 울었다. 그런 희비의 교차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안았다. 세상은 참 이상하다. 그녀를 항상 예의 바르게 대했던 나였는데, 나는 우윳빛 매니큐어를 버리는 J를 보고 처음으로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우윳빛 속에서 섞였다. 

   J는 더 이상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는다. 그녀는 말간 손톱으로 내가 준 작은 큐브를 풀었다가 맞췄다가 한다. 그리고 나를 보고 씽긋 웃어준다. 나는 한 쪽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넌지시 쳐다본다. 그녀의 분홍색 책상 위에는 매니큐어 대신에 뜨개질이 가득하다. 그녀는 따뜻한 솜털실로 목도리, 조끼, 가디건, 장갑, 모자를 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색상의 털실들로 책상 위를 뒤덮는다. 끈적였던 매니큐어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실은 그녀의 건강한 손톱 아래에서 하나씩 완성된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J와 함께 산책을 한다. 그녀가 뜬 옷을 입고 산책을 나섰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걷는다. 내 눈으로 비치는 태양은 여전히 따갑지만,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부드러운 선을 이으며 나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는 함께 자랐고, 동거를 했고, 섞였고, 이제는 행복이다. 나와 J의 산책은 매일 매일 새롭다. 내 손에는 촌스러운 빨간 립스틱이 쥐어져있다. 우리는 그것을 꺼내서 땅에 하트를 그린다. J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까르르 웃는다. 아버지가 준 마지막 유품이 J와 나를 두근두근하게 했다. 아버지의 유품을 우리는 땅에 다 바르고 나서, J와 나는 그 하트 속에 들어가 꼭 안아본다. 둘 다 따스한 솜털 옷을 입고, 마주보며 웃어준다. 그들이 H와 J이다.

    witten by kitty99 


  이 단편은 2015년 핵노답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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