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색 머릿결이 출렁인다. 천천히 발 끝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녀. 9센티미터 굽의 분홍색 구두를 신은 그녀. 피곤하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가 산 가방을 두고 된장녀라도 되냐고 버럭 화를 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그의 말을 핸드폰 너머에서 들어줘야 했다. 분명 남자 친구는 언젠가 너에게 근사한 핸드백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설마 그 기억을 잊은 건가? 남자 친구의 화풀이를 다 듣고 나서 그녀는 딱 한 마디 했다. ‘헤어져!’

 

그녀는 Red이다. 그녀는 불길에 뜨겁게 달군 흙덩이처럼 열정적이다. 그녀의 긴 생머리, 그 까만 생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를 하고 9센티미터 굽의 힐을 신으면 남자들은 그녀를 쳐다보기 바쁘다. 그녀는 그 빨갛고 도톰한 입술에서 말을 꺼내기 힘들어한다. 그녀가 하는 표현은 그녀의 메이크업과 그녀의 패션 스타일이다. 그녀는 아쉽지만... 콧소리를 내는 애교가 없다. 그녀는 오히려 논리적이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화를 내면, 따박따박 말을 붙히기 보다 다 듣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그러면 남자친구는 넌 왜 말대꾸를 하냐며 또 성을 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전포고는 미안하다이거나 헤어져이다. 이 두 개의 마지막 카드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렸다.

 

오늘 그녀는 남자친구가 된장녀라고 한 말에 심히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말을 자신에게 쉽게 내뱉을 수 있을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 친구를 사랑하지만, 남자 친구의 궤변에는 골치를 썩였다. 남자 친구는 그녀가 말을 안 하고 듣고 있으면, 머리 굴리지 말라며 대답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는 그 빨간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이 얼마나 과묵한지 모른다. 그녀는 생각을 한다. 왜 그녀의 출렁이는 긴 생머리와 빨간 립스틱과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에서 마치 그녀가 빈 깡통일 거라고 느끼는 걸까? 그렇게 느끼는 남자가 그녀의 남자 친구라니. 그녀는 어의가 없다. 그동안 그녀는 미안하다라고 말했지만, 이번 카드 만큼은 절대 뒤집힐 수 없었다. 그녀는 헤어져라고 말하고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천천히 회색 스타킹을 벗는다. 해가 저물녘에 그녀의 다리는 조금 부어있다. 외출복을 모두 벗고, 샤워를 한다. 따뜻한 샤워기 물을 그녀의 몸에 적셔준다. 그녀는 이제 헤어졌으니 한동안 자신의 몸을 애무해 줄 남자가 없다는 것에 한숨을 폭 쉰다. 그녀의 열정은 그녀의 몸이 말해준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몸을 섞을 때 그 기쁨을 잊지 않는다. 그를 위해 새 옷을 장만하고, 새로운 화장술을 익히고, 그를 위해 맛있는 요리도 했다. 그것이 여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녀는 그 모든 행위를 기쁘고 행복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했다. 그와의 시간이 그녀의 존재를 더 아름답게 해준다고 여겼다. 바디 샤워 거품을 몸에 문지르며,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달리 한다. 그것은 기쁨조였구나라고. 그것은 그녀의 참 행복이 아니었구나라고. 그녀는 자신을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와의 시간이 된장녀라는 말 한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진 것을 그녀는 인정해야했다. 그녀는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녀 안과 밖을 모두 사랑해 줄, 그리고 인정하고 지지해 줄 누군가를 원한다. 짙은 자주색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훔치며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그는 그녀를 진정 아껴줄 그 누군가가 아니었구나. 그런데 그녀는 왜 우는 것일까?

 

밝은 브라운 색상의 책장 옆에 있는 그녀의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녀는 벌거벗고 있다. 아직도 눈물이 흐른다. 회한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아직도 상해서 일까? 그녀는 눈물이 저절로 멈출 때까지 그냥 둔다. 이 침대에서 그와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몸을 탐닉했는데, 어째서 그 시간동안 그녀의 진정한 자아를 그는 몰라줄 수 있지? 그녀는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신의 몸을 알아주는 그가 좋았다. 그녀의 몸을 탐하는 그가 좋았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는 그를 위해 변신에 변신을 반복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는 좀 더 다양한 패션 감각을 익혔고, 나름 씀씀이가 많아졌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된장녀그 말에서 그가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그 시선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눈물이 다 마르자, 그녀는 일어나서 몸에 바디 로션을 정성껏 바른다. 다소 곳게 뻗은 그녀의 목선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조금 각이 있어 보이는 어깨를 따라 기다란 팔뚝을 향해 로션을 듬뿍 발라준다. 그녀의 가슴은 빈약하지만, 그것을 대신해 줄 짙은 색의 젖꼭지가 오똑 서있다. 그곳에도 로션을 듬뿍 발라준다. 가슴 아래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뱃살에도 장미향이 나는 그 로션을 바른다. 그리고 그녀의 튼튼한 두 허벅지에도 미끄덩거리는 로션을 바른다. 허벅지 위에 둥그스름한 그녀의 둔부를 쥐었다 놓는다. 그녀는 그녀의 몸을 열심히 애무해준다. 이제는 그녀의 몸을 그녀가 아껴줘야 한다. 그녀는 발목까지 장미향의 로션을 바른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새로운 의식이 된 듯하다. 그녀의 몸을 구석 구석 애무하기.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가벼운 산책을 할 요량으로 스포츠 웨어를 입는다. 그리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는다. 문을 열고 나온다. 백팩을 맸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와서 시내로 걷기 시작한다. 곧 겨울이 온다. 쌀쌀한 바람이 콧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의 걸음을 빠르지만 힘든 줄 모른다. 오히려 그 움직임 속에서 그녀는 해방된다. 그녀가 가진 자신의 몸이 얼마나 고마운지 느낀다. 그녀는 팔, 다리가 자유롭고, 잘 걷고, 숨 쉬고, 느낀다. 홀로 있음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새삼 깨닫는다. 얇은 운동화 바닥을 통해 딱딱한 땅을 치고 올라오는 그 기운을 느낀다. 그녀는 건강하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느낀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이 정해졌다. 오랜만에 그녀가 서점으로 향한다.

 

12시까지 하는 서점은 딱 그 곳 한 군데 밖에 없다. 그녀가 그 곳에 간 지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다. 그녀는 한동안 책을 멀리했다. 그녀는 된장녀가 아니다 그녀는 한 때 문학을 사랑했다. 그녀는 서점에 가서 문학 코너를 찬찬히 살펴볼 생각이다. 문학. 그녀는 고교시절에 문학 소녀였다. 그녀의 과묵함은 문학을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만들어진 인성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의 내면은 그녀의 외면 못지 않게 피어오를 수 있다. 그녀는 생각이 있는 여성이다. 된장녀. 그녀는 생각한다. ? 된장이란 말이지. 그 구수한 된장이 얼마나 맛있는데. 된장으로 끓인 국과 찌개를 생각하자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좋아. 나 된장녀 될래. 나는 된장녀이고, 된장녀를 맛있게 끓일 수 있는 능력있는 남자를 만날래. 그녀는 웃는다. 저 멀리서 높은 빌딩이 빛을 낸다. S서점이다. 그곳에 가서 그녀는 된장처럼 숙성된 책을 찾을 것이다. 그녀의 진짜 모습은 빨간 립스틱과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 아래에도 있지만, 이렇게 쌩얼에 가벼운 차림으로 서점을 향하는 모습에도 있다.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가슴이 뛴다. 그녀가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그녀는 서점 문을 활짝 열고 한 발 들어선다. 그녀의 시선이 똑바르다. 그녀가 보고자 하는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처럼. 그녀는 눈물을 흘렸던 그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곳이 그녀가 갈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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