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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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생존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의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이기심을 비난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평온한 환경에서 알던 착한 모습과는 다른 결정을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도 과거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우선하느라 타인을 생각하지 않을테니까.


수잰 레드펀의 <한순간에>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민낯, 그리고 그 이후 '선하지 못했던' 행동에 대한 책임과 치유의 과정을 그렸다. 우리 주변에 늘상 벌어지는 일이지만 깊숙히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분명히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를 제대로 짚어 냈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다.



활화산처럼 5분만 같이 있어도 폭발할 것 같은 가족이 사흘간의 '단합여행'을 떠난다. 열여섯살 고등학생인 주인공 핀의 가족은 친척처럼 가까운 이웃 캐럴 이모 부부와 그들의 딸 내털리, 핀의 단짝친구 모와 캠핑카를 타고 캘리포니아 북부 스키장이 있는 산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의 들뜬 여행은 눈보라 속 도로 위에서 마주친 수사슴과 함께 갑작스레 마감된다. 툭. 툭. 툭. 마치 바늘땀이 뜯어지듯 강철 가드레일은 무너지고, 캠핑카는 미사일처럼 산과 나무와 눈을 뚫으며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작은 날숨을 마지막으로 핀은 자신이 차 밖에 있음을 알아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하지만, 그런 기분은 아주 잠시뿐이다. 나는 죽었다. 충격적이지만 아주 자연스럽다."


조수석 처참한 자신의 주검을 뒤로하고 핀은 깊은 슬픔에 빠진 채로 남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크고 작은 부상에 신음하고 배고픔과 추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살아남은 이들의 모습은 핀을 괴롭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광경을 더 이상 목격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가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빌고 또 빌어본다.



이제 <한순간에>는 핀의 영혼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려진다. 오로지 자신의 가족만 생각하는 캐런 이모 일행, 나이에 맞지 않게 타인을 배려하며 위기를 견뎌내려는 모의 희생, 모든 상황을 통제하면서 구조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엄마, 자신의 부상을 숨기면서까지 묵묵히 타인을 돕는 마을 청년 카일. 


어제까지 핀이 알던 '좋은 사람'은 이제 없다. 그 사실 자체가 슬프고 두렵다. 책을 찢어 태워 눈을 녹여 만든 물을 모로부터 받아 마시는 캐런 이모에게 핀은 분노라는 감정을 느낀다. 왜 어린 모가 힘겹게 만들어낸 물을 멀쩡한 몸으로 먼저 마시는지. 캐런 이모의 남편 밥이 동생 오즈를 속여 빼앗은 두꺼운 장갑은 이제 태연하게 내털리의 손에 끼여 있다. 엄마와 카일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가족은 구조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한순간에>는 재난 자체에 앵글이 맞춰져 있지 않다. 오히려 사고 그 이후, 남은 이들이 치러야할 대가에 시선이 쏠린다. '가시나무로 뜬 담요를 덮은 것처럼' 사고로 인한 상처투성이의 후유증은 생존자들의 인생에 습관처럼 자리를 잡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절박한 감정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형되어 간다. 


바로 '후회'라는 단어다. 살아 남은 이들의 양심은 끊임없이 아우성을 치고, 그들의 뇌에서는 '했어야 할 일'과 '했으면 좋았을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때로는 자신을 학대하고, 때로는 타인을 비난한다. 그러면서 참회하고 회복한다. 서로 애증의 어깨를 기대면서. 어느듯 상처를 보듬을 수 있을 즈음 모와 핀의 영혼은 그날의 사고를 다시 종합하고 정리한다.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완전한 극복을 위해 그들은 진실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풍족할 때는 누구나 관대할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누구든 이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엄마는 맨손으로 캠핑카의 창문을 막았다. 죽은 딸의 옷을 벗겨서 단 한 겹도 자기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용감하게 자기 아들과 남편을 내버려 두고 구조를 요청하러 떠났다. 캐런이 캠핑카 뒤쪽에서 내털리와 내내 앉아만 있는 동안.두려움은 변명이 될 수 없다."


포춘 쿠키에나 나올 것 같은 아빠의 바보같은 철학은 엄마를 비롯한 핀의 가족을 버티게 해줬다. '모든 여행은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두려움이 우릴 멈추게 만든다. 우릴 전진하게 만드는 것은 용기다.' 손가락, 발가락 몇 개가 동생과 함께 사라졌고 악몽같은 기억은 가슴 한 켠 아직 남아있지만 핀의 가족과 모는 다시 태어난 듯 행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저자는 "끔찍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진짜 이야기는 그 사고가 발생한 이후, 그 재앙의 여파 속에서 일어난다. 그 참사의 생존자들이 했던 선택의 결과가 그들을 괴롭히러 다시 되돌아오는 시기부터"라며 "언제나 후회란 마음 속에 지니고 살기에 가장 힘든 감정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후회란 감정도 양심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뭔가 잘못을 저지른 후에, 양심이 없는 가장 나쁜 사람이 가장 적게 고통받게 되는 불공평한 모순은 '한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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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심리학으로 말하다 1
얀-빌헬름 반 프로이엔 지음, 신영경 옮김 / 돌배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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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택시 기사 제리 플레쳐는 많은 신문을 들여다보고 각각의 뉴스를 열심히 분석, 재구성해 자신만의 음모론을 만들어낸다. 손님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믿게끔 만드는 일에 큰 재미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제리의 추론 중 하나가 실제 음모와 맞아 떨어지면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모튼 하켓(Morten Harket)의 'Can't Take My Eyes Off You'가 잘 어울렸던 영화 멜 깁슨 주연의 '컨스피러시(conspiracy)'다.


우리가 음모론에 끌리는 것은 '그럴듯하기 때문'이며, 그 이면에는 본질에 관한 부족한 정보와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얀 빌헬름 반 프로이엔의 <음모론>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음모론을 바라보고, 음모론을 대하는 사람들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음모론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에 시선을 두기보다는 '누가 믿고 누가 믿지 않을까' 또는 '어떤 상황에서 더 믿을까',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라는 질문에 기초한다. 음모론 뒤에 숨겨진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음모론>에서 '모든 음모론은 비슷하고 인식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심리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개인 차원에서 음모론을 가정하는 유형-나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동료들의 모의, 나를 게임에서 지게 하려는 상대편과 심판의 공모 등 과학계에서 '피해 망상'으로 분류되는 경우-보다 사회집단 차원에서 풀이했다.


책은 '음모론과 심리학', '사람들은 언제 음모론을 믿는가', '믿음의 구조', '음모론의 사회적 뿌리', '음모론과 이념', '음모론 줄이기' 등 6개 장으로 구성됐다. 음모론의 정의, 음모론이 힘을 발휘하는 상황, 음모론과 다른 믿음의 차이와 공통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음모론의 근거, 정치적 배경의 음모론과 신뢰 성향, 그리고 음모론에 의한 폐해를 막기 위한 수단 등 저자의 연구가 담겨있다.


'비합법적이거나 악의적이라고 인식되는 숨겨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행위자가 비밀리에 합의하여 협력하고 있다는 믿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존재해온 음모론에 대한 정의다. 


저자는 음모론을 더욱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패턴, 행위자, 연합, 적대감, 비밀 유지 등 다섯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가운데서도 다른 형태의 믿음과 구별되는 음모론이 가진 핵심 요소는 '적대적이고 비밀스러운 행위자 집단'의 존재 여부다. 이를테면 '세계를 지배하려는 한 집단이 비밀 연구소에서 한 나라와 결탁해 생화학 무기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이 치즈'라는 식이 되겠다.


9.11 테러, 2020 도쿄올림픽 실패, 우한 코로나 발생 등을 예언하고 있다는 '일루미나티 카드'. '하나된 세상'을 꿈꾸며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프리메이슨' 등 저자가 말한 요소에 들어맞는 음모론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다. 저자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생산한 무수한 루머, 9.11테러를 둘러싼 의혹, 영국의 브렉시트 탈퇴 등을 음모론의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음모론은 양극화된 정치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이념이 다른 집단들은 반대 집단을 적으로 그려낸다."


강력한 통신 기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거에 비해 음모론에 쉽게 노출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광우병 파동' 당시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가 숭숭 뚫린다'는 명쾌한(?) 저주는 방송과 인터넷을 타고 전국민을 공포로 불어 넣었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을 했던 사람들이 자녀를 미국 유학 보냈다거나, 미국산 소고기가 주원료인 버거를 먹는 장면을 자랑하는 등 희한한 행태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기도 했지만.


모바일 시대 이러한 불안은 더욱 크다. 특히 과거에 비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더욱 빠르고 쉽게 접하고 있기에 '음모론'의 확산과 소비역시 같은 속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음모론>에서 전파되는 속도가 증가한다고 해서 음모론을 믿는 사람의 비율도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어차피 퍼져나가야할 음모론은 속도와 무관하게 전파됐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음모론에 대한 신뢰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상태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음모론'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눈길을 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극단주의는 흔히 의회에서 포퓰리즘의 형태로 나타나며, 음모론이 극단주의나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는 대목이다. 그만큼 미디어를 장악한 세력에서 생산된 음모론은 더 강력하며, 그만큼 더 위험하다.


포퓰리스트가 제시하는 '이것이 사실이다'는 주장은 복잡한 사회 문제에 대해 단순한 해결책처럼 비쳐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명료함을 가장한 행태에 대해 경계해야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가 품어왔던 음모론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취창업이 어려운 청년에게 현금을, 코로나로 힘든 소상공인에게도 현금을, 경제활동에서 은퇴한 노년층에게도 현금을!" 근원적이고 난해한 대책보다 간단 명료하며 뿌리치기 힘든 유혹은 음모론만큼이나 위험할 것이라고 <음모론>은 경고한다.(*)


*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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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센스 노벨
스티븐 리콕 지음, 허선영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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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헛웃음이 읽는 내내 터져 나온다. 잉글랜드 출신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한 유머 작가 스티븐 리콕의 단편소설 <난센스 노벨>은 각박한 현실을 너무나 쉽고 재미있게 풍자한 작품이다. 모든 단편은 마치 잘 짜여진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듯하다. 어쩌면 책 표지 그림에 표현된 것처럼 서커스 공연을 즐기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난센스 노벨>은 여덟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됐다. 각 편의 제목과 부제부터 '난센스'라는 점을 기억하며 읽다보면 유머 작가의 의도와 편안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여기 해초에 묻히다(광활한 바다 위 대혼란)', '넝마를 걸친 영웅(히스가야 헤이로프트의 고군분투 생존기)', '어느 순진한 여인의 슬픔(마리 머시너프의 회고록)', '무너진 장벽(푸른 섬에서 싹튼 위험한 사랑)', '하일랜드 아가씨 해나와 오처라처티 호수의 지주', '누가 범인일까?(미궁의 살인사건)', '캐롤라인과 불사조 아기의 크리스마스', '석면 옷을 입은 사나이' 등 주인공도, 배경도 모두 다른 기묘한 이야기가 펼쳐 진다.


<난센스 노벨>의 유머는 첫 편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커다란 구레나룻, 무성한 턱수염과 두꺼운 콧수염만 빼면 깔끔히 면도한 얼굴'을 가진 선장'과 항해사 블로우하드의 보물을 향한 항해가 시작되지만 선원들의 연쇄 실종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혼란에 빠져든다.



기술도 능력도 없는 한 청년의 뉴욕 생존기를 그린 '넝마를 걸친 영웅'. 일자리를 구하던 그에게 벽돌공은 벽돌을 던지고, 길을 묻는 그에게 경찰은 옆통수를 후려친다. 심지어 말도 꺼내기 전에 귀를 물어뜯는 성직자까지 만나게 되고. 일자리를 향해 온 몸을 던지는 무모한 히스가야 헤이로프트가 마침내 비정함과 지독함으로 가득한 뉴욕에서 자리잡는 과정이 괴이하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모르겠다'. 결혼을 앞둔 한 처녀가 벌이는 너무나 철없는 애정 행각을 다룬 이야기 '순진한 여인의 슬픔', 여객선의 침몰로 만난 한 여인과 무인도 생활을 시작하는 '무너진 장벽', 그리고 원한관계에 놓인 스코틀랜드의 두 가문이 등장하는 '하일랜드 아가씨 해나와 오처라처티 호수의 지주' 등은 각 편의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사랑과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익숙한 대사가 등장하는 '캐롤라인과 불사조 아기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간난아기를 안은 여인을 집으로 받아들인 부부의 사연은 인물간 기막힌 연결과 의외의 결말로 큰 재미를 준다. 오래된 농장을 잃어버릴 위기에서 벗어난 남편이 아들들에게 새로운 인생관을 설파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자, 아들들아. 이제부터는 우리는 가늘고 길게 살자꾸나. 좋은 책에 이르기를 '직선은 양 극점 사이에 반듯하게 놓인 선이다'라고 하더구나." 그가 말하는 '좋은 책'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이다.



마지막편은 <난센스 노벨>의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느낌을 준다. 굉음을 내는 기계와 노동자 계층의 끊임없는 노역, 계층 간의 갈등, 빈곤 문제, 전쟁, 잔학 행위가 만연한 오늘날의 세상을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는 작가는 먼 미래 다시 깨어나는 꿈을 꾼다. 마침내 '자연의 위대한 정복 시대'를 찾은 작가는 인간과 기계가 자연에게 승리를 거둔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오래전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값어치를 다시 생각한다.


여덟 편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난센스 노벨>은 거침없는 설정, 더 거침없는 인물, 더더욱 거침없는 전개 속에 당황스러울 만큼 유머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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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 -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 현대지성 클래식 33
토머스 모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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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인물 라파엘 히틀로다이오가 말하고, 영국의 유명한 도시 런던의 시민이자 사법집행관 대리인 고명한 토머스 모어가 기록한 최상의 공화국 형태의 관한 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6세기 시대상을 배경으로 탄생한 '이상적인 공화국'에 대한 기록이다. 유토피아를 경험한 라파엘의 설명을 모어가 기록한 형태로 허구를 실제로 착각하게 하고, 미지의 섬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준다.


화자로 등장한 라파엘 히틀로다이오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도 안되는 것, 시덥잖은 것'을 뜻하는 '휘틀로스'와 '나누어 주다'를 뜻하는 '다이오'를 합성한 말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 라파엘이 모어를 통해 들려주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믿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는 풍자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책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완벽한 공화정이 실시되고, 모든 국민의 완전한 행복과 쾌락이 실현되는 섬, '유토피아'를 향한 인류의 꿈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토머스 모어가 당시 주요 위정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 라파엘과의 만남, 유토피아에 대한 라파엘의 설명, 그리고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 대한 학자들의 평론과 칭송이 포함된 서신으로 구성돼있다. 실제 인물들 사이에 오간 편지는 '유토피아'와 '라파엘'이 실존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에서 '아니다, 없다'를 뜻하는 '우',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가 합해져 만든 이름으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이름이지만 말이다.


라파엘이 말하는 유토피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유재산을 인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유재산이 없으니 모든 시민은 공동의 재산을 함께 누리게 된다. 그들의 집은 현재의 무상 공공임대주택과도 비슷하며, 직업은 근로의 의무이자 권리로 철저히 지켜진다. 노약자나 장애인을 위한 기본 소득 등 복지 정책도 시민들의 합의 하에 원만히 실시되는 유토피아.


"사유재산이 존재해서 돈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곳에서는 정의롭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 악한 자들이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는 곳에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것을 극소수가 나누어 갖고, 대다수 사람은 궁핍하고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곳에 행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라파엘의 지적은 옳다.



토머스 모어의 기록한 유토피아라는 섬이 보여주는 도시, 관리, 직업, 가족, 종교, 전쟁, 양육, 학문 등 모든 형태에서 놀라운 평등사회를 그리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때론 전체주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1516년 출간된 <유토피아>는 사적 이익이 아닌 공공 이익을 지향하는 공화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준다.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상국가를 향한 꿈이 책에 집약돼있다.


유토피아의 결혼제도는 흥미롭다. 강력한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의 배우자가 죽은 때를 제외하고는 결혼관계를 끝내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정도로 아주 엄격하게 시행된다. 다만 간통했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학대가 있었다면 이혼이 허용된다. 특히 이혼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새 배우자와 재혼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유책 배우자는 망신을 당하고 평생 재혼할 수 없으며, 간통을 저지른 자들은 가장 낮은 노예신분으로 강등돼 힘들고 가혹한 일을 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유토피아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요즘 시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합법을 가장해 이런 저런 명목으로 도둑질하고 누군가를 압박해서 우려먹고 갑자기 공격하여 강탈하고 있다. 어떤 때는 법률의 은밀한 비호를 받으면서, 어떤 때는 법률의 직접적인 승인아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누군가에게서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든다."


법을 잘 아는 자들, 스스로가 정의와 공평의 수호자라는 견고한 생각을 갖고 '사기 치는' 공화국은 시민들에게 '배은망덕한 나라'일 뿐일 것이다. 프랑스 인문주의자 기욤 뷔테의 지적대로 끊임없이 분쟁을 조장하고 정의를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정의롭지 못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는 자들이 득세한 공화국역시 '가짜'일 뿐일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가장 오완벽한 공화국, 그곳에서 말하는 '정의'에 집중하게 한다.


라틴어 시인 코르넬리우스 데 슈레이버가 남긴 시는 <유토피아>를 읽어야할 이유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비참한 세계가 얼마나 헛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에서 나온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읽고 줄 치고 마음에 담아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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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도노 하루카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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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는 한 남자가 별 다른 이유없이 파국에 이른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도노 하루카(遠野遙)의 <파국(破局)>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지나칠 정도의 짧은 문체,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듯한 대사, 그저 보이는 대로의 묘사 등이 그렇다.


도노 하루카의 <파국>은 주인공 캐릭터가 전부다. 고교 럭비 동아리 출신의 요스케. 대학에 가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한편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착실한 남자다. 심장과 근육이 터져버릴 지경까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한 덕분에 건장한 체격과 체력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요스케는 모든 면에서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 혹은 아버지가 알려 주신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 그럴까'보다 '그래선 안된다', '이래야 한다'는 잣대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파국>에 등장하는 요스케는 마치 인간 보통의 감정이 없는 듯 표현된다.


"그 기분 나쁜 여자는 잘 살펴보니 얼굴이 예뻤다."


친구의 마지막 공연장에서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한 여성을 마주친 요스케. 자신의 기분보다 눈에 들어오는 실체로 즉시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그렇다고 해서 반사회성을 지닌 소시오패스와는 성격이 다르다. 요스케는 충실히 사회에 기여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길을 걷는 어린아이, TV뉴스 속 등장인물, 전철에서 만난 취객 등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요스케의 시선은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 있는 그녀를 보는 건 당연해도, 그 반대에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으로 볼과 턱을 만져보고 앞머리의 상태를 점검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이런 식이다. 요스케는 머릿속 복잡한 생각에 젖어들더라도 곧바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다. 고생하는 학교 경비원을 향해 오늘 그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다가도 '의미 없는 행위'라고 정리해버린다.



요스케가 자신의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새 여자친구 아카리와의 첫 여행에서 잘 드러난다. 갑자기 내린 비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카리를 위해 요스케는 음료 자판기로 향한다. 그러나 따뜻한 음료를 찾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웠던 요스케. 갑자기 눈물이 터져 흐른다.


"어쩐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 음료를 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인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이상하다." 


요스케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본다.


"어쩌면 내가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전부터 슬펐던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건 즉, 나는 슬픈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유를 찾지 못했으므로 감정은 틀렸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래서인지 일본소설 <파국>에 '좀비 예찬'이 등장한다. 럭비 후배를 단련시키던 요스케는 더욱 강한 선수를 위해 이렇게 독려한다. "모두 좀비가 되어야 해. 지금부터 너희들은 좀비다. 좀비처럼 끝까지 다시 일어서야 이길 수 있다. 좀비니까 몇 번이든 다시 일어나는 건 당연하고, 통증이나 피로도 느끼지 않지. 공포도 사라져. 좀비는 무섭다는 감정이 없으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좀비를 무서워하지."


도노 하루카가 그린 요스케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리 자신역시 누군가 정해놓은 질서에 갇혀 파국을 향해 그냥 달려가는 좀비와 같을 수도 있고.(*)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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