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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네시
수잔나 클라크 지음, 김해온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수 많은 홀과 벽, 계단이 연결된 커다란 집이 있다. 아래 홀은 조수가 넘나들고 크고 작은 조각상은 홀 마다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세상을 옮겨놓은 듯 저마다의 특징을 지닌 조각상은 사람과 동물,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수재나 클라크의 <피라네시>에서 '나'는 이 집에 살고 있다.
<피라네시>는 '나'의 기록이다. 현실과 다른 세계, 즉 '집'이라고 표현되는 공간에서 지식과 법칙을 찾아 여행하는 '나'의 일지가 중심이다. 1999년, 2018년 10월이 아니라 '앨버트로스가 남서쪽 홀에 온 해 다섯째 달의 열째 날'과 같은 방식의 이상한 시간 개념과 도무지 그리기조차 힘든 구조의 복잡한 공간 개념은 책 초반 혼란스럽다.

하지만 자기 의지에 기인한 것이든, 타인의 세뇌나 속박에 의한 것이든 미궁에 살고 있는 '나'의 기록과 일지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읽는이로 하여금 <피라네시>의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게 한다. 피라네시와 함께 과거와 숫자보다 현재의 탐구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과거의 기억을 잊은 채 '집'에 살고 있다.
"나는 집이 사랑하는 자녀다. 나는 피라네시다." 신념을 갖고 있던 '나'를 무너뜨린 하나의 질문 "당신은 매슈 로즈 소런슨인가요?". 고대의 지혜, 자연과 세계가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시 되찾기 위해 창조된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 우리를 감싸고 있던 시간과 장소와도 흡사하게 여겨진다.
책 속에서 '나'는 '나머지 사람'-미궁 속에서의 친구이자 적-으로부터 '피라네시'로 불린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 본인의 이름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의 기록에 따르면 집에는 열다섯째 사람까지 존재한다. '나'와 '나머지 사람', 그리고 죽은 이들을 포함해서 그렇다. 이어 나타나는 '열여섯째 사람'이 <피라네시>의 얽히고 섥힌 세상을 풀어주는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피라네시는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이자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이름에서 따온 듯하다. 역자가 밝혔듯 '감옥' 등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피라네시>에서 묘사되는 공간을 좀 더 편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새, 바람, 빛, 별, 조수, 조각상과 대화한다. 그리고 기록한다. 날아가는 새들 무리의 움직임-예를 들면 어느 석상에 앉는가하는-속에서 규칙과 의미를 발견하려 애쓴다. 미궁 속에서 피라네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의 깊게 관찰하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뿐이니. 피라네시에게 미궁은 그저 세상이자 집이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위대하고 은밀한 지식'을 얻어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자 하는 나머지 사람, 그를 돕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과 세계, 또다른 세상 사이에 방황하는 '나'의 대화와 사유는 <피라네시>가 갖는 특유의 기이한 매력이다.
"내가 믿기로 세상은 (혹은 사실상 모든 면에서 집과 세상이 동일하므로, 집은) 그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그 자비를 받아들일 거주자가 있기를 바란다." 피라네시의 이야기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세상, 그리고 스쳐가듯 지나가고 드러나는 세상 사이에서 던지는 화두같기도 하다. 조각상으로 표현되는 세상과 살아 움직이는 세상의 차이도 비슷하다.(*)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