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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 지성의 이야기
정아은 지음 / 문예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윤미향이 떠올랐다. 다수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슈에 올라타고, 그로 인해 명성을 누리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하고. 그런데 사적 이익을 취했다는 의혹이 발생하면서 한 순간 추락하는 과정이 그렇다.
그는 아직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버티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미한 생각마저 품게될 정도였다. 윤은 여전히 여러 협의를 받고 있다.

정아은의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미투운동'을 다뤘다. 필자는 페미니즘도, 페미니스트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 사회에서 오랫동안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누리거나 당해왔던 부조리가 있었음은 알고 있고, 그 기간 만큼이나 '반격'의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기억한다. '미투'에 고발당한 이가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대중이 느낀 통쾌함도 있었지만, 아무도 되돌아보지 않는 사이에 무고함이 밝혀졌지만 회생하지 못하고 있는 인사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지식인이라는 가면 속에 숨은 진실, 수려한 말과 글의 대잔치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부제 '지성의 이야기'에서 지성은 문학평론가이자 문화, 시사평론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주인공 남자다.
진한 숙취와 함께 깨어난 어느날 아침, 지성은 옆에 누운 생명체를 인지한다.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여기 누워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 그럼에도 지성은 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이 생명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이 순간만 넘기면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여자'라는 생각 때문에 굳이 알리지 않는다. 이 장면이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던지는 문제의식의 출발이다.
"이 정권 사람들,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습니다. 오만이죠, 86세대들의. 민주화 투쟁을 했던 과거 경력이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해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열변을 토하는 한때 민주화 동지들의 모습은 양극단으로 쏠린 사회가 얼마나 소모적인지 보여준다. 한때 추앙받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미투'로 인해 차례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재빠르게 입장을 갈아 탄다. 어느 편에 서야할 지를 고민하는 지성역시 마찬가지다.

"그날 밤 일 잊지 않았지?" 물음에 머뭇거리는 지성. "기억 안 난다고 말해야지!" 곧이어 민주는 다양한 어감이 섞인 악의의 말을 던진다.
천재 미녀 시인 민주와의 하룻밤을 어렴풋이 기억하는-정확히 말하면 아침에 함께 있다는 것만 발견한- 지성은 늘상 불안하다. 언제 '미투'로 번질 지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의 원인을 제공한 이로서 그저 사막에 머리를 처박는 낙타처럼 머릿속에서 잊혀지길 바랄 뿐이다. 지성은 그날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강제의 기억은 질기다. 온전히 살아남아 불쑥불쑥 쳐들어온다. 그렇다. 나는 그 밤의 일을 그렇게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일방적으로, 완력으로 행한 일이었다고."
지성을 찾아 '시뻘겋게' 마음을 드러냈지만 거절당한 민주는 SNS를 통해 '미투'에 동참하곤 사라진다. 교수자리를 거의 손에 넣었던 평론가이자, 인기있는 라디오 진행자,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집필가 지성은 곧바로 세상과 단절된다. 누구도 그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모든 중단 통보, 취소통보는 기계를 통해 전달됐다. 지성의 사회적 생명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메시지들이 너무나 예절 바른 언어로, 너무나 속도감 있게 쇄도한다.

끝내 지성의 무고를 밝혀주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버린 민주. 그러나 민주의 동생이 보낸 USB에 남겨진 그날의 진실은 급반전의 계기가 된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세상이 양면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준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지성 곁의 생명체, '나채리'의 존재는 다음 이야기로 이어진다.
'미투 운동'이 갖고 있는 다양한 속성과 진실, 그 속에서 지식인이라는 부류가 보여주는 행태와 변화무쌍한 심리변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긴박감을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보여 준다. 이야기는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이라는 책으로 연결된다.(*)
* 리뷰어스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