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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교실 - 젠더가 금지된 학교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흔히 쓰는 '정상적'이라는 말이 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그저 그렇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머리와 마음에 자리잡은 채로 사용한다. 대부분의 소설에는 '문제적 인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다만 무라타 사야카(村田沙耶香)의 <무성 교실(無性教室)>에는 '문제적'이라기보다 기존의 통념이나 억압을 거부하는 주인공들이 활약한다.
책은 '마루노우치 선의 마법소녀(丸の內魔法少女ミラクリーナ), '비밀의 화원(秘密の花園)', '무성 교실', '변용(変容)' 등 네 단편으로 구성돼있다. 원작 제목은 '마로노우치 마법소녀 미라클 리나'다.

<무성 교실>은 엉뚱하면서도 재미있고,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먼저 '마루노우치 선의 마법소녀'를 보자. 서른 다섯의 리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단짝 친구인 레이코와의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엄청난 열풍이 불던 '마법소녀 큐티 프린세스'를 따라 학교를, 동네를 지키는 마법소녀가 되기로 한 약속. 리나는 '미라클 리나'로, 레이코는 '메지털 레이미'로 변신해 '뱀파이어 글로리안'의 최면술에 맞서 세계 평화를 지킨다는 것이다.
세계 평화라고 해봐야 학교 복도를 정리하고 골목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지만 그 사명감 만큼은 '진짜' 마법소녀였다. 리나는 회사에서 가끔 마법소녀로 변신한다. 콤팩트를 넣어둔 잡지 부록 파우치 안에 있는 '폼폼'과 함께 화장실에서 변신해 뱀파이어 글로리안의 공격을 받은 잔무를 처리하고, 야근을 자청해 동료들을 구해 낸다.
그렇게 리나는 일상을 재미있게 요리하며 살아감으로써 평범한 광경을 스릴 넘치는 모습으로 바꿔낸다. 지루할 틈이 없다. 혼자 망상하는 것뿐이니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돈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마법소녀'임을 진작에 포기한 레이코를 돕기 위해 그녀는 잊었던 옛 기억, '마법소녀의 진정성'을 다시 되찾는다.

두 번째 이야기 '비밀의 화원'. 첫사랑의 환상을 깨기 위한 한 여대생의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그녀의 가방 속 소품함은 비밀을 담고 있다. 밤비 무니가 있는 캔 모양의 귀여운 소품함에는 번호를 맞워야 열리는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고, 번호를 맞춰 핑크색 소품함을 열면 은색 열쇠 하나가 들어 있다. 바로 첫사랑을 감금시킨 방의 열쇠다.
"첫사랑은 어떻게 해야 소멸하는 걸까. 답은 하나였다. 나는 내 첫사랑을 장사 지낼 준비를 착착 진행시
키고 싶었다."
밤비가 그려진 소품함이 쓰레기통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의 외침은 절실하고 집요하다. '첫사랑은 너가 아니야. 환상 속 너를 사랑했던 거라고. 현실의 너한테는 하나도 관심 없어.' 단호한 그녀가 치르는 '첫사랑 버리기 의식'이 기발하다.
그리고 성별이 금지된 학교 '무성 교실'. 모두 비슷한 머리는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은 10센티미터 길이의 쇼트 커트로 정해져 있고, 화장도, 귀걸이도 금지돼 있어 얼굴에 바르는 건 립밤이 전부인 학교다. 학생들은 친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도록 통제받는다. 이를 단순한 교칙일 뿐 졸업하면 본래대로 여자로 돌아가리라 여기던 유토-원래 이름은 유코지만, 여자이름같지 않아 보이기위해 바꿨다고 한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대상인 친구의 '성'이 궁금해 진다.

"어른들이 움직이고 있어. 아마 가까운 미래에 성별 폐지 법안이 의회에 제출될 거야. 연애는 성별에서
자유로와질 거야. 지금보다 훨씬 완벽한 형태로." 자신을 사랑하는 친구 유키,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 세나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한쪽은 자신의 성을 표현하고, 한쪽은 자신의 성을 없애는 방향으로. 그러나 유토는 알게 된다. 성별을 아무리 빼앗겨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는 것을.
마지막 단편은 세상이 인간의 인격을 미리 정하고, 그 표준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사회를 그린 '변용'이다. 가족의 병간호로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던 마코토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젊은 동료들이 '분노'라는 감정을 완전히 잊고 살고 있다는 것.
세상과 차단되어 있는 동안 변용(變容)의 때를 놓친 건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은 그녀가 과거 미워했던 '어른'을 소환하고, '분노의 엑스터시'를 잃어버린 세상의 진실을 찾기 위해 친구 준코의 '퍼블릭 넥스트 스피리트 프라이오리티 홈 파티'를 향하게 된다. 인격의 스탠더드를 결정하는 모임, 그곳에서 느끼게 된 감정은 마코토를 다시 한 번 흔들어 놓는다.
마치 일상과도 같은 이야기가 모여 있는 <무성 교실>. 그럼에도 작가의 '비정상적' 상상은 놀랍다. 새롭게 만들어낸 단어, 혹은 감정인 '나노무'하거나, '마미마눈데라'하거나 간에 말이다. 낡은 감정은 세상에 없을테니까.(*)
*컬처블룸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