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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언젠가 남쪽 있는 섬에서
매일 물고기를 잡으며 살자는
어머니와 나의 소중한 꿈,
우리 모자는 이불 안에서
끝없이 '언젠가......'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언젠가, 언젠가'
주문처럼 외우기만 하면
어머니와 나는 어딘가로 흘러 갈 수 있었다."
어릴 적 집을 나간 아버지, 행여 그가 쫓아올까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가며 어머니와 함께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열 살짜리 소년. 어머니의 우울한 한탄,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하루하루지만 '언젠가'라는 주문을 통한 꿈을 갖고 살아 간다.
어느날 외할아버지 '짱구영감'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들고, 좁은 방 한 구석에 그의 자리가 새겨진다. 언제나 떠나고 돌아오길 마음대로 하며 살아온 짱구영감은 늘 그랬듯 딸의 집에 마음대로 찾아온 것이다. 늦은 밤 손톱을 '또각또각' 깎고 또 깎는 어머니, 한 구석에 고정되어 눕지 않고 앉은 채 잠이 들고 깨어나길 반복하는 짱구영감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어머니가 증오하는 외할아버지 짱구영감, 어머니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존재하는 짱구영감. 이 부녀의 관계가 울컥해지는 이유는 '애증'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짱구영감이 좋아하는 문어튀김을 준비한 그날 아침부터 영감은 갑자기 사라졌다. 저녁 늦게 서있기조차 힘든 몸을 이끌고 두 개의 새빨간 양동이 가득 피조개를 담아 휘청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짱구영감의 모습은 <저녁놀 지는 마을>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이다.
짱구영감의 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저공비행'을 계속하고 있어서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성하지 않을 딸의 몸에 선명한 오렌지색 조갯살 한 점 보태주려는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다.

이와 대비되는 장면이 있다. 심장 뿐만 아니라 간까지 나빠서 수술마저 불가능한 상태의 짱구영감을 위해 어머니는 매일 바지락 된장국을 끓인다. 딱딱하게 굳은 짱구영감의 간에 작은 조개에서 짜낸 푸르스름한 국물이 한 방울이라도 많이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유모토 가즈미(湯本香樹実)의 <저녁놀 지는 마을(원제:西日の町)>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어머니와 짱구영감을 바라보며 아이는 '가족'을 서서히 알게 된다. <저녁놀 지는 마을>은 툭툭 일상이 던져지고,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지만 말 그대로 행간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래서 속도는 더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