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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
김석범 지음, 조수일 옮김 / 소명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서평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는 재일소설가 김석범의 단편집이다. 김석범은 1925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일본에 돌아왔을 때 제주 4.3이 일어났고 그 후 작품활동에서 꾸준히 소재로 삼는 등 국가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애썼다.
단편집에 실려있는 3편의 소설과 1편의 대담을 읽다보면 그가 평생 얼마나 제주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역사와 함께해왔는지 느낄 수 있다.
<소거된 고독>은 포장마차 밑바닥을 운영하는 K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삶과 이상 사이의 혼란 속에서도 센티멘털리즘으로 자기자신의 기분을 포장하지 않으려 애쓴다. 보통 하는 일처럼 포장마차 장사를 해보려 하기도 했다. 그것도 잘 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K는 장사나 영업을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가 했던 사회운동들은 사회를 변혁시키지는 못했다. 그저 끔찍한 현실을 같이 견뎌나갈 동료가 몇 있을 뿐이다. 같이 운동에 참여했던 동료들에게도 자신들의 입장이 있다. 조국에는 네가 필요하다고 편지에 쓰는 동료가 있지만 그 삶에 섣불리 뛰어들면 굶어죽을 수도 있다. 아니면 총살당할 수도 있다. 생활이 유지되지 않아 굶어죽거나 잡혀가서 총살당하거나 어찌됐건 죽음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포장마차에서 계속 술을 마신다. 집에 가서도 술을 마신다.
그렇지만 K는 취재하고 글을 쓴다.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취재라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말하고 있다. 그가 썼던 글로 인해서 포장마차를 열게 되기도 하고 또 제주에서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서울의 동료들 이야기를 어떻게든 써나가며 비인간 상태를 견디고 있다. 감상적인 기분에 잠기지 않으면서 주변의 끔찍한 이야기를 견디며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써나가고 써나가기로 결심한다.
글은 짧지만 상당히 무게가 있고 역사적 사실들과 K가 간신히 제 자리에서 정신을 유지하고 써나가는 듯한 이야기다. 가슴이 묵직해지지만 그만큼 그 당시에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사람들의 내면풍경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역사적 사건들과 그에 이어져 계속되는 국가폭력,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삶을 간신히 살아내고 있는 한 활동가의 기록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병치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에서는 여러모로 재미있었는데 꼭 대학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랑 마지막까지 술자리에 남았을 때 느껴지는 다들 취해서 자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남이 듣든 말든 계속 해버리고야 마는 그런 순간을 보여주는 거 같았던 부분이 진짜 웃겼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같은데.. 영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제발 정신차리고 K선생이랑 술마시지 말라고.. 한편으로는 좀 틀어서 생각해보기도 했다. 작가라면 자기 작품을 읽어주는 젊고 귀여운 독자가 있다. 이것도 굉장한데 낡고 지친 창작자에게 선생님 저 다음편이 너무 보고 싶어요(츄) 이러면 이거는 판타지아냐? 현실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약간 든다. 역시 술을 마실 수 있으면 다들 성인이지. 홍상수영화처럼 행동할 수도 있지. 그치만 역시 어느정도는 판타지같아서 웃겼다. 선생님 술 너무 많이 드셔서 꿈꾸시는거 같아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글을 쓴다고? 그래서 진짜 놀랐다. 거의 자료집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4.3과 관련된 자료들은 대중에게 닿을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된 작품이 많지 않다. 제일 많이 알려진 <순이삼촌>과 같은 작품도 현기영 작가가 옥살이를 각오하고 썼다고 알려져있다(실제로 작가가 옥살이를 했음). K선생이 마주하고 써내려가고 있는 글은 "사람들이 개고양이처럼 죽어나가는" 제주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사건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소설이다. 4.3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흔하지 않은데다 이렇게 자세한 사건 몇 개를 들여다보는 듯한 내용은 다시금 충격을 준다.
이런 사건들을 마주하고 있던 K나 영이같은 사람들이 서로 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땅의 동통>은 조선적을 가지고 일본에서 살고 있던 지식인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말해준다. 조선적을 가지고 있던 K는 참사관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기 위한 허가증을 받는다. 원래라면 국적을 바꿔야 하지만 당시 통일을 굳게 믿고 있던 자이니치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의 신념을 바꾸지 않기 위해 조선적을 유지하던 상황이다. K는 그 과정에서 한국정부와 실랑이를 하게 되지만 어떻게든 한국에 들어와 강연과 좌담회, 공동기자회견 등의 일들을 해나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K는 파괴세력, 북괴공작원과 관계가 있다느니 하는 음해에도 시달리게 되기도 하고 그가 제주로 가는 일정을 방해하기 위해 배를 탈 시간에 운행을 중단시켜버리는 일을 겪게되기도 한다. 어린시절 알고 지냈던 제주의 친척들은 자신이 방문하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떨면서 받는다. 그러나 K는 의연하게 일들을 해결해나가려 애쓴다. 그의 주변을 감시하는 사복경찰을 놀리거나 하는 우스운 일도 일어나지만 대체로 씁쓸한 현실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다루기 어렵다. 이렇게까지 국가와 국가폭력에 맞서 정면으로 대치하고 밀고 당기며 자신의 의견을 굳건히 지키려 했던 작가가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대담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두 가지 면에서 그랬다.
하나는 반공이데올로기가 권력확립의 도구이자 건국이념처럼 작동한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대로 현재도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 보여진다. 씁쓸하지만 4.3이 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지식인들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일본어 문학'에 대한 생각이다. 김석범은 자신의 문학을 일본문학이 아니라 일본어로 쓰여진 문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어로 쓰면 일본문학이라는 건 언어속문주의, 언어 내셔널리즘이라고 말한 부분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어로 쓰겠다는 그리하여 강요받은 것을 통해 오히려 지배구조를 안에서부터 뛰어넘어보겠다는 발상과 실천은 대담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기 삶으로 실천해온 인물이라는 것도 존경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읽는동안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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