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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2
솔베이 발레 지음, 손화수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서평 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1권을 다 읽고 난 후, 주인공 타라가 대체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어 견딜 수 없는 기분으로 2권을 펼쳤다. 그리고 읽는 내내 느낀 가장 강렬한 감상은, 이 작품이 타임루프라는 명백한 SF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순문학'의 영혼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순문학 작가들이 트렌드에 편승해 SF 소재를 섣불리 차용할 때 독자들은 곤혹스러운 경험을 하곤 한다. SF도 아니고 순문학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기괴한 '키메라' 같은 결과물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금세 눈치 빠른 꼬맹이가 되어 구역질 나는 표정을 짓게 된다.
하지만 솔베이 발레의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그런 얕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억지로 두 장르를 섞으려 이상한 짓을 하는 대신, 자신만의 순문학적 밀도와 속도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런 면에서 사만다 하비의 『궤도(Orbital)』가 떠오르기도 한다. 『궤도』 역시 SF라기보다는 과학 이야기가 빼곡히 들어찬, 끔찍하게 재미있는 논픽션적 소설에 가까웠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소재는 타임루프지만,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보여준 낭만적인 로맨스의 궤적과는 결이 다르다. 이곳에 등장하는 사랑과 관계는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이고 진짜 같다. 장르의 클리셰를 빌려 상업적인 의미를 창출하려는 태도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무언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배경, 캐릭터, 소재 등 텍스트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그 약속의 장치다. 장르 소설은 클리셰의 반복과 상업적 구획을 통해 독자의 예상된 욕망을 충실히 이행하며 이 약속을 지킨다. 그 약속을 안전하게 지키는 작가들은 막대한 부와 성공을 얻는다. 반면,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 그 약속을 철저히 부수며, 기어코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과 깊게 연결된다.
한나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를 떠올려 보자. 그 작품은 초기엔 특정 장르적 결합(BL과 섹스 앤 더 시티의 조화 같은)으로 시작하는 듯하지만, 이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나가며 독자가 상상했던 장르의 외연과 인간 삶의 규격을 산산조각 낸다. 그때 독자의 멘탈도 함께 부서지지만, 동시에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최고의 경지를 목격하게 된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경지에 다가선다. 순문학과 SF라는 두 가지 규격을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으면서도, 작가와 독자의 '약속'을 부수고 동시에 지켜내는 경이로운 테크닉을 선보인다.
독자의 욕망은 사실 완벽히 매끄럽지 않으며 수많은 틈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독자 자신조차 본인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다. 마치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폰 20'의 디자인을 알지 못하지만, 막상 그것이 주어졌을 때 열광하게 되는 유저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솔베이 발레는 독자가 미리 정해두었던 기대감과 얄팍한 욕망의 외연을 우아하게 넘어선다. 작가만의 속도로 조형된 특별한 서사에 올라타며 나도 기대를 하게 되었다. 이 작가가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을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