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죽음 1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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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진중권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97년 말,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때 읽었던 책이 <미학 오디세이>였는데 저자 특유의 유머감각 덕분에 낯설었던 미학의 세계를 가벼운 기분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진중권'이라는 이름 석자는 어느날부턴가 해박한 독설쟁이라는 별명과 함께 주위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진중권은 배배 꼬는 말투로 많은 사람이 비위를 거슬리고 있지만 그의 글쓰기가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미학 오디세이>는 유쾌한 농담들이 적재적소에 박혀있어 독자를 부담없이 대하고 있을 뿐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비아냥따위는 없다. <춤추는 죽음>역시 마찬가지다. <미학 오디세이>에서의 장난기는 많이 가셨지만 '죽음'이라는, 어떻게 보면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편안하고 성실한 말투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아마도 진중권은 정치와 현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때만 사악(?)해지는 모양이다.

<춤추는 죽음>은 독특한 내용, 명료하고 자세한 설명, 풍부한 도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피같은 돈이 아깝다는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만족스러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책의 하드웨어 측면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도판은 전부 칼라이며, 종이 또한 부드러운 고급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용이 철저하게 서양적이라는 점인데, 그거야 어쩌겠는가. 이정도 이야기라도 들려준 진중권에게 감사해야지. 다만 진중권이 동양에서의 죽음의 관념사를 정리해 '춤추는 죽음- 동양편-'(물론 동양편에서는 춤추는 죽음이라는 제목이 성립되지는 않을테지만)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유쾌한 독설가 진중권이 저자라는 점 하나만으로 선뜻 책을 샀는데, 경솔한 충동구입이었음에도 이득을 본 것 같아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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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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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표지에 끌리기도 했고 이름있는 철학자가 게으름에 대해서 '찬양'까지 했다기에 책을 구입했지만 읽어본 소감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사실 이 책의 정체는 러셀이 써놓은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며, 게으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는 것은 초반의 몇 장뿐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은 많은 글 중 하나일 뿐이다. 온라인 서점의 특성상 직접 책을 들고 살펴보지 못하는 구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나처럼 게으름에 대해서 '심오하고','집중적'인 분석을 기대했다가 실망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책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선전문구대로 이 책은 대단히 명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명쾌함'이라는 단어를 뒤집어보면 '단순함'이라는 또다른 이름이 발견된다. 러셀은 세상사를 너무 단순화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서려는 의도적인 집필이라 생각되기는 하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머리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4시간 근무제에 대한 문제가 그렇다.

러셀은 8시간씩 근무하는 부류와 아무일도 못하는 부류가 공존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4시간씩 근무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피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말 한마디로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던가? 러셀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버린다. 러셀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여유있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뻔한 명제제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 혹은 해답을 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러셀이 비판하는 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쪽이 훨씬 성실했다.

어쩌면 내가 러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여 불평을 늘어놓는 것일 수도 있다. 전공서적도 아닌 에세이품의 짧은 글 모음집을 상대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본다면 이 책은 여러 측면으로 문제의식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괜찮은 책이라 할 수 있으리라. 게을러서 사색할 '꺼리'찾기도 귀찮은 이들은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러셀이 제법 다양하게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고 있으니까. 물론 책을 읽는 것마저 귀찮아할 지독한 게으름뱅이들이 있다면 그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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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4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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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중간에 부록으로 삽입된 시스티나 천장화 사진도 마음에 들고, 책 곳곳에 널려있는 신학지식은 글의 리얼리즘을 살려주는 한편 읽는이에게 지적 쾌락을 제공한다. 지은이가 자료수집 측면에서 상당히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구성은 좀 허술하다. 특히 결말부분은 실망스러운데, 도입부와 전개 과정에서 힘들게 따놓은 점수를 결말에서 절반 이상 날려먹었다는 탄식이 나온다.

복수물의 재료 자체만 보면 사실 엄청난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성서의 기록이 거짓말이었다니 어찌 충격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충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소설 전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결정적 열쇠인 '침묵의 서'의 내용이라는 것이 고작 '예수는 사실 부활하지 않았다.' 는 것이다. 아, 물론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 내용을 뒷받침할 물증이나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다. 우리가 왜 '침묵의 서'의 내용을 믿어야하는 지를 제시해 주지 않고 있다.

주인공들은 바보처럼 '예수가 사실 부활하지 않았다.'는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평생동안 가져왔던 믿음을 잃어버리고 절망한다. 이점이 충격의 카타르시스를 느껴야할 결말부를 허탈하게 만들어버린다. 카톨릭의 교리가 그렇게 우습고 말랑말랑한 것이었던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예수 비부활설을 접하자마자 카톨릭 최고수준의 이론가가 눈물을 흘리며 창문으로 뛰어내릴 정도로? 아니, 그보다 독자의 논리적 사고 수준을 우습게 본 작가에게 화를 내야하나?

이미 이 책의 서평을 쓴 사람중에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복수'는 '장미의 이름'처럼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장중한 느낌도 없어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 곤란하다. 다만 '장미의 이름'보다 훨씬 빠른 템포의 쉬운 글이 장점이 될 수는 있겠다. 제법 흥미로운 도입부와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려나가는 재미가 있는 중반 전개 부분을 감안했을 때, 만약 작가가 결말 부분에 좀더 신경을 써서 예수의 부활을 논리적이며 설득력있는 '확실한' 거짓말로 증명했다면(종교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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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장이의 선물
제임스 버크 외 / 세종(세종서적)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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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문화인류사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인류사를 변화시켜왔던 천재, 엘리트들을 도끼장이라는 다소 코믹한(?) 이름으로 호칭하며 이들이 보따리에서 끄집어낸 선물들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변화해왔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서양인인만큼 동양사가 미흡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마 굳이 흠을 잡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동서양의 역사를 동시에 아우르는 것 자체가 워낙에 힘든 일인 탓이다. 그건 욕심이다.

이 책의 매력은 구체적인 근거 제시를 통해 확보되는 신뢰성과 명료한 논리성에 있다. 또한 역사전개에 있어서 '도끼장이와 그들의 선물'이라는 기준점이 책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어 우후죽순처럼 나도는 어설픈 교양사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특히 책 말미에 자리하고 있는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분석 및 전망은 그 내용에 대한 찬성 여부를 떠나 저자가 분명한 자기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장선까지 바라보며 미래를 투시하고자 시도한 것이 인상적이다.

책의 내용을 보면 도끼장이들이 차례로 던져주는 선물의 축적을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띄고 있어서 자칫 '진보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도끼장이의 선물을 득과 실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선물에 의해 진행된 인류의 역사 역시 진보와 퇴보가 함께 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책의 말미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섬뜩하게 등장한다. 저자가 말미에 제시하고 있는 도끼장이들의 선물이 가져다 준 폐해들,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의 나열은 읽는이들을 우울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어쩌면 인류는 지구에 기생해 살고 있는 병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저자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저자는 웹, 그러니까 인터넷의 활용 여부로 인해 지금까지 도끼장이들의 선물이 가져왔던 폐해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조금 안이하게 느껴진다. 지난날 도끼장이들이 준 선물이 항상 그러했듯이, 인터넷이 앞으로 인류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해악을 가져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하면 저자가 기대해 마지않는 웹의 세상에서도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부작용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영화 NET을 생각해보자)게다가 저자가 희망을 걸고 있는 인터넷의 역할은 정치 사회체제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어서, 어찌보면 현재 인류가 당면해 있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환경문제를 극복할 구체적인 비전은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날카로운 시각을 지니고 있는 상쾌한 느낌의 책임엔 틀림없다.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얻어지는 게 있는 그런 책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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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 두산동아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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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여는 순감부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강렬한 지적 충격을 던져주는 책이다. 내가 생물학에 문외한인 관계로 도킨스가 생물학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기적인 유전자설'을 통해 진화론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을 속시원하게, 거침없이 설명해주고 있다. 진화의 기본 단위를 개체나 종이 아닌 유전자에서 찾는다는 발상은 현기증마저 느끼게 해주며, 이 발상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각종 실험 결과물은 읽는 이들을 강렬하게 '중독'시켜버린다.

도킨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땅의 모든 진화는,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존재의미는 유전자
들의 자기복제라는 절대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도 유전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며, 생물의 역사란 곧 유전자의 필요에 의한 진화의 역사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지구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 따위가 아니라 '유전자'라고 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과감한 주장은 단순히 생물학의 범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생명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이면서 철학적인 화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스케일이 거대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제시한 밈의 개념은 또한 얼마나 신선한 것인지! 밈 개념의 제시만으로도 이 책은 이미 생물학이라는 껍질을 벗어던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멋진 책이라 생각하며, '천지창조'의 비밀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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