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지음 / 김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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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의 천문 기록을 컴퓨터를 통해 복원하고 실제 발생 여부를 확인해보는 실험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저자의 전공이 천문학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사료의 빈곤함 때문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자연과학적 접근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저자인 박창범 교수는 기본적으로 기존 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듯 하다. 즉 역사학적인 이해 없이 오로지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험에 임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내놓은 실험 결과는 기존 사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내용의 것이다. 박창범 교수가 책으로까지 위 실험내용을 공개했다는 것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보다 자신이 실험을 통해 도출해낸 결과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제는 박창범 교수의 실험에 있다. 그가 제시한 실험 내용을 살펴본 결과 실험의 조건과 결과를 대단히 자의적인 기준으로, 심하게 말하자면 편파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결국 중요한 것은 실험 그 자체라기보다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연과학의 실험이 절대적인 객관성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도 이번에야 알았다. 박창범 교수는 처음부터 모종의 기대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고 어떻게 보면 그가 결론 내린 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이 가능한 실험 결과물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리하게 해석하고 있다.

가장 찜찜한 것은 이 책이 자연과학자가 저술한 것이라는 점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을 역사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정확하다고 믿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권위가 인문학의 권위를 압도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자연과학에 밀려 바닥까지 추락해버린 인문학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는 서글픈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그저 인문학 전공자의 예민한 반응이라고만 할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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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2004-10-2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과학은 인문학과 비교하여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할수 있는 학문이겠지요. 절대성이란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그런표현이 과연 인문학과 자연과학중에 어느쪽에 더 적절한 것일까요? 이 한반도에는 과연 어떤사람들이 살았을까요? 이른바 한민족만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유럽인들도 상당수 살고 있었읍니다. 그냥 사실대로 보면 되는 문제 입니다. 그걸 영양상태가 아주 좋은 예외적으로 해석하는게 기존의 고고학계이지요.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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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는 죽지 않았다. 총알 가지고는 죽일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게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에게 향수를 느끼는 이들은 노장년층만이 아니다. 박정희가 죽고 난 후에 태어난 이들 중에도 그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연령을 가리지 않는 박정희 신드롬에는 그가 우리나라 경제를 이만큼 만들어놓았다는 ‘경제 우선주의’가 바탕에 깔려있다. 아마도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이 박정희 신화창조의 큰 역할을 담당했겠지만, 이놈의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기세가 제법 무섭다. 그래서 나는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를 평가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고자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게 있다. 일제 36년간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근대적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정비, 철도 건설, 산업 발전 등등. 쉽게 말해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 경제가 많이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자, 그럼 일본의 식민지 지배도 정당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경제를 위해서라면, 근대화를 위해서라면 위정자에 반하는 모든 세력을 힘으로 찍어 눌러도 정당화 되는건가? 그런건가? 나는 박정희 옹호론자들에게 그 대답을 듣고 싶다. 당신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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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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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면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여 그 속에 몰입하곤 한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그런 점에서 나에게 최악의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숨막힘, 훈련소에서 화생방 훈련을 할 때 느꼈던 그 몸서리쳐지는 숨막힘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떼로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불과 몇십년 전에 벌어졌다. 그것도 독일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순식간에 멸종시켜야 할 버러지의 신세가 되어버린 유태인들의 경험담은 한편의 지옥여행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평범한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나 자신과도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학살’이라 불리우는 장면은 여러 차례 연출되었다. 제주도 4.3을 비롯해 80년 광주까지. 과연 우리는 ‘쥐’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아니, 혹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양이’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인류 역사의 한 장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광기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동시에 현재의 우리에게 ‘그럼 너는?’하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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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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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온 지 꽤 되었으니 이제와서 이야기를 꺼내기엔 새삼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시오노 나나미가 우리로서는 낯설기만 한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궁금해한 적도 없고 들려달라고 한 적도 없었건만 이야기를 어찌나 맛깔스럽고 곰살 맞게 풀어놓는지 이건 도대체가 유쾌하게 당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재능이다. 그녀는 우리의 무식을 들춰내 탓하지도 않고 고압적인 자세로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평범한 역사소설을 읽었을 때와는 달리 묵직한 지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리얼리티의 확보는 참으로 대단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통해서 역사의 그늘로 밀려나 있는 체사레 보르자의 본래 자리를 찾아주려 한다. 그녀는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긍정적 평가에 동의하며, 체사레야말로 도덕률을 포함한 시대적 압박 따위에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요, 현실주의의 정수를 몸으로 체현한 행동의 천재라고 한다. 잔혹·비정한 성품에 비윤리적인 인간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사뭇 다른 시각이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생을 살해한 사실이나, 승리자라는 이유만으로 포를리의 카테리나에게 비열한 행동을 저질렀던 일도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일반인의 감수성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체사레의 행적에도 시종일관 적극적인 변호와 역성들기로 일관하고 있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이 무척 신선하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평가라고 하기엔 분명히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인륜과 도덕을 우습게 알고, 냉혹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였던 체사레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열렬한 찬사가 '영웅'에 대
한 깊은 애정에 기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과 감상주의적·낭만주의적 성향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체사레의 '현실주의'를 '낭만주의'의 물감으로 그리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체사레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도구를 이용해 그를 복권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를 자처한 바 없기 때문에 그녀의 서술이 보여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지막 기회를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피해 스페인에서의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이나 - 사실 이 부분은 막연한 추측과 가정으로 점철되어 있어 만약 역사서술이었다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 '이름없는 잡병들'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 등에서는 한편의 비극으로써 완벽한 구색을 갖추고 있으며, 실제로 독자들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가 '현실주의로 포장된 낭만주의'라는 모순된 조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일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체사레의 만남을 '사고의 거인'과 '행동의 천재'의 만남이라 규정하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유로움'이라고 격렬히 외친다. 그녀의 사상은 이곳에 농축되어 있다. 그 어떤 것에도 거칠 것 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절대자유!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고 편파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체사레를 역사의 그늘에서 꺼내고자 했던 이유다. 이 책이 취하고 있는 냉혹함에 대한 애정, 현실주의를 옹호하는 낭만적 태도는 자유를 향한 그녀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우아한 모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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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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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식>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음직하다.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젊은이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학적이라는 언론의 평은 납작한 지갑이나마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부추긴다.

<일식>의 도입부 몇 장을 읽다보면 과연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중세사에 무지한 우리로서는 감탄할 수 밖에 없을만큼 낯선 용어들이 지면을 어지럽힌다. 그렇다면 히라노라는 젊은이는 천재라 불리우는 에코를 뛰어넘는 괴물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두 소설이 나란히 비교하기엔 곤란한,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역시 히라노가 에코의 내공을 감당할 수 없다.

일단 형식부터 살펴보자. <일식>을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는데 '장중한 의고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글판에서는 '장중한 의고체'의 분위기는 전혀 살지 못했다. 소설을 읽어감에 있어서 낯선 용어가 꽤 등장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맥상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고 세상에서 말하는 '놀랍다'는 수식어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번역물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일 것이리라.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뒷받침해주는 지명, 인물명, 학회명 등의 사용은 <장미의 이름>에 비견될 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그 사용이 소설의 초중반으로 한정되어 있는데다 책 말미에 사전식의 미주로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어 장미의 이름이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는 '학문적 진지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이 '진지함'이라는 게 소설이라는 장르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에코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진지함의 강요'는 묘한 쾌감마저 동반하는 까닭에 일반법칙과는 상관없이 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최대 매력으로 작용했던 터다. 히라노가 에코를 의식하며 글을 썼는지 여부를 알 수 없는 마당에 계속 그와 에코를 비교한다는 점이 미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점에서 <일식>은 <장미의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

겉모습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알맹이다. 일단 형식면에서 에코보다 열세에 놓인(?) <일식>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장미의 이름>보다 더한 난해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미의 이름>은 비록 방대한 주석과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지만 책을 다 읽을 무렵이면 에코가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명료하게 정리가 된다.

하지만 <일식>은 아니다. <장미의 이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읽기 편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는게 만만치 않다. 그것은 <장미의 이름>이 비록 갖가지 상징적 기호들로 뒤범벅이 되어있을망정 스토리 전개 자체는 '있을 법한 일'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일식은 '안드로규노스'와 태양의 성적 결합 등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때문이다. 이 점이 <일식>을 난해하고 특이한 소설로 인정하게 만들지만 과연 좋은 소설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주제의식이 모호하게 처리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내용보다는 소설의 실험성에 점수를 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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