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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움베르트 에코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식>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음직하다.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젊은이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학적이라는 언론의 평은 납작한 지갑이나마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부추긴다.
<일식>의 도입부 몇 장을 읽다보면 과연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중세사에 무지한 우리로서는 감탄할 수 밖에 없을만큼 낯선 용어들이 지면을 어지럽힌다. 그렇다면 히라노라는 젊은이는 천재라 불리우는 에코를 뛰어넘는 괴물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두 소설이 나란히 비교하기엔 곤란한,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역시 히라노가 에코의 내공을 감당할 수 없다.
일단 형식부터 살펴보자. <일식>을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는데 '장중한 의고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글판에서는 '장중한 의고체'의 분위기는 전혀 살지 못했다. 소설을 읽어감에 있어서 낯선 용어가 꽤 등장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맥상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고 세상에서 말하는 '놀랍다'는 수식어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번역물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일 것이리라.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뒷받침해주는 지명, 인물명, 학회명 등의 사용은 <장미의 이름>에 비견될 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그 사용이 소설의 초중반으로 한정되어 있는데다 책 말미에 사전식의 미주로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어 장미의 이름이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는 '학문적 진지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이 '진지함'이라는 게 소설이라는 장르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에코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진지함의 강요'는 묘한 쾌감마저 동반하는 까닭에 일반법칙과는 상관없이 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최대 매력으로 작용했던 터다. 히라노가 에코를 의식하며 글을 썼는지 여부를 알 수 없는 마당에 계속 그와 에코를 비교한다는 점이 미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점에서 <일식>은 <장미의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
겉모습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알맹이다. 일단 형식면에서 에코보다 열세에 놓인(?) <일식>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장미의 이름>보다 더한 난해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미의 이름>은 비록 방대한 주석과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지만 책을 다 읽을 무렵이면 에코가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명료하게 정리가 된다.
하지만 <일식>은 아니다. <장미의 이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읽기 편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는게 만만치 않다. 그것은 <장미의 이름>이 비록 갖가지 상징적 기호들로 뒤범벅이 되어있을망정 스토리 전개 자체는 '있을 법한 일'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일식은 '안드로규노스'와 태양의 성적 결합 등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때문이다. 이 점이 <일식>을 난해하고 특이한 소설로 인정하게 만들지만 과연 좋은 소설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주제의식이 모호하게 처리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내용보다는 소설의 실험성에 점수를 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