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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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이 나온 지 꽤 되었으니 이제와서 이야기를 꺼내기엔 새삼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시오노 나나미가 우리로서는 낯설기만 한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궁금해한 적도 없고 들려달라고 한 적도 없었건만 이야기를 어찌나 맛깔스럽고 곰살 맞게 풀어놓는지 이건 도대체가 유쾌하게 당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재능이다. 그녀는 우리의 무식을 들춰내 탓하지도 않고 고압적인 자세로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평범한 역사소설을 읽었을 때와는 달리 묵직한 지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리얼리티의 확보는 참으로 대단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통해서 역사의 그늘로 밀려나 있는 체사레 보르자의 본래 자리를 찾아주려 한다. 그녀는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긍정적 평가에 동의하며, 체사레야말로 도덕률을 포함한 시대적 압박 따위에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요, 현실주의의 정수를 몸으로 체현한 행동의 천재라고 한다. 잔혹·비정한 성품에 비윤리적인 인간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사뭇 다른 시각이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생을 살해한 사실이나, 승리자라는 이유만으로 포를리의 카테리나에게 비열한 행동을 저질렀던 일도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일반인의 감수성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체사레의 행적에도 시종일관 적극적인 변호와 역성들기로 일관하고 있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이 무척 신선하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평가라고 하기엔 분명히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인륜과 도덕을 우습게 알고, 냉혹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였던 체사레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열렬한 찬사가 '영웅'에 대
한 깊은 애정에 기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과 감상주의적·낭만주의적 성향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체사레의 '현실주의'를 '낭만주의'의 물감으로 그리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체사레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도구를 이용해 그를 복권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를 자처한 바 없기 때문에 그녀의 서술이 보여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지막 기회를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피해 스페인에서의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이나 - 사실 이 부분은 막연한 추측과 가정으로 점철되어 있어 만약 역사서술이었다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 '이름없는 잡병들'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 등에서는 한편의 비극으로써 완벽한 구색을 갖추고 있으며, 실제로 독자들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가 '현실주의로 포장된 낭만주의'라는 모순된 조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일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체사레의 만남을 '사고의 거인'과 '행동의 천재'의 만남이라 규정하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유로움'이라고 격렬히 외친다. 그녀의 사상은 이곳에 농축되어 있다. 그 어떤 것에도 거칠 것 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절대자유!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고 편파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체사레를 역사의 그늘에서 꺼내고자 했던 이유다. 이 책이 취하고 있는 냉혹함에 대한 애정, 현실주의를 옹호하는 낭만적 태도는 자유를 향한 그녀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우아한 모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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