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핑을 하다 난민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한 댓글과 마주쳤다. (제주도 예멘) 난민문제에 대한 찬반토론이야 흔하디흔한 논쟁거리인데, 내가 특별히 날카로운이라고 말한 건, 그 논리 전개 때문에 한 말이다. 사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드루킹 수준을 벗어난 댓글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편견 없이 읽어보기 바란다. 필자 ID‘Al Mohamed Salam; ㄷㆍㄱ로 돼 있는 댓글 전문을 (문장이 깔끔하진 않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만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역지사지를 통해 난민을 받자 같은데 작가는 애초에 난민을 받지 않는 주장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 난민을 왜 무조건 받아야 하는가? 물어본다면 현실적 문제 상황은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며 십중십은 불쌍하고 인류애로써라고 할 것임.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일상생활에서도 인류애를 발휘하여 현실적 여건 문제를 무릅쓰고 고아를 입양한다거나 노숙자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까? 한 명도 없다고 자신함. 이런 사람들은 난민에 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생각보단 사회를 공유재로서 인식하여 피해가 있어도 자신이 아니라 남이 볼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임. 결국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쉽게 쉽게 난민을 받자고 주장하며 이런 모습을 통해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간이란 척을 하고 싶을 뿐임. http://www.ziksir.com/ziksir/view/6601

애초에 난 난민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내 주장보다는 단지 관련 주제의 인상적인 논거를 마주한 단상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관련 주제에 대해 뭔가 코멘트하려니 우선 내 입장부터 밝혀두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단지 난민문제에 대해, ‘인류애 정신을 실현하되, 국제사회에서 각국은 (제국주의가 원인이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원인이든)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법 이전의 원칙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위 댓글 이야기다. 댓글처럼 난민문제는 궁극적으로 인류애(헌법전문엔 인류공영으로 표현돼 있다)’의 문제가 맞다. 여기서 댓글은 찬성론자들의 이 인류애가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사용함으로써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개릿 하딘에 의해 이슈화된 공유재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이전에도 인식하고 있던) 오래된 학문적 주제인데, 엘리너 오스트롬은 관련 주제로 2009년에 여성으로서는 첫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댓글의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는 아마도 대한민국 구성원이 사회체제나 복지제도를 (흔히 인용되는 개릿 하딘의 사례인) 목초지 공유재처럼 이용해 자신의 어떤 사익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경우,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사회라는 공유재를 합리적개인적극한적으로 이용해 뭔가 사익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그 극대화되는 사익이 뭘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댓글은 명쾌하게 도덕적 우월감이라고 대답한다. 즉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공유재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자신은 1/n(5천만)의 대가만 치르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극대화시키지만, 이런 게임의 법칙이 장기화되면 공유재인 사회는 피폐화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난민수용 반대자들은 특이하게도 공유재의 피폐를 걱정해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내가 이 댓글에서 가장 날카롭게 느꼈던 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 자체보다는 그 논거였다. 댓글은 난민수용 찬성자들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공유재 아닌 자신의 사유재를 이용해 고아나 노숙자를 상대로 똑같이 자신의 그런 인류애를 실현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 그렇다면 앞으로 (쟁점이 각각 상당히 다르지만 그만한 공통점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귀화이민, 외국인 노동자, 난민인도적 체류 등의 관대한 수용이 정말 사회를 공유재처럼 이용하는 현상이어서 사회가 피폐화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 스스로의 필요(사회공동체 규모의 급속한 와해방지라는 이익) 때문에라도 불가피하게 지금보다 더 관대하게 그런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 고도의 지난한 숙제를 우리 사회는 풀어야 한다.

 

위에서 나는 각국의 난민수용은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만을 제시했지만, 더 구체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짧은 지면에 자세히 언급하긴 힘들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댓글의 지적처럼, 이런 문제를 단순히 선악의 문제로 재단하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문제가 아닌 경제주체의 입장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경제주체가 취하는 각각의 상이한 태도를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각 경제주체가 (귀화 이난민합법불법체류자를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유입문제를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과 일자리를 경쟁하는 노동자가 반대하는 건 결코 악은 아니다. 당장 일자리를 경쟁하지 않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중산층의 경우 자신들의 복지비용 증가와 소비지출 감소가 균형을 이룬다면 (댓글의 주장처럼) 찬성론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한편 상호주의 없는 자본과 상품의 무관세 무한 개방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자본가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는 관대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차원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찬반주장자들의 도덕적 우월감 획득 성향보다 우선 계급계층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렇게 따질 때는 국내적 복지(확대)논쟁도 사회의 공유재 인식과 도덕적 우월감 획득이라는 정신적 차원보다는 계급계층적인 이해관계와 착취제도의 안정적 유지라는 물질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게 우선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가장 뜨거운 논쟁일수록 가장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위 댓글의 주인공이 남긴 화두를 열심히 더 연구해봐야겠다. 사회적 논쟁이 합리적 결론으로 이끈다 치고,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사회적 이득을 얻는다면 논쟁이라는 골치 아픈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건 공공재의 무임승차일 수도 있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읽고 싶은 아무 책을 읽기도 힘든 무더운 여름, 알지도 못 하는 댓글러의 무뚝뚝한 댓글까지 운 없이 눈에 띄어 그 화두를 덤터기 쓰려니 더 무더운 여름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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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죽음은 산 자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굳이 길게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최근 현대사만 살피더라도 그 흔적은 차고 넘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을 김지하의 1991년 칼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조선닷컴, 199155)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발언은 상징적이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찬양하고 요구하는가?”라고까지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대 죽음의 행렬을 그저 어떤 세력의 요구라고 본 김지하의 관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관점은 죽은 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지하의 세상을 보는 이런 시각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의 아내 김영주는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닷컴, 2011228(수정1025.))

세월이 지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시절이 됐다. 그때도 유사한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바라보는 유사한 시각도 여전했다. 대통령 노무현은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이렇게 바라봤다.

 

노 대통령은 정부담화에 대해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노동담화 어정쩡" 관계장관 질타, 인터넷 한겨레, 2003115.)

 

노무현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가 아닌 질타를 한 셈이다. 자신의 시대에는 막다른 삶의 절망적 표현인 분신자살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오직 (산 자들을 위한) 투쟁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의 냉혹한 오만이다. ‘죽음의 요구운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편향적 시각이 김지하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어떻게 다른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정치적 죽음을 죽은 자의 것이 아닌 산 자의 것으로 만드는 정치적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의 피격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박근혜를 만들었고, 노무현의 자살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문재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노회찬의 죽음 원인에 승복하지 못 하는 자들도 있는 듯하다.

 

사실 노회찬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 읽힐 법도 하다. 그들이 남긴 유서엔 공히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다. 자살 직전 노무현은 홈페이지에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민주주의-진보-정의 말할 자격 이미 잃었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오마이뉴스, 2009422(최종23))라는 말을 남겼으며, 노회찬은 유서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전문] 노회찬 유서"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연합뉴스, 2018723)는 말을 남겼다.

 

한데 그들의 유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들 공히 부끄러움으로 함께 갈 수 없어 자살한 셈이지만, 산 자들은 노무현을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고, 정의당 대표 이정미는 원통한 죽음에 대한 책임운운하며 난해한 정치적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에선 죽음이라는 결과에 불복하며 호명하고, 다른 한편에선 그 죽음의 원인을 상기시키며 호명한다. 이렇게 산 자의 정치적 욕망은 죽은 자의 부끄러움을 소환한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한탄스럽게도 이명박박근혜가 이 나라 정치수준을 한 없이 낮춘 기준선이 돼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이 이명박박근혜의 타락수준보다 훨씬 낫다며 기고만장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마찬가지로, 노회찬이 인정한 비리가 살아 있는 정치인들의 짐작 가는 타락수준보다는 훨씬 낫다며 원통해하는 퇴행적 논리가 당당히 머리를 쳐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위기는 차악의 정치를 부끄러워하며 최악의 정치를 소멸시키려는 대신, 최악의 정치를 핑계로 차악의 정치를 합리화하려는 데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노회찬의 명복을 비는 최선의 방법을 찾길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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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핵심 측근이었던 김병준이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의 이력이 주된 관심이 됐다. 사실 지난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이 위기에 처해 김종인의 건너편 이력을 이용했듯이 자유한국당도 김병준의 그런 이력을 최대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복마전 같은 이런 정치판 속에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김병준은 다음과 같은 친절한 발언([문답]김병준, 친노향해 노무현정신 왜곡말라여기도, 저기도 대한민국, 인터넷 머니투데이, 2018717)을 해줌으로써 그에 대한 이슈를 최대한 활용했다.

 

Q. 문재인대통령과 참여정부에서 같이 일하셨는데 지금 어찌 보면 대척점에 서게 됐다
A. 대척이라고 보지 말고 서로 좋은 경쟁관계라고 봐야한다.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Q. 일부 친노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A. 그건 노무현 정신 왜곡하는 거다.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선 '노무현 정신'이 뭘까?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이다. 노무현은 우리 현대 정치사를 지배한 지역모순을 영남의 패권주의와 호남의 반영패투쟁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한나라당을 찍어왔던 영남이나, 새천년민주당을 찍어온 호남이나 모두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선동에 잘못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래서 둘 다 잘못했다는 이 지역주의 양비론’으로 새천년민주당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영남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거의 무시당했다.

 

그럼 노무현은 한나라당에 대한 정통성정당성은 인정했을까? 인정했다. '지역주의 양비론'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순간 한나라당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호남이 그 특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개헌을 목적으로 하는 대연정을 위해 한나라당을 인정하자고 호소까지 했다. 다음이 그 주요 발언이다.

  

노무현은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대타협의 결단으로 극복하자”(노무현, 지역구도 등 정치구조 개혁을 위한 제안: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 프레시안, 2005728)고 주장했고, “국민들이 약 30% 가까운 지지를 보내고 있는 한나라당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이고 정책조율하고 합의하고 할 수 있는 파트너”(노대통령 권력 통째로 내놓는 것도 검토”(종합), 연합뉴스, 2005825)라고 말했으며, 말년엔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대산맥이 계속 유지돼 가야 한다”(노대통령 선거에 걸림돌 된다면 당 비판 감당, 연합뉴스, 2006827)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이 김병준이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라고 말한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노무현이 아무리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으로 무장했다곤 하지만 김병준처럼 자유한국당으로 입당 혹은 합당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오히려 민주정의당과 3당합당을 감행한 김영삼 정신에 더 가깝다.

 

그런데 노무현 정신김영삼 정신은 얼핏 큰 차이를 보임에도 핵심적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영남패권주의다. 2002, 노무현은 경선 승리 후 김영삼을 찾아가 그에게서 받은 시계를 보여주며 좋게 해석하면 3당합당 이전의 야당을 복원(신민주대연합)(-YS ‘80분 밀담내용 촉각, 인터넷 동아일보, 2002430)하려 했는데, 노무현의 이런 퇴행적 역사관은 자신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며 후단협 등장의 계기가 됐을 뿐이다. 오히려 김영삼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무현이 제안한 부산시장 후보천거를 거절함으로써 영남패권주의적 역사의 퇴행을 거기서 끝냈다.

 

결국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주된 정치적 대립의 한 축은 뭔가? ‘노무현 정신’, 즉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이고,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인정하자는 정신이고,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배신했던 정신이며, 김병준이 아이러니하게 활용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투항 정신이다.

 

호남은 왜 비난받()는가? 이런 노무현 정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신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호남 정신은 현대 정치사를 지역주의 양비론이 아닌 영남패권주의와 그 저항으로 봐야 한다는 정신이고, 광주학살을 감행한 전두환의 영남파시즘을 수행한 민주정의당(과 그 계승 정당)의 정당성정통성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 표를 줄 수 없다는 정신이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이 잘못됐다는 문재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정신이고, 지금도 반영패투쟁을 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호남지역주의자들이라고 비난을 받는 정신이다.

 

진실은 뜻하지 않은 시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밝혀진다. 김병준이 자신의 권력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노무현 정신'을 들먹임으로써 노무현을 신화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덮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줬다. 자유한국당이 원하는 해결책이 바로 노무현 정신’=‘양대산맥 정신으로 함께 가자는 것인지 모른다. 가히 노무현 정신의 역습이라 할 만하다.

 

매우 한탄스럽지만, 앞으로도 대한민국 정치는 영남패권주의 정신,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 정신, 그리고 호남의 반영패 정신의 3각 투쟁이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 지역투쟁은 계급투쟁을 무력하게 할 만큼 강력하다. 심지어 허위의식 속에서 진실을 위장하고 싶은 드루킹족들의 준동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역사의 진실과 싸워서 승리한 영원한 권력은 없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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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투쟁이든 투쟁의 논리는 조금 아이러니한 데가 있다. 궁극적으로 투쟁 대상자를 박멸시킬 것이 아니라면(역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그 투쟁 대상자와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핵심 의제가 된다. 예컨대 페미니즘은 남성을, 반영패투쟁은 영남인을, 계급투쟁은 자본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헌법을 보자. 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무슨 말인가? 북한의 근로인민이 주권을 가지고,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 ‘북한이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논리야 우리도 그런 식의 논리로 싸워 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 북한의 주권은 북한 전체 인민이 아닌 근로인민이 가지는 걸까? 예컨대 심신이 허약해 노동을 못 하는 병약자나 노인에겐 주권이 없단 말인가?

 

알랭 바디우는 <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에서 간단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마르크스가 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어떤 개별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 않은, 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따라서 부정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북한 헌법은 20세기 공산주의 실험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태껏 (역사적인 의미로는 거의 절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로 진보해가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이는 20세기 공산주의는 결국 뭔가 다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논리를 갖춰, 새로운 역사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의 극단적 변이 현상에 놀라고 있는 듯하다. 역사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투쟁에나 이런 극단적 변종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변종이 영구적으로 승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식의 극단적 변종의 속물적 언행을 이념적으로 어떻게 제압하느냐가 사실상 모든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

 

근원적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어그로 소동에 당황하는 건 우리나라 주류 페미니즘 철학의 빈곤함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투쟁에서 철학의 빈곤함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모든 투쟁은 그 투쟁을 야기한 적대자를 박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지역, 계급 등등, 모든 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각 범주의 불평등부정의를 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투쟁의 주체와 대상자, 혹은 투쟁 주체의 이념과 대상자의 반이념을 구분하는 것은 투쟁과정에서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불평등부정의가 무가 된다면 투쟁을 위한 적대적 구분이 왜 영구적으로 필요하겠는가? 무가 돼야 한다는 건 결국 투쟁 주체와 대상자의 적대적 구분을 지양하고 보편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투쟁도 투쟁의 주체가 무로 지양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지 못 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실패를 예정한 것이다. 앞으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범주의 투쟁 주체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 언젠가, 반드시, ‘로 지양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희망 없는 모든 투쟁은 불온하다. 투쟁 대상자가 역사적으로 불온했던 그만큼, 아니 어쩌면 열악한 처지에 있는 자들의 피눈물을 오도오용하는 그만큼 더, 불온하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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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컵 기간에 좀 황당한 한국 관련 작은 소동이 두 차례 있었다. 마라도나가 자신에게 환호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눈 찢기 제스처로 화답(?)한 것과, 미국 라틴계 방송 텔레문도의 두 멕시코계 방송인이 한국 덕에 16강에 진출하자 기쁨에 들떠 역시 눈 찢기 제스처를 했는데 주위에서 단체 웃음으로 이에 호응한 사건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고, 두 방송인은 사과를 했지만 무기한 출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어쩌다 가끔 이렇게 남미인들이 우리를 향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된 비하 제스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맞으면 어떤 감정이 생기는가? 내 경우, 감정보다는 (다소 의아할 수도 있겠는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도입부(37)에 나오는 이 구절이 우선 연상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5백 년 동안 한국을 통치해 왔으며 스스로를 일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 온 관료제도의 통치자들을 포섭, 매수 혹은 파멸시켜야 했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그들의 통치를 강요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유럽국가들이 그들의 식민지에 대해 겪었던 것에 비하여 보다 많은 곤란을 겪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제국의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그나마 순조롭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보다 침략자들이 뭔가 우월하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제국 일본은 강점지 조선으로부터 그런 암묵적인 내심의 인정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유럽국가들이 주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보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훨씬 더 컸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사태는 단순한 정신승리였을까? 아니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마주친 제국과 원주민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우열의식이 드러나는 초면의 상대였다. 한데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그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역사 DNA(민족적 집단 무의식)’속 민족적 우월의식으로 따지자면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들에게 제국 일본은 외계인처럼 갑자기 등장해 처음 마주치게 된 우월한 문명국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로부터 문명을 전해주고 부대끼며 살았던 그저 낯익은 외국(왜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오늘날까지 흥미로운 관계를 유발시키고 있다. 예컨대 이렇게 질문해보자. ‘일본인은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할 수 있는가?’ ‘비하는 사전적 풀이에 의하면 업신여겨 낮춤이다. 예컨대 조센징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로 통용된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비하하면서 니그로라고 말하는 용어처럼 완벽한 비하용어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정신승리하는 극우적인 일본인은 그럴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그 비하는 예컨대 한국인이 일본인을 비하하면서 쪽발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비하의미를 담기 힘들다. 말하자면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비하하는 용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조센징니그로같은 사회언어학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보기에, 비하가 완벽하게 성공하려면 비하하는 자의 지위가 비하 받는 자의 지위보다 우월해서 그 간극을 극복하기 힘들어야 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관계에서 비하는 계급적으로 주인이 종에게, 인종적으로 식민자가 원주민에게, 성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등, 자신의 우월한 지배관계를 과시하는 의미이지, 종이 주인에게, 원주민이 식민자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등, 단순히 언행만으로 우월의식을 애써 만들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에야 개인적인 처지에 따라 그 우열의식이 얼마든지 유동적이긴 하지만 전통적집단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관찰해보자. 예컨대 가끔씩 폐쇄된 사적 자리에서 우리가 자를 붙여 말하는 강대국 국민(특이하게도 우리가 강대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 국민에겐 자를 붙여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이 있는데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비하라기보다는 일종의 저항적 언어 습관에 가깝다. 또 가끔씩 뉴스를 보면, 우리보다 약소국이라고 간주하는 나라(예컨대 대만) 국민들이 시위 등으로 우리를 대놓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반응은 이른바 강대국(예컨대 미국) 백인이 어쩌다 사회적으로 우리를 비하하는 것이 이슈가 됐을 때의 반응에 비하면 거의 무반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하가 우열의식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서두의 사례를 풀어보자. 내 개인적으로는, 마라도나나 멕시코계 방송인들의 그런 우발적 행위로부터 비하를 당했다는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 했다. 이는 가정하자면 미국의 어떤 잘난 유명 백인(예컨대 노벨상쯤 수상했다고 해두자)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마라도나나 그들 멕시코계 방송인들도 그런 행위를 한 이유가 비하라기보다는 아마도 그것을 친근한 장난쯤으로 생각했거나 아무 생각 없는 무지(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당연히 그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 행동인지는 배워야 한다)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볼 때, 그들이 한국인에게 눈 찢기 제스처를 하거나 혹 한국인이 그들에게 비너라고 말한다면 ‘우열관계 없는 천박한 비하 흉내일 뿐이다.

 

어쨌거나 비하가 결국 사회문화적 관계의 표시라면, 비하할 수 없는 자들이 철없이 아무나에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나 말을 해댈 때가 아니라 비하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누군가를 (어떤 경우는 무의식적으로) 비하하는 언행을 할 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진다. 예로부터 그랬다. ‘비하는 아무나가 아무나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이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놀릴 때 비하이지, 광대가 왕을 놀리는 건 풍자일 뿐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사회관계에서도 자신이 약자의 처지에 있을 때보다는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언행을 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대칭적 사회 규범으로라도 지위의 형평이 맞춰진다면 그나마 세상이 공평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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