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핑을 하다 난민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한 댓글과 마주쳤다. (제주도 예멘) 난민문제에 대한 찬반토론이야 흔하디흔한 논쟁거리인데, 내가 특별히 ‘날카로운’이라고 말한 건, 그 논리 전개 때문에 한 말이다. 사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드루킹 수준’을 벗어난 댓글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편견 없이 읽어보기 바란다. 필자 ID가 ‘Al Mohamed Salam; 겱ㄷㆍㄱ’로 돼 있는 댓글 전문을 (문장이 깔끔하진 않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만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역지사지를 통해 난민을 받자 같은데 작가는 애초에 난민을 받지 않는 주장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 난민을 왜 무조건 받아야 하는가? 물어본다면 현실적 문제 상황은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며 십중십은 불쌍하고 인류애로써라고 할 것임.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일상생활에서도 인류애를 발휘하여 현실적 여건 문제를 무릅쓰고 고아를 입양한다거나 노숙자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까? 한 명도 없다고 자신함. 이런 사람들은 난민에 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생각보단 사회를 공유재로서 인식하여 피해가 있어도 자신이 아니라 남이 볼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임. 결국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쉽게 쉽게 난민을 받자고 주장하며 이런 모습을 통해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간이란 척을 하고 싶을 뿐임. http://www.ziksir.com/ziksir/view/6601
애초에 난 난민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내 주장보다는 단지 관련 주제의 인상적인 논거를 마주한 단상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관련 주제에 대해 뭔가 코멘트하려니 우선 내 입장부터 밝혀두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단지 난민문제에 대해, ‘인류애 정신을 실현하되, 국제사회에서 각국은 (제국주의가 원인이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원인이든)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법 이전의 원칙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위 댓글 이야기다. 댓글처럼 난민문제는 궁극적으로 ‘인류애(헌법전문엔 ‘인류공영’으로 표현돼 있다)’의 문제가 맞다. 여기서 댓글은 찬성론자들의 이 인류애가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ㆍ사용함으로써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개릿 하딘에 의해 이슈화된 공유재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이전에도 인식하고 있던) 오래된 학문적 주제인데, 엘리너 오스트롬은 관련 주제로 2009년에 여성으로서는 첫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댓글의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는 아마도 대한민국 구성원이 사회체제나 복지제도를 (흔히 인용되는 개릿 하딘의 사례인) 목초지 공유재처럼 이용해 자신의 어떤 사익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경우,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사회라는 공유재를 합리적ㆍ개인적ㆍ극한적으로 이용해 뭔가 사익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그 극대화되는 사익이 뭘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댓글은 명쾌하게 ‘도덕적 우월감’이라고 대답한다. 즉 난민수용 찬성자들은 공유재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자신은 1/n(5천만)의 대가만 치르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극대화시키지만, 이런 게임의 법칙이 장기화되면 공유재인 사회는 피폐화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난민수용 반대자들은 특이하게도 공유재의 피폐를 걱정해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내가 이 댓글에서 가장 날카롭게 느꼈던 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한다’는 명제 자체보다는 그 논거였다. 댓글은 난민수용 찬성자들이 사회를 공유재로 인식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공유재 아닌 자신의 사유재를 이용해 고아나 노숙자를 상대로 똑같이 자신의 그런 인류애를 실현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앞으로 (쟁점이 각각 상당히 다르지만 그만한 공통점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귀화이민, 외국인 노동자, 난민ㆍ인도적 체류 등의 관대한 수용이 정말 사회를 공유재처럼 이용하는 현상이어서 사회가 피폐화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 스스로의 필요(사회공동체 규모의 급속한 와해방지라는 이익) 때문에라도 불가피하게 지금보다 더 관대하게 그런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 고도의 지난한 숙제를 우리 사회는 풀어야 한다.
위에서 나는 각국의 난민수용은 ‘난민발생 책임과 능력에 비례해 난민수용을 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만을 제시했지만, 더 구체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짧은 지면에 자세히 언급하긴 힘들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댓글의 지적처럼, 이런 문제를 단순히 선악의 문제로 재단하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문제가 아닌 경제주체의 입장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경제주체가 취하는 각각의 상이한 태도를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각 경제주체가 (귀화 이민ㆍ난민ㆍ합법ㆍ불법체류자를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유입문제를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과 일자리를 경쟁하는 노동자가 반대하는 건 결코 악은 아니다. 당장 일자리를 경쟁하지 않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중산층의 경우 자신들의 복지비용 증가와 소비지출 감소가 균형을 이룬다면 (댓글의 주장처럼) 찬성론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한편 상호주의 없는 자본과 상품의 무관세 무한 개방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자본가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는 관대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차원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찬반주장자들의 ‘도덕적 우월감 획득 성향’보다 우선 계급ㆍ계층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렇게 따질 때는 국내적 복지(확대)논쟁도 ‘사회의 공유재 인식과 도덕적 우월감 획득’이라는 정신적 차원보다는 ‘계급ㆍ계층적인 이해관계와 착취제도의 안정적 유지’라는 물질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게 우선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가장 뜨거운 논쟁일수록 가장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위 댓글의 주인공이 남긴 화두를 열심히 더 연구해봐야겠다. 사회적 논쟁이 ‘합리적 결론’으로 이끈다 치고,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사회적 이득을 얻는다면 논쟁이라는 골치 아픈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건 ‘공공재’의 무임승차일 수도 있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읽고 싶은 아무 책을 읽기도 힘든 무더운 여름, 알지도 못 하는 댓글러의 무뚝뚝한 댓글까지 운 없이 눈에 띄어 그 화두를 덤터기 쓰려니 더 무더운 여름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