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월드컵 기간에 좀 황당한 한국 관련 작은 소동이 두 차례 있었다. 마라도나가 자신에게 환호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눈 찢기 제스처’로 화답(?)한 것과, 미국 라틴계 방송 텔레문도의 두 멕시코계 방송인이 한국 덕에 16강에 진출하자 기쁨에 들떠 역시 ‘눈 찢기 제스처’를 했는데 주위에서 단체 웃음으로 이에 호응한 사건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고, 두 방송인은 ‘사과’를 했지만 무기한 출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어쩌다 가끔 이렇게 남미인들이 우리를 향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된 비하 제스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맞으면 어떤 감정이 생기는가? 내 경우, 감정보다는 (다소 의아할 수도 있겠는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도입부(37쪽)에 나오는 이 구절이 우선 연상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5백 년 동안 한국을 통치해 왔으며 스스로를 일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 온 관료제도의 통치자들을 포섭, 매수 혹은 파멸시켜야 했었다. …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그들의 통치를 강요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유럽국가들이 그들의 식민지에 대해 겪었던 것에 비하여 보다 많은 곤란을 겪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제국의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그나마 순조롭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보다 침략자들이 뭔가 ‘우월’하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제국 일본은 강점지 조선으로부터 그런 ‘암묵적인 내심의 인정’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유럽국가들이 주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보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훨씬 더 컸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사태는 단순한 ‘정신승리’였을까? 아니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마주친 제국과 원주민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우열의식이 드러나는 ‘초면’의 상대였다. 한데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그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역사 DNA(민족적 집단 무의식)’속 민족적 우월의식으로 따지자면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들에게 제국 일본은 외계인처럼 갑자기 등장해 처음 마주치게 된 우월한 문명국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로부터 문명을 전해주고 부대끼며 살았던 그저 낯익은 외국(왜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오늘날까지 흥미로운 관계를 유발시키고 있다. 예컨대 이렇게 질문해보자. ‘일본인은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할 수 있는가?’ ‘비하’는 사전적 풀이에 의하면 ‘업신여겨 낮춤’이다. 예컨대 ‘조센징’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로 통용된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비하하면서 ‘니그로’라고 말하는 용어처럼 완벽한 비하용어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정신승리’하는 극우적인 일본인은 그럴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그 비하는 예컨대 한국인이 일본인을 비하하면서 ‘쪽발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비하의미를 담기 힘들다. 말하자면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비하하는 용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조센징’은 ‘니그로’ 같은 사회언어학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내 보기에, 비하가 완벽하게 성공하려면 비하하는 자의 지위가 비하 받는 자의 지위보다 우월해서 그 간극을 극복하기 힘들어야 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관계에서 비하는 계급적으로 주인이 종에게, 인종적으로 식민자가 원주민에게, 성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등, 자신의 우월한 지배관계를 과시하는 의미이지, 종이 주인에게, 원주민이 식민자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등, 단순히 언행만으로 우월의식을 애써 만들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에야 개인적인 처지에 따라 그 우열의식이 얼마든지 유동적이긴 하지만 전통적ㆍ집단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관찰해보자. 예컨대 가끔씩 폐쇄된 사적 자리에서 우리가 ‘놈’자를 붙여 말하는 강대국 국민(특이하게도 우리가 강대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 국민에겐 ‘놈’자를 붙여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이 있는데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비하라기보다는 일종의 저항적 언어 습관에 가깝다. 또 가끔씩 뉴스를 보면, 우리보다 약소국이라고 간주하는 나라(예컨대 대만) 국민들이 시위 등으로 우리를 대놓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반응은 이른바 강대국(예컨대 미국) 백인이 어쩌다 사회적으로 우리를 비하하는 것이 이슈가 됐을 때의 반응에 비하면 거의 무반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하’가 우열의식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서두의 사례를 풀어보자. 내 개인적으로는, 마라도나나 멕시코계 방송인들의 그런 우발적 행위로부터 ‘비하’를 당했다는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 했다. 이는 가정하자면 미국의 어떤 잘난 유명 백인(예컨대 노벨상쯤 수상했다고 해두자)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마라도나나 그들 멕시코계 방송인들도 그런 행위를 한 이유가 ‘비하’라기보다는 아마도 그것을 친근한 장난쯤으로 생각했거나 아무 생각 없는 무지(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당연히 그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 행동인지는 배워야 한다)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볼 때, 그들이 한국인에게 ‘눈 찢기 제스처’를 하거나 혹 한국인이 그들에게 ‘비너’라고 말한다면 ‘우열관계 없는 천박한 비하 흉내’일 뿐이다.
어쨌거나 ‘비하’가 결국 사회문화적 관계의 표시라면, 비하할 수 없는 자들이 철없이 아무나에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나 말을 해댈 때가 아니라 비하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누군가를 (어떤 경우는 무의식적으로) 비하하는 언행을 할 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진다. 예로부터 그랬다. ‘비하’는 아무나가 아무나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이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놀릴 때 비하이지, 광대가 왕을 놀리는 건 풍자일 뿐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사회관계에서도 자신이 약자의 처지에 있을 때보다는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언행을 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대칭적 사회 규범’으로라도 지위의 형평이 맞춰진다면 그나마 세상이 공평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