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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촌극을 한번 상상해보자. 가령, 꼴통으로 알려진 어떤 '남성'단체가 이례적으로 여성회원을 수장으로 뽑고, 그녀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여성들이야말로 남성들의 네트워크 때문에 가장 피해를 봤다. 이제 나도 인사 청탁 못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부정청탁을 금지하는 이 법(김영란법)이 앞으로 인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아 왔던 여성들에게 무지하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자 한 '여성'단체 대변인이 당황하며 즉각 이런 기묘한 반발을 한다.

 

"그렇다면 남성 고위공직자들은 그동안 부정청탁으로 승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발언은 여성을 우롱하는 발언이며 청렴하게 일하는 대한민국 고위공직자들을 부정청탁자로 몰아 명예를 훼손한 발언이다. 남성단체 대표는 즉각 이 발언을 취소하고 공직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질세라 옆 동네 '여성'단체 한 남성회원도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돌격한다.

 

"여성 인사소외가 부정청탁 때문이라는 남성단체 대표의 발언은 남녀주의를 넘어서자는 활동가가 할 소리가 아니다. 여성과 성실한 대다수 공무원에 대한 모독이다."

 

짐작하다시피, 이는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과 국민의당 원내대변인 이용호,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부겸의 발언에서 '호남'을 '여성'으로 바꿔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사람들이 호남을 여성으로 바꾸면 그나마 이해력이 다소 증진되는 경우가 많아 그런 것이다. 위 가상발언에서 뭔가 좀 이상을 느꼈다면 내 의도는 달성한 것이다. 번잡스럽지만 다시 원문 기사를 아래에 인용하니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 바란다.

 

별도로 원래 김영란 법이 나쁜 법이 아니다. ‘부정청탁해도 좋은가. 부정청탁 이게 얼마나 나라를 좀 먹고, 사회를 좀먹는지 아시는가. 호남사람들이 가장 많이 와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인사 청탁이다. 내가 고등고시 합격해서 이렇게 성적도 좋고, 능력도 좋고 발휘했는데, ‘나 호남 놈이라고 진급이 안 된다. 너무 억울하다. 진급 좀 시켜 달라.’ 이것이 왜 호남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지, 어떻게 보면 호남사람들이 부정청탁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지역이 호남이다. 이제 이정현도 인사 청탁 못한다. 정운천도 인사 청탁 못 한다. 그러다가 하나만 인터넷에 퍼진다던지, 바로 부정청탁으로 걸린다. 이쪽도 저쪽도 다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부정청탁을 금지하는 이 법이 앞으로 우리 호남 출신들,억울하고 인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아 왔었던 많은 사람들한테 확실히 고리를 끊어 주는 우리에게 무지하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에 주는 순기능도 피해를 최소화 하는 길과 함께 생각해보자. 이정현, <전북 축산업 종사자 간담회 주요내용[보도자료] (새누리당 공보실)>, 2016년 10월 8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전북을 방문 "호남인사 소외는 부정청탁이 원인" 이라며 "김영란법 시행으로 호남인사 소외의 고리를 끊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말했다 한다. 그렇다면 비호남 고위공직자들은 그동안 부정청탁으로 승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호남을 우롱하는 발언이며 청렴하게 일하는 대한민국 고위공직자들을 부정청탁자로 몰아 명예를 훼손한 발언이다. 이 대표는 즉각 이 발언을 취소하고 공직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 이용호, <국민의당 원내대변인 논평>, 2016년 10월 8일.

 

호남 소외가 부정청탁 때문이라는 이정현 대표 발언은 지역주의를 넘어서자는 정치인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호남과 성실한 대다수 공무원에 대한 모독입니다. 김부겸(트위터), <중앙일보>, 2016년 10월 9일.

 

대한민국엔 하나의 큰 병이 있다. '초월'이라는 병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초월을말할수록 이성적이고 휼륭하다고 생각하는 소아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병이다. 계급을 초월해, 남녀를 초월해, 영호남을 초월해, 존재하는 모순을 아예 생각하지 않으면 그 모순이 사라진다고 믿는 유사종교적 병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 '순결무구한' 상상은 반민주적 계급지배, 남성패권, 영남패권 등을 지속시키는 것을 방조한다. 어쩌면 그런 복무를 기꺼이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https://twitter.com/diiib/status/696736165022474240  

 

대구가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김부겸의 영남패권 부정발언이야 워낙 익숙한 위선 사례니 그렇다 치자. 한 가지 더, 일일이 지적하는 게 번잡스럽지만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정현은 "가장 피해를 본 [호남]"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호남지역구 의원이 대다수인 국민의당 대변인 이용호(남원임실순창)는 "비호남공직자들"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받는다. 거의 언어적 사기에 가까운 대변이다.

 

 

 

나는 국민의당이 호남의 심정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이런 식으로 반박해줄 것을 기대했다. "호남사람들이 부정청탁 때문에 가장 피해를 봤다는 이정현 대표의 발언을 영남패권주의 역사에 대한 성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남패권주의 체제를 구조적으로 바꾸지 못 한다면 김영란법도 허사다. 영남패권주의 체제하에서 그런 패권적 인사문제 정도는 아무리 요란하게 1원짜리 부정청탁을 막더라도 얼마든지 암암리에 지속가능하다. 우리 당이 앞장서 이 근원적 악을 끝장낼 수 있게 힘을 모아달라."

 

나는 영남패권주의 본당인 새누리당 이정현의 립서비스를 믿지 않는다. 진심이라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할 것이다. 하지만 불신에 가득찬 지금이라도 '법치주의적 평등'을 홍보하는 이정현의 발언 그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의 (5·18 발언에 대한 반응도 그랬지만) 과거사 성찰을 반대하며, 존재한 적 없는 이상세계를 명분으로 돈키호테처럼 돌격하는 두 야당의 모습은 기괴하기만 하다.

 

지금 새누리당은 영남패권주의를 성찰하는 척하며 호남표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두 야당은 오히려 영남패권주의 역사를 옹호하며 호남표를 지키려 들고 있다. 여야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당이 원하는 건 호남표지 호남이 아니라는 자명하고 허탈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의 '위엄'을 보여주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지금 호남은 영남패권주의에 대해 백치상태거나 위선적인 안철수·문재인에 목을 매고, 그들이 자신들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대책없이 기도만 하고 있다. 나는 내년 대선 전까지 이런 기괴한 일이 실감나게 지속된다면 이정현이 공언한대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호남(인)에서 20%이상을 득표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부디 나를 놀라게 하는 어떤 다른 큰일이 벌어지기를 고대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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