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
서윤빈 지음 / 열림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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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종말은 폭발이 아닌 스며듦으로 온다

- 기후 위기, 우리 안에 이미 시작된 이야기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을까? 지구는 끊임없이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고, 그 신호는 이제 일상 속 깊숙이 들어왔다.

폭우와 가뭄, 산불과 미세먼지, 바다와 육지에서 죽어가는 생물들.

먼 미래에나 찾아올 줄 알았던 종말의 징후들이 현실이 되었다.


​서윤빈 작가님의 연작 소설집 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는 이 지금 우리 곁에 조용히 스며든 재난의 감각들을 문학적으로 포착해낸 작품이다.

클라이 파이(Cli-fi, 기후 소설)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단지 환경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작가님은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간의 감정과 관계의 온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기후재난을 소재로 한 소설은 많아지고 있지만, 이토록 기묘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종말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드물다. 

기후 재난을 다룬 소설이 이토록 흥미롭고 독특할 수 있다는걸, 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를 읽으며 처음 알았다.


최근 들어 기후변화와 재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른바 클라이 파이(Cli-fi), 즉 기후 SF 소설들이 각광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최근엔 무의식적으로 그런 주제를 다룬 책들에 손이 자주 가곤 했다.


총 일곱 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각각의 단편이 독립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인물들의 정서와 세계관은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연작소설이 가진 장점인 단편의 날카로움과 장편의 밀도를 동시에 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재난의 시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흔들림과 사투를 목격하게 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얼굴로 동일한 세계의 균열을 보여주고 있다.

종말을 겪는 여러 시선, 다양한 방식, 반복되는 현실의 균열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단연 첫 번째 이야기, '게'였다.

배달 라이더인 주인공은 궂은 날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어딘가 믿음직하지 않은 연인, 아픈 어머니, 고장 나버린 도시. 그 모든 상황이 주인공의 삶을 짓누른다.

마지막에 가서 배달을 받은 사람의 정체나 마지막 순간의 설명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애매하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잊히지가 않았다.

이게 재난 소설이 맞나 싶으면서도 아니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이 단편에서 특히 반가웠던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후무후무누쿠누쿠아푸아아'다.

하와이의 상징적인 물고기인데, 워낙 특이한 이름 때문에 언젠가 무심코 듣고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물고기의 이름이 소설 속에 등장했을 때는 반가움과 동시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 생물의 낯선 이름은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안에 담긴 허무와 무기력은 결코 의미가 없거나 가볍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인 배달원의 삶 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그 이름이나 금액은, 회색빛 도시의 풍경처럼 이질적이고 쓸쓸하다.

어쩌면 작가님은 물고기의 이름과 가격에서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기묘하게 덧입혀질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게'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기후 재난으로 인해 달라진 사람들의 일상,

그 속에서 깨어지는 감정과 이어지려는 손길을 묘사한다.

두 번째 이야기였던 '농담이 죽음이 아니듯 우리는 땀 대신 눈물을 흘리는데'의 경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픈 감정에 떠밀려서 이게 기후 재난을 가지고 쓴 소설인지,

누군가의 감정을 떠미는 소설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소설의 배경은 참혹할 정도의 기후 위기 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지 기후 소설이 아니라, 기후 속의 인간을 다룬 소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읽는 내내 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여러 번 반복해 읽고 곱씹을수록 보이는 결이 있었다.

몇몇 문장은 되돌아가 다시 읽기도 했다.

연작소설이 가진 단편과 장편의 중간지점, 그 흐릿한 형식이 이 책과 유난히 잘 어울린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종말이라는 건 대단한 폭발이나 붕괴가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느린 파국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도 웃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는 모르고 지나친다.

그 느슨한 인식이 오히려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닐까.


​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는 SF 소설이지만, 너무 멀리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 이 시대, 이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문득문득 자각하게 만든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유쾌하고 위트 있다.

그러나 그 유쾌함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시대에 우리가 읽어야 할 소설은, 어쩌면 이런 소설이 아닐까.


단편소설의 속도감, 장편소설의 서사적 깊이,

그리고 연작이라는 낯선 매체가 만나 한 편의 클라이 파이 SF 소설집이 종말의 방식을 제시한다.

소리 없는 침몰처럼, 차오르는 파국처럼. 지금, 종말은 여전히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이 더운 여름, 집 안에서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잠시 망설이며 앉아 있던 시간조차 갑자기 낯설어졌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 속에 살고 있는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무감각해졌을까?


​나는 이 책을 통해 기후 소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서윤빈이라는 작가도 이번에 처음 만났지만,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이 묘하고도 서늘한 감각을 가진 작가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또 다른 종말을 이야기해 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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