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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무지개 - 제12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
김용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6월
평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죽음을 결심했던 이의 삶에, 과잉된 빛이 스며들다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의 설명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계약, 죽음을 향한 백 일의 카운트다운" 이 얼마나 흥미로운 설명인가?
살짝 장르 소설틱한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 란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내 생각과 다르게 이 책은 조금 더 말랑하면서도 울컥거리는 감정을 끌어올리는 책이었다.
소나기가 그친 후 문득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이 단순한 기상현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찰나의 순간을 통해 사람들은 희망과 기다림을 떠올린다.
이 책 '과잉 무지개'는 이처럼 짧고 아름다운 순간, 그 뒤편에 숨겨진 감정과 서사를 정교하게 풀어낸다. 그것도 삶을 끝내기로 결심한 한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부모님을 연달아 잃고, 보험 사기까지 당하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청년 준재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이미 삶의 의미도, 의지도 모두 잃어버린 준재는 하루하루를 무력하게 견디며 살아간다.
죽음을 생각하지만, 죽을 용기조차 없다는 자조감에 빠져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한 게시글이 눈에 들어온다.
"죽음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단, 헛된 죽음은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앞세운 단체의 메시지는 어쩐지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찾아간 낯선 동네, 재개발이 예정된 이 회색빛 장소에서 준재는 단체와의 계약서를 쓰게 된다.
준재에게는 백일의 시간이 주어지고, 의문의 단체는 준재의 모든 빚을 정리해 주고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지만, 결국 정해진 기한이 끝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죽음 역시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장기기증이라는 이름 아래 의미 있는 죽음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하지만 진짜 그것이 의미 있는 죽음이 맞을까? 어차피 모든 게 만들어진 판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죽음이 아니게 되는 것인데.......
죽음보다는 확실히 백일이라는 죽음을 앞둔 시간이 전해준, 작지만 분명한 변화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님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설정을 빌려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하여금 삶의 현실을 더 또렷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준재는 백 일 동안 정해진 규칙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사람을 만나고, 봉사하고, 식사를 챙기고, 운동을 한다. 처음엔 불편했던 그 시간이, 아주 천천히 준재의 생활을 변하게 만들고 결국엔 그의 감정까지 바꿔놓는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고, 의외의 유대감을 느끼게 되고, 간만에 크게 웃게 된다.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도, 자신이 다시 보고 싶은 얼굴도 생기게 된다.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이 어느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다양한 이유를 만들게 되는 이 과정들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생각과 울림을 전한다.
사실 나 역시 그랬다. 죽음을 여러 번 생각했던 사람으로서, 이 이야기에 그저 공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는 왜 죽지 못하고 사는 걸까. 겁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아주 희미하게나마 삶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결국 그 애매한 경계, 그 아이러니야말로 나를 오늘 하루도 살게 한 힘이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직면하게 됐다.

삶은 늘 무겁지만, 그 끝에 깃드는 무지개처럼 여러 색으로 빛나고 있다. 지금은 힘든 빛이라도 그 이면에 새로운 빛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책은 굳이 삶과 죽음을 무겁게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외롭고 어두운 자리에서 피어나는 작은 온기와 소소한 변화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누구나 인생의 끝자락에 설 수 있다. 그때 누군가 곁에 있어 주고, 너의 삶은 의미 있었다고 말해줄 수 있다면, 믿어 준다면,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중간 정도 지나면 우리는 문득 궁금해진다. 준재는 정말 백 일 뒤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아니면, 그 안에서 피어난 삶의 온기를 붙잡고 어떻게든 다시 걸어가게 될까? 그 약속은 어떻게 깨버릴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결말은 이 책의 핵심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준재가 다시 살아가고 싶다는 그 마음 자체를 갖게 된 그 과정 그 자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삶을 돌아봤다. 무너진 사람을 일으키는 건 거창한 성공이나 감동적인 한 방이 아니라,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 누군가의 손길, 의미 있는 하루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불안한 시대에도, 여전히 그런 무지개 같은 순간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이 책은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진짜 죽음을 원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저 위로받고 싶었던 건가요?"
그리고 이 책은 그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되어준다.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원하고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