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자개장
박주원 지음 / 그롱시 / 202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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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자개장 안의 시간, 기억, 사랑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마음은 전할 수 있다


SF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외계 행성, 우주선, 사이보그, 초능력 같은 이미지가 가장 강하고,

최근 들어서는 인공지능이나 Cli-fi (기후 재난 SF, 클라이 파이) 쪽이  먼저 떠오르는 나에게 '판타스틱 자개장'은 무척 신기하게 다가왔다.


반지하와 노후 아파트, 자개장 같은 정겨운 한국적 소재들이 SF의 외피를 두르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개장이 타임머신의 용도로 사용되는 게 특이했다. 이 책은 전형적인 SF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 가족적인 부분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반짝이는 자개장 안에 담긴 세계, 그 안에 숨어 있는 가족의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써야 할, 그리고 우리만이 쓸 수 있는 한국형 SF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서른아홉 살의 소설가 지망생 자연이 공모전을 기다리던 중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 데서 시작된다. 병원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췌장암 말기, 그것도 이미 혼수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무심하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응어리진 채 남아 있던 자연은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혼란스럽고 억울하기만 하다. 그런 자연이 자신의 방에 있는 오래된 자개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시간은 하루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 뒤로도 자개장은 계속해서 과거의 시간으로 자연을 데려간다. 하루 전, 이틀 전, 8일 전, 그리고 2주 전...

시간은 계속 거꾸로 흐르고, 자연은 그 안에서 아버지를 살릴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은 자신이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판타스틱 자개장이란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 여행이라는 전형적인 SF 장르의 틀 안에서,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낸다는 거다. 작가는 SF를 스펙터클이 아닌 감정의 장치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미래보다 과거에 닿아 있고, 과학보다는 사람에 가깝다. 자개장은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드나드는 포탈이며, 한 가족의 침묵과 단절, 그리고 치유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표현된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핵심인 '자개장'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한국적 정서는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반지하 방의 오래된 자개장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성장과 상처, 추억이 켜켜이 쌓인 기억의 상자 같다.

문을 열면 반짝이는 은빛 자개 무늬가 보이고,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미안함과 전하지 못한 사랑이 숨 쉬고 있다.

작가님은 이 익숙하고 오래된 오브제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난 이 책에서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꽤 인상적이었다. SF에서는 종종 기억이 삭제되거나 조작되는 일이 클리셰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회피하거나 지우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시 마주하고 어루만져야 하는 대상이다. 기억은 간단한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이고 서사이며, 누군가를 향한 미련과 사랑의 증표다. 그래서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공감한 건, 바로 자연의 위치였다.

나도 나름 독립을 했다가 다시 돌아온 캥거루족으로서, 자연의 불안과 복잡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독립하지 못한 나약함에 대한 자책,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시대는 나 같은 사람에겐 너무나 버겁고, 그 버거움을 버티다 보면 결국 마음 어딘가가 고장 나 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나름의 위로이자 또 하나의 경고였다. 지금이라도, 아주 늦기 전에 마음을 표현하라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이해해 주길 바라고, 남보다 쉽게 상처를 주고, 너무 늦게 후회하는 존재들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절대 후회하지 말라고 이 이야기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가족이란, 어떻게든 시간을 돌려서라도 다시 붙들고 싶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애도'에 관한 이야기다.

미처 표현하지 못했고, 후회는 남았지만 기회는 지나간 되돌릴 수 없는 그 관계에 대한 아프고도 따뜻한 애도.


'판타스틱 자개장'은 그저 신선한 SF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SF라는 장르를 빌려, 한국적인 정서와 감정,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따뜻하게 담아낸 하나의 정서적 시간 여행을 그린 한 편의 성장 소설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누군가에게 문득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 지금 이 순간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들. 이 이야기는 시간을 되돌리는 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전하는 법을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언제쯤 나도 이 미안함을 보고픈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수많은 기억이 스치고,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수많은 말이 입안에 머물렀으며, 수많은 다짐과 후회를 하게 된 소설이었다.


​한국적인 SF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고, SF보다도 간단한 시간 여행과 가족의 이야기,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가 보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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