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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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일로 무지무지 바쁜 여름이었지만 그래도 하루끼의 신작을 놓칠 수는 없죠. <해변의 카프카> 하루끼가 하루끼식의 제목으로 7년만에 새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스타일도 하루끼식 그대로입니다. 펄떡이는 횟감처럼 말이죠. 하루끼가 발표한 소설들은 소재로만 살펴보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상실의 시대>처럼 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상상 속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바로 그 두 가지 타입이지요. (물론 저 혼자만의 분류법입니다.)

잘난 척 하지말고 그러면 <해변의 카프카>는 그 둘 중 어느 쪽이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대답합니다. 상상과 현실이 드디어 조우했다고! 따로따로 놀아나던 하루끼의 상상과 현실이 드디어 접착했습니다. 잘 구워진 파전이 파와 밀가루가 따로 놀지 않듯이 말이죠.

이름난 고전을 찾는 것도 좋은 취미지만 이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소설을 출판일에 맞춰 읽는 재미도 상큼합니다. 톨스토이나 체홉이 지금 모스크바 외곽 어느 서재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음, 가슴이 벅차오를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뭉클해지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저에겐 하루끼가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쯤 동경 하늘 아래 어디에서... 물론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파리 하늘이나 뉴욕 하늘 아래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시간 나시는 분은 꼭 읽어보세요. <해변의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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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의 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
대쉴 해미트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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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드보일드가 이런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조합된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뒤끝 없는 깔끔한 맛을 전해준다면 해미트의 소설은 통째로 튀겨놓은 통닭같습니다. 한 마디로 터프, 그 자체입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본다, 주인공인 스페이드가 뭐 이 정도로 막가자는 인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홈즈처럼 생각은 깊이, 행동은 경쾌하게, 실수는 never! 이런 인물은 아닌 게 사실입니다. 대충 생각해보고 일단 부딪혀보고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임기응변을 발휘하고 이게 스페이드의 스타일입니다. 데이빗 핀처의 seven이나 커티스 핸슨의 L.A confidential 이 계속 떠오릅니다. 당분간은 하드보일드 소설에 빠져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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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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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번역이다. 내가 원어로 된 소설을 제대로 읽을 능력이 없으니 정확히는 원래 소설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번역본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70년대 싸구려 문고판에서 볼 수 있음직한 어투가 모든 페이지마다 죽창 든 원주민처럼 기다리다 내 눈이 지나갈 때마다 쿡쿡 지른다. 이 무슨 말인가 깊게는 생각하지 마시라. 한 마디로 번역이 튄다는 뜻이다.

번역하신 이상옥이라는 분은 영국 서섹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는데, 그래서 영어공부는 많이 하신 것 같지만 한글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부적절한 단어의 선택하며, 성격에 걸맞지 않는 대화체하며,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덕분에 아무 죄 없는 조셉 콘래드만 미워하게 됐다. 꼬우면 배워서 영어로 읽어라, 뭐 이런 식이다. 아무튼 자신의 인내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분은 이 책에 도전해 보세요. 그리고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민음사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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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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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이렇게 썼으면 아, 유치해. 당장 집어치워. 말도 안 되잖아. 그럴 법한 이야기를 좀 써봐라. 이런 욕을 얻어 먹었을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홍세화 선생이 겪은 세월이 너무 거짓말 같아 소설로는 되려 사실감이 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취직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파리 지사로 발령을 받지만 남민전 사건에 연류된 과거때문에 졸지에 홍세화 선생은 국제미아가 된다. 한국에 남아있던 남민전 투사들이 모조리 잡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욕조 딸린 방으로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감방신세 질 게 뻔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회사까지 망한다. 결국 오도가도 못하고 홍세화 선생은 파리에 남아야 했다.

남민전 사건이라고 해도 나야 그 세대와는 거리가 멀어 기억에도 없지만 남민전이란 말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니 연류되었던 인사들의 고초가 어떠했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남조선이나 민족이나 해방이나 전선 중에 한 단어만 써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가던 시절인데 그 무시무시한 단어를 굴비 엮듯 엮어 놨으니.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

그나마 프랑스에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기 때문에 자신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나라가 미국이라든가 일본이었으면 홍세화선생은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욕조 딸린 방으로 잡혀갔을지 모른다. 똘레랑스는 영어의 tolerance 즈음 되겠는데 우리 말로 풀이하면 '관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홍세화씨는 그 정도로는 풀이로는 영 만족 못한다.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남도 소중하고,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하기에 남들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고. 꼭 자로 재듯 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할 게 아니고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 등등 복잡하다. 아무래도 3박4일이라도 프랑스를 다녀와야 똘레랑스가 뭔지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하여튼 망명자를 철저히 보호해준 덕택에 홍세화 선생은 프랑스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다.

어쨌든 대학 동기들은 모두 외교관이다 장관이다 하다못해 교수다 하는 데 자기는 택시 기사들 돈치기 하는 뒤에 서서 담배나 피고 있었으니 그 심사가 오죽했으랴. 박정희씨하고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고, 생각 난 거 몇 줄 적은 종이를 하늘에 뿌렸다고, 머나먼 이국의 택시 정류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다니.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이나 황대권 선생도 얼마나 기구한 삶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개인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정책이나 이념을 밀어부치는 나라는 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박정희가 겨우 권총 몇 발로 생을 마감한 게 어떻게 생각하면 참 복도 많은 인간이다 싶다. 그러면 전두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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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2020-11-0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까요?
 
새로운 길을 여는 부모들의 이야기 - 홈 스쿨링, 오래된 미래
민들레 편집실 엮음 / 민들레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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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이지?'
'일곱 살이예요.'
'그럼 내년에 학교 가겠네?'

동네 슈퍼마켙 앞에서 들어봄직한 대화입니다. 캔디라도 입에 물고 있을 꼬마가 일곱 살이라고 대답하면 아주머니는 내년에 학교가겠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둘의 대화 속에는 눈꼽 만큼도 이상한 곳이 없습니다. 일곱 살이면 당연히 내년에는 학교에 가야합니다. 하지만 요컨대,

'몇 살이지?'
'일곱 살이예요.'
'그럼 내년에 학교에 갈 꺼니?'
'아니요. 저는 학교가 싫어요. 그냥 집에서 놀려구요.'
'그래?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이런 대화가 오고가면 어떨까요? 이런 대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셨나요? 유치원이야 생각하기에 따라 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학교라는 곳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조건 가야하는 곳입니다. 아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문명화되었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렇지요. 결격 사유가 되면 가지 않아도 되는 군대는 예외라도 있지만 학교는 무조건 가야 합니다. 여덟 살이 되면 초등학교를, 열네 살이면 중학교를, 열일곱이면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려면 대학도 꼭 가야한다고 생각입니다. 그것은 한낮이 저물면 밤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반드시 겨울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어도 학교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책 제목 그대로 모두가 가는 길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쓴 책입니다. 배운다는 행위는 굳이 학교가 아니라도 가능하다고 믿는 부모들이죠. 홈스쿨. 말 그대로 집이 학교가 된다는 뜻입니다. 남들 다 가는 학교지만 우리 아이는 집에서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가십거리를 쫓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홈스쿨 가정을 이미 여러 번 소개했음에도 우리나라의 홈스쿨 가정이 100집 밖에 안되는 걸 보면 여전히 홈스쿨은 일반 사람에게는 별난 사람들의 낯선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애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건지. 애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보내지 않았다가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하는 건지. 그 어려운 수학이나 물리, 화학을 어떻게 가르칠 계획인지. 홈스쿨에 대한 내 얄팍한 의구심은 겨우 그 정도가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홈스쿨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될 법도 합니다. 결국 '학교'란 국가의 이념에 좀더 가깝운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어렵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무얼 배웠나를 돌이켜 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지금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체육 교과서에는 다양한 수영방법이 수록되었습니다. 자유형을 할 때는 발차기 몇 번에 숨을 어떻게 내쉬고 시선은 어디로 두며....... 등등. 평형,배영,접영에 관한 영법도 자세히 씌여져 있었겠지요.

거기까지는 좋습니다만 웃기는 일은 수영장에서 수영 한 번 배워본 일 없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만 달달 외웠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수영을 할 줄 아는가, 아닌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영법을 머리로 익히고 있나 아닌가로 치뤄졌죠. 몸이 아닌 머리로 말이죠. 물에 빠져 죽는 순간에도 팔 한 번 제대로 젓지 못하고 영법순서만 머리로 달달달 외우고 있겠죠. 수영장이 없으면 동네 개천으로 갈 법도 한데 그런 선생님은 한 분도 안 계셨습니다. 아마 수영을 할 줄 하는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누구나 다 다니기 때문에 나도 다녔고, 그래서 우리 아들, 딸도 다녀야한다, 라고 하기엔 학교라는 곳은 너무 불합리한 점이 많습니다. '학교'가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다시 한번 돌이켜보도록 하는 책, '새로운 길을 여는 부모들의 이야기' . 여러분도 일독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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