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 단맛 쓴맛 매운맛 더운맛 다 녹인 18년 사랑
김찬웅 엮음 / 글항아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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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개인의 생활을 들추어내는 미시사가 유행이다. 물론, 꽤 이전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나, 지금까지 이런 출판 관행이 지속되는 건 대중들이 커다란 보편사 보다도 작고 소소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갖고, 그런 책에 돈을 지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부류 가운데 하나다.

요즘 글항아리에서 나오는 책들을 보면 이런 종류의 책이 많다. 그래서 다 사본다. 사서 읽어볼 수록 글항아리라는 출판사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여하튼.

나는 개인적으로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도 아니고, 선비들의 생활에 대해 그닥 관심도 없는 나다.

하지만, 선비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에 이 책에 손을 뻗었다.

'선비가 아이를 키웠다고? 보통 여자들이 아이를 기르지 않나?' 다분히 현대적 관점이다. '아마 조선은 다를 수도 있겠지. 아이들 교육은 남자가 맡았을 거야' 약간은 내재적 관점이다. 결국 현대적 관점을 조금 미뤄두고 책을 펼쳐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지루할 것 같았던 내용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이문건이라는 조선의 엘리트가 남긴 기록이다.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라 최고의 필체를 자랑하던 그였지만,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몰락한 집안을 다시 재건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열병을 앓아 머리가 둔해진 하나 남은 아들을 호되게 공부시키지만, 아들은 무능력하기만 하고, 그 손자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이문건이 손자를 기르는 각별한 애정으로 넘어간다. 손자를 키우면서 속상한 일, 자랑스러운 일, 기분 좋은 일 등을 기록한 일기를 소개한 책이기에, 그만큼 생동감 넘치는 1인칭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다.

혹 아이를 키우고 있는가. 조선 시대의 한 몰락한 선비의 육아방식이 궁금하지 않은가.

아니면, 정치에서 물러난 엘리트가 더이상 기댈 곳이 없어 손자에게 희망을 걸게 되는 그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서 손자가 말을 잘 안들으면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는 광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 불쌍한 양반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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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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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의 내세주의를 혐오한다. 어떻게든 노력해도 되지 않는 빌어먹을 이 세상 속에서 한 가닥 빛을 발견하게 해주는 내세주의의 순기능이라는 것을 나는 좀처럼 믿고 싶지 않다. 아니, 믿기도 힘들다.

내세 앞에서 지금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재' 그 자체다. 고로, 지금 우리가 처한 비자발적 가난과, 너무나 심하게 다가오는 양극화 현상에 따른 삶의 황폐화는 전적으로 '제로' 그 자체다.

노벨 평화상까지 받고 묻 세계인들의 흠숭의 대상이 돼버린 마더 테레사. 그녀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위에서 내가 말한 그대로의 혐오스런 내세주의다. 인류에겐 내세가 있기에, 지금의 현실적 삶에서 아둥바둥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사유와 행동은 항상 현실 정치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친스가 제시하는 여러 사례들을 볼 때(그가 제시하는 사진자료, 편지, 문서, 신문기사 등 이 모든 것들은 100% 팩트다), 마더 테레사가 믿고 표방하는 내세주의, 거룩한 사상은 그 즉시 '위선'으로 몰락하고 만다.

히친스는 독재자, 사기꾼, 민중을 차별하는 법안을 만들어버리는 교활한 정치가들을 옹호하며, 그들에게서 지원금을 빼내었던 마더 테레사를 거룩한 수녀가 아니라, 음흉한 사업가로 묘사함으로써, 마더 테레사라는 우상을 파괴하고 있다.

가난이야말로 최고로 거룩해질 수 있는 조건이므로(세상에서 기댈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기댈 곳이 내세밖에 없으며, 마더 테레사의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내세를 위해 사람들을 가난으로 내모모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녀는 거룩해지기 위한 최상의 조건(열악한 복지시설 같은 더없이 가난한 풍경)을 유지해왔다는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언론과 권력이 우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엄청난 기부금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약과 주사를 처방하지 못하게 한 이 거룩한 수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그 많은 지원금을 받고도 결국 그녀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고작 30-40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더없이 충격적이다).

자비를 베푸는 듯한 겸손한 행동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비를 팔아 자본을 끌어모은 결과를 초래한 한 여인을 보게 될 때, 우리의 판단은 항상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우상은 깨져야 한다. 물론, 이 책 한 권만으로 훨씬 많은 사람들의 공통감각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다. 끊임없이 검증되어야 할 일이고, 이 책이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래서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이 책에 별 다섯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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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 빠진 조선 - 누가 진짜 살인자인가
유승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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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영웅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존재하고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주구장창 그러한 역사를 배워왔다. 왕과 영웅이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들어왔는가에 초점을 맞춘 역사는, 그러하기에, 그들의 사유와 행위에 중심을 맞추고 있으며, 그렇게 대단한 양반들의 구린내 나는 실제 모습들에는 대부분 눈을 감고 있다.

이러한 보편사에 혐오를 느끼는 사람들이 서서히 역사의 틈새에서 작은 이야기들을, 커다란 이야기에 간극을 만들어낼, 섬세한 이야기들을 발견해왔다. 미시사라 해도 좋고, 생활사라 해도 좋을 이러한 이야기는 이 책에도 담겨 있다.

'미궁에 빠진 조선'은 신문 기사로 따지자면, 사회면에 등장할 범죄기사이고, 장르로 따지자면 르뽀에 가깝다.

저자는 '일성록(日省錄)'에서 '깜이 되는' 이야기를 건져오는데, 이 부분에서 이 책을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성록은 영조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기록되어오던 조정과 신하에 관련된 일기이며, 이는 임금의 입장에서 기록을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재분류, 편집한 책이어서 임금의 취사선택에 따라 보완,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록물이다. 이씨 왕조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라고는 하나, 기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 양반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 기록물에 의존하여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대명률직해', '대전회통' 등 여러 문헌들을 동시에 참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힘이 없는 자들의 입과 손을 빌린 기록물이 아닌 이유로, 사건에 관한 '권력'의 해석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민담, 설화 등을 토대로 한 시대의 망탈리테를 엿보았던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과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생동감 있는 '범죄의 재구성'을 목전에 두고 있노라면, 그러한 생각은 잠시 한 켠으로 밀려난다.

일례로, 저자는 국부를 칼에 베인 채 변사체로 발견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노비일 경우엔 노비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되면 주인은 그/녀를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당시의 이상한 법 체계를 꼬집고, 사건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해석의 갈등'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목숨 보다도 신분제 사회의 기강을 중시했던 양반들의 집단 심결 앞에서 왕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생한 대화체의 문장으로 재구해내고 있다.

이처럼 치정살인, 집단 구타, 원한에 의한 복수, 유아 납치, 상해 또는 살해 등 14가지의 범죄 사건을 통한 저자의 '범죄의 재구성'은, 배움을 한시도 놓지 않았던 계몽군주의 치세에 있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어두운 모습들을 사회면 기사 처럼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어, 한 번 책을 잡으면 좀처럼 쉽게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말 없는 시체 앞에서, 말이 많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어떠한 결론을 내렸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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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발견 - 어른들의 속마음을 파고드는 심리누드클럽
윤용인 지음, 양시호 그림 / 글항아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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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책이다. '통쾌하고 짜릿한 글'이라는 이 책에 대한 시인 안도현의 평은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지만, 중년의 남성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아직 중년이 되지 않아서 일까. 결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난 이 책에 나오는 저자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생활은 다른 거 아냐', '저자가 스스로를 너무 미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온갖 인간군상이 한데 찌끄러져 모여있는 지하철 2호선의 출퇴근길에서, '공간이 부족한데 피해를 주면서 책을 읽고 있는 당신 같은 인간 때문에 통일이 안된다'는 식의 눈치를 주는 몇몇 직장인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꿋꿋이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책 전반을 흐르는 유쾌하고 진솔한 이야기 때문이다.

유쾌함과 진솔함.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커다란 장점이다.

딴지일보 기자 출신답게 저자는 톡톡 튀는 말투로 '어른'에 대한 많은 편견들에 딴죽을 건다. 어른은 좀 참을 줄 알아야 한다, 눈물을 보이지 마라, 근엄해야 한다... 등과 같은 기존의 인식에 대해, 어른은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아야 한다, 중년은 눈물과 함께 시작된다, 엄마의 품이 그립다면 곰인형이라도 껴안고 자라, 감정에 솔직해져라 등등 세세한 이야기를 통해 어른에 대한 기존의 인식체계에 조금씩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새롭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중년의 남성들도 부엌에 드나들자고 노래했던 김국환의 노래('접시를 깨자')에서부터 지금 유행하고 있는 Mness족이라는 트렌드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에 대한 혹은 남자 어른들에 대한 재해석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진솔한 이야기로 중년의 어른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이 책의 매력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중첩되고 나열되어 있어, '어른을 발견했다'는 저자의 외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오랜 사회화 과정을 통한 '체면' 문화 속에서 '자신'을 숨겨오던 중년의 남성들에게 딴지를 걸며 동심원을 그려나가는 작은 파장. 이 정도면 말이 될까.

'딴지'(딴지일보 말고)의 문제의식은 항상 'why'다. 안구건조증에서 허덕이는 대한민국 중년의 남성들에게 눈물과 곰인형을 선사하며('마흔 넘은 사내에게도 곰인형이 필요하다'), 기계적인 어른들의 '어른스러운' 독서행태를 지적하고("지하철에서 만화를 읽는 어른은 경제서, 처세서, 증권책을 보는 어른보다 멋스럽다"), 남의 눈에 낀 티끌은 보면서 내 눈에 낀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너도 환자'라고 외치는 것은 바로 이 '왜요 귀신'이 강림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흔의 남성들이 겪는 결혼, 육아, 사회 생활, 대인관계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뿐만 아니라 고개까지 끄덕이게 만든다.

딴지일보의 기자로 일했던 저자의 이력, 그 속에서의 경험으로 딴지관광청까지 만들고, 노매드라는 여행 컴퍼니까지 차린 사람. 직장을 일종의 놀이터쯤으로 생각하는 이 책의 저자, 윤용인이 발견한 어른은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

제대로 놀줄 아는 어른. 자기 속에 있는 동심을 끄집어 낼 줄 아는 어른. 청춘의 시절처럼 열정적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줄 아는 어른. 사랑 뿐만 아니라, 분노도 주고 받을 줄 아는 어른. 지하철에서 경제서, 처세서, 증권책 보다 만화책을 읽을 줄 아는 어른, 인생 3막(30대)의 연기를 접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4막의 연기를 펼칠 줄 아는 어른...

그런 대단치도 않은 이런 유형의 어른이 우리 사회에 거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이런 당혹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며 마흔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어른들에게 저자는 위로의 말을 잊지 않는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예수.그 예수보다도 더 오래 살고 있는 마흔의 당신. 멋지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빛을 발한다.

* 별 하나를 깎으려다 말은 이유: 블로그에 써놓은 글을 묶어놓은 듯한 이 책에서 '정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공들여 쓴 것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만일 내 짐작이 맞았다면, 그런 글들을 한 데 묶어 '발견' 테마로 분류한 저자 혹은 출판사의 편집능력에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그런 노력 때문에 쉽게 별을 깎을 수가 없었다. 하기사 내가 별을 몇 개를 주든 그게 무슨 공신력을 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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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법칙
존 마에다 지음, 윤송이 옮김 / 럭스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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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은 왜 언제나 화두인가?

선문답을 주고 받던 선사들의 話頭는 언제나 단순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오만가지 의미가 다 담겨있었다. 대화의 화용론적인 규칙을 다 어겨가면서도 상대의 내공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되는 화두. 단순하고 명쾌한 프리젠테이션이 필수인 내 직업을 생각하다 보니, 마에다 교수가 던지는 '단순함'이라는 화두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한 때 미국을 풍미했던 미니멀리즘의 유행이 지난지 오래지만, 아직도 우리는 최소화, 단순화된 세상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설명을 싫어하고 시간병에 걸려 빨리빨리를 외치며 사업 계획도 간략하게 시각화된 프리젠테이션 파일로 보고를 받는 기업 간부에서부터, 복잡한 리모컨 작동을 꺼리며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애플 매니아들에 이르기까지 'simple'은 하나의 화두가 된 듯하다.

언제나 디지털 노마드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애플의 CEO이자 영업맨인 스티브 잡스는 최근,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을 선보였다. 사물의 외형을 최소화시키고 작동법을 단순화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그 조그만 물건 안에 엄청나게 복잡한 기능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역시나 잊지 않는다. 단순성을 가장한 복잡성의 실체. 혹은 복잡성을 은폐시키는 단순성의 위선.

<단순함의 법칙>(원서명 SImplicity)는 MIT 미디어랩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최근 제일기획 주최의 디지털 포럼에서 개최연설을 했던 존 마에다 교수이다. '단순성 컨소시엄Simplicity Consortium'까지 창립한 이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하는 말이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의 내용은 굉장히 단순해 보인다. 마에다 교수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10가지 법칙과 3가지 비법을 제시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목차 한 페이지만 읽고도 책의 내용을 다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10가지 법칙이란, <1. 축소 2. 조직 3. 시간 4. 학습 5. 차이 6. 문맥 7. 감성 8. 신뢰 9. 실패 10. 하나>이고, 3가지 비법이란, <1. 멀리 보내기 2. 개방 3. 힘>이다.

이런 류의 책은 맨 뒷 페이지를 덮자마자 책값에 대한 후회감을 만들기 마련인데, <단순함의 법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손쉬운 이유를 들자면, 서점에 들러 두어시간이면 이 책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고, 저자가 친절하게도 단순함의 법칙에 대한 내용과 토론들을 lowofsimplicity.com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9천8백원(아~ 이 얍쌉한 가격 마케팅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1만원 보다 적은 액수로 느끼게 하려는 저 장사꾼들의 눈속임이란..)에 대해 욕설을 내뱉을 정도의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단순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정서와 뒤쳐질세라 뒤따라가는 한국인들의 미메시스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트렌드나 모종의 '-주의'들은 깊은 고민없는 출판시장이 있기 때문에 널리 확산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대부분의 몰지각한 미메시스의 책임을, 오직 자본만을 쫓는 천박한 출판문화와 그러한 문화를 고집하는 출판시장에 돌려도 무방하리라.

난 마에다 교수가 말하는 모든 법칙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나열할 필요도 없으며, 그럴만한 하등의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마에다가 논리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고, 또한 모든 미니멀리스트들의 설명방식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신중하게 생각하여 축소시키는 것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단순함의 첫번째 법칙을 '축소(Reduce)'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 '축소'라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의 용어를 추가적으로 도입한다. 'Reduce=SHE'라는 등식이 그것인데, 여기서 SHE는 압축하기(Shrink), 숨기기(Hide), 구체화하기(Embody)를 합친 두문자어(Acronym)이다.

이러한 방식의 설명에서 난 단순함을 위한 단 한 가지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새로운 용어를 요청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논리를 엿볼 수 있었다. 단순성을 도입하기 위해 복잡성을 도입해야만 하는 패러독스. 단순성과 복잡성은 결국 보충대리(l'supplement)의 관계에 있어서 단순성은 이미 복잡성을 함의하고 있으며, 복잡성은 곧 단순성과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해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아~ 데리다에게 명복을!). 언어의 통사를 최소화된 형식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노력했던 촘스키안들이 최소주의를 위해 복잡 다양한 새로운 개념들을 도입해야만 했던 역설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지속된다. 두번째 법칙인 '조직'(조직화해서 많은 것도 적게 보이도록 만들자). 마에다 교수는 '조직'을 설명하기 위해 SLIP이라는 용어를 도입하는데, 이 역시 분류하기(Sort), 이름 정하기(Label), 통합하기(integrate), 우선순위 정하기(Prioritize)의 앞글자를 딴 용어이다. 1가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4가지 개념을 도입해야만 하는 복잡한 설명.

글을 쓰는 동안에 내 생각에 모순이 존재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는 '기표 아래서 기의가 미끄러져가는(sliding of the signifie under the signifiant)'(라깡) 언어활동을 하고 있으며, 하나의 단어는 끊임없는 반사놀이를 통해 무한한 언어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비트겐슈타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하나의 개념을 철저하게 설명하기 위한 완벽주의적 태도는 무수히 많은 다른 개념어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성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태도를 볼 때면, 복잡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으며, 결국 그들의 주장은 '단순함이 최고다'라는 공허한 문장으로밖에 압축될 수 없는 생각이 든다.

정보, 교통망, 직업군, 소비자 니즈, 엄청나게 쏟아져나오는 각 영역별 트렌드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그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복잡성 혐오증(complexophobia)'을 갖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선 단순성을 키워드로 잡아라. 차라리 이렇게 솔직한 논리로 설명하고,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각론들을 마련해나간다면 보다 도움이 되는 마케팅 서적이 될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마저 든다.

단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에겐) 거금 1만원에 해당하는 돈을 지출했지만, 난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만을 들었을 뿐이다. 글을 쓰다보니 1만원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실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후회막급이다.

난 아직도 느림 예찬론에서부터 골목길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인지도 모른다. 비록 이 글 역시, 펜이 그려내는 복잡한 선의 미학을 거부하고, 86개로 단순화된 키보드의 이진법적 사용(눌렀다 vs. 뗐다)에 의해 작성된 것이지만, 난 도처에 편재해있는 모든 복잡성을 사랑한다.

허나 나 역시 단순함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단순함을 진정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잡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아마도 21세기에 칸트가 부활한다면, "복잡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없는 단순함은 공허하다. 하지만, 단순함으로 정리되지 않는 복잡성 역시 맹목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 이 글은 의도적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산만하게 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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