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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법칙
존 마에다 지음, 윤송이 옮김 / 럭스미디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단순함은 왜 언제나 화두인가?
선문답을 주고 받던 선사들의 話頭는 언제나 단순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오만가지 의미가 다 담겨있었다. 대화의 화용론적인 규칙을 다 어겨가면서도 상대의 내공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되는 화두. 단순하고 명쾌한 프리젠테이션이 필수인 내 직업을 생각하다 보니, 마에다 교수가 던지는 '단순함'이라는 화두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한 때 미국을 풍미했던 미니멀리즘의 유행이 지난지 오래지만, 아직도 우리는 최소화, 단순화된 세상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설명을 싫어하고 시간병에 걸려 빨리빨리를 외치며 사업 계획도 간략하게 시각화된 프리젠테이션 파일로 보고를 받는 기업 간부에서부터, 복잡한 리모컨 작동을 꺼리며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애플 매니아들에 이르기까지 'simple'은 하나의 화두가 된 듯하다.
언제나 디지털 노마드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애플의 CEO이자 영업맨인 스티브 잡스는 최근,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을 선보였다. 사물의 외형을 최소화시키고 작동법을 단순화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그 조그만 물건 안에 엄청나게 복잡한 기능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역시나 잊지 않는다. 단순성을 가장한 복잡성의 실체. 혹은 복잡성을 은폐시키는 단순성의 위선.
<단순함의 법칙>(원서명 SImplicity)는 MIT 미디어랩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최근 제일기획 주최의 디지털 포럼에서 개최연설을 했던 존 마에다 교수이다. '단순성 컨소시엄Simplicity Consortium'까지 창립한 이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하는 말이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의 내용은 굉장히 단순해 보인다. 마에다 교수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10가지 법칙과 3가지 비법을 제시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목차 한 페이지만 읽고도 책의 내용을 다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10가지 법칙이란, <1. 축소 2. 조직 3. 시간 4. 학습 5. 차이 6. 문맥 7. 감성 8. 신뢰 9. 실패 10. 하나>이고, 3가지 비법이란, <1. 멀리 보내기 2. 개방 3. 힘>이다.
이런 류의 책은 맨 뒷 페이지를 덮자마자 책값에 대한 후회감을 만들기 마련인데, <단순함의 법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손쉬운 이유를 들자면, 서점에 들러 두어시간이면 이 책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고, 저자가 친절하게도 단순함의 법칙에 대한 내용과 토론들을 lowofsimplicity.com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9천8백원(아~ 이 얍쌉한 가격 마케팅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1만원 보다 적은 액수로 느끼게 하려는 저 장사꾼들의 눈속임이란..)에 대해 욕설을 내뱉을 정도의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단순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정서와 뒤쳐질세라 뒤따라가는 한국인들의 미메시스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트렌드나 모종의 '-주의'들은 깊은 고민없는 출판시장이 있기 때문에 널리 확산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대부분의 몰지각한 미메시스의 책임을, 오직 자본만을 쫓는 천박한 출판문화와 그러한 문화를 고집하는 출판시장에 돌려도 무방하리라.
난 마에다 교수가 말하는 모든 법칙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나열할 필요도 없으며, 그럴만한 하등의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마에다가 논리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고, 또한 모든 미니멀리스트들의 설명방식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신중하게 생각하여 축소시키는 것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단순함의 첫번째 법칙을 '축소(Reduce)'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 '축소'라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의 용어를 추가적으로 도입한다. 'Reduce=SHE'라는 등식이 그것인데, 여기서 SHE는 압축하기(Shrink), 숨기기(Hide), 구체화하기(Embody)를 합친 두문자어(Acronym)이다.
이러한 방식의 설명에서 난 단순함을 위한 단 한 가지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새로운 용어를 요청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논리를 엿볼 수 있었다. 단순성을 도입하기 위해 복잡성을 도입해야만 하는 패러독스. 단순성과 복잡성은 결국 보충대리(l'supplement)의 관계에 있어서 단순성은 이미 복잡성을 함의하고 있으며, 복잡성은 곧 단순성과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해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아~ 데리다에게 명복을!). 언어의 통사를 최소화된 형식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노력했던 촘스키안들이 최소주의를 위해 복잡 다양한 새로운 개념들을 도입해야만 했던 역설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지속된다. 두번째 법칙인 '조직'(조직화해서 많은 것도 적게 보이도록 만들자). 마에다 교수는 '조직'을 설명하기 위해 SLIP이라는 용어를 도입하는데, 이 역시 분류하기(Sort), 이름 정하기(Label), 통합하기(integrate), 우선순위 정하기(Prioritize)의 앞글자를 딴 용어이다. 1가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4가지 개념을 도입해야만 하는 복잡한 설명.
글을 쓰는 동안에 내 생각에 모순이 존재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는 '기표 아래서 기의가 미끄러져가는(sliding of the signifie under the signifiant)'(라깡) 언어활동을 하고 있으며, 하나의 단어는 끊임없는 반사놀이를 통해 무한한 언어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비트겐슈타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하나의 개념을 철저하게 설명하기 위한 완벽주의적 태도는 무수히 많은 다른 개념어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성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태도를 볼 때면, 복잡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으며, 결국 그들의 주장은 '단순함이 최고다'라는 공허한 문장으로밖에 압축될 수 없는 생각이 든다.
정보, 교통망, 직업군, 소비자 니즈, 엄청나게 쏟아져나오는 각 영역별 트렌드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그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복잡성 혐오증(complexophobia)'을 갖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선 단순성을 키워드로 잡아라. 차라리 이렇게 솔직한 논리로 설명하고,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각론들을 마련해나간다면 보다 도움이 되는 마케팅 서적이 될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마저 든다.
단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에겐) 거금 1만원에 해당하는 돈을 지출했지만, 난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만을 들었을 뿐이다. 글을 쓰다보니 1만원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실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후회막급이다.
난 아직도 느림 예찬론에서부터 골목길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인지도 모른다. 비록 이 글 역시, 펜이 그려내는 복잡한 선의 미학을 거부하고, 86개로 단순화된 키보드의 이진법적 사용(눌렀다 vs. 뗐다)에 의해 작성된 것이지만, 난 도처에 편재해있는 모든 복잡성을 사랑한다.
허나 나 역시 단순함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단순함을 진정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잡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아마도 21세기에 칸트가 부활한다면, "복잡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없는 단순함은 공허하다. 하지만, 단순함으로 정리되지 않는 복잡성 역시 맹목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 이 글은 의도적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산만하게 씌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