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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탈 경영전략 - 기업과 소비자 상호작용의 숨겨진 법칙을 밝히는
박찬정 지음 / 책든사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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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탈이 무슨 말인지 생소한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이 책엔 복잡계와 관련한 생소한 용어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저자는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 편에 속한다. 

프랙탈은 만델브로가 해안선의 길이를 측정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호명한 개념이다. 기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자연을 원통, 삼각형, , 원뿔 등의 정형적인 도형을 가지고 1:1 대응 관계에 가까운 선형적인 관점으로 자연을 해석해왔다. 하지만, 만델브로는 자연을 리모델링하는 새로운 도구로서 프랙탈을 소개했으며, 지금 저자는 그 프랙탈을 브랜드 3.0 버전의 새로운 해석을 위한 도구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 우리가 긍정해야 할 전제는 대략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1. 영역을 막론하고 현재는 복잡계의 관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복잡계의 중핵으로서 프랙탈 이론을 내세우고, 그 배경에는 카오스 이론, 자기조직화, 임계점, 적응과 진화, 네트워크 이론 등 기존 복잡계를 설명하고자 한 방법론들을 배치해야 한다.

3. 데이비드 아커가 마련한 기존의 브랜드 전략은 기업 중심의 전략이며, 기업-소비자, 소비자-소비자 간 커뮤니케이션이 고려되지 않은 유클리드적인 전략이다.

내 생각엔 지식인들이 학제화, 융합, 통섭 등 결국은 같아 보이는 다른 개념어들을 남발했던 것에는 더이상 사태나 현상이 단일한 관점에서 설명되지 않고, 'A를 입력하면 B가 나온다'는 인과주의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 문화계, 산업계에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미래를 쉽게 (혹은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것 역시 기존의 관점과 분석틀, 그리고 세계관이 다분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가 쨍쨍한 날 우산을 헛 들고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상청을 욕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기상청 체육대회에도 비가 온다는 말이 나돌겠는가. 슈퍼 컴퓨터가 아무리 많은 변수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기상에는 더욱더 복잡한 변수들이 있기 때문이며, 특히 우리 나라는 조수간만의 차이라든가, 기상에 미치는 외삽적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기상 예측은 보다 더 복잡계의 관점으로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복잡계는 단순히 복잡한 여러 요인들이 공존하는 세계가 아니다. 복잡계는 '창발' 현상이 필수적인 요소로서 전제되어야 한다. 즉, 창발이 없으면 복잡계로 볼 수가 없다. 토플러가 제 1의 물결에서 3의 물결까지 말한 일종의 '계'가 현 시점에 모두 공존하는 것처럼(비동시성의 동시성), 이 사회에도 단순계와 복잡계가 공존하고 있으며, 우리는 사태나 현상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먼저, 우리의 연구 대상이 단순계에 머물고 있는지 복잡계에 머물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문제 영역을 검토한 후, 만일 브랜드 전략을 설계한다고 할 때, 해당 브랜드가 기존 시장 내에서 적응해야 하는 수준에 있는 것인지, 혹은 진화해야 하는 것인지를 진단할 수 있다. 가령, 물량을 때려박기만 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는 단순한 시장일 경우에, 그리고 다른 역량을 지니지 못한 중소기업일 경우에, 무턱대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여 리스크를 감수하라고 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모든 창조적인 전략에는 리스크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계속 브랜드로 이야기해보자. 복잡계 속에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시장 내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브랜드는 새로운 창발을 위한 첫걸음으로서 '사이공간'을 창출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사이공간-꼬리표-양의 되먹임 촉매>라는 3단계 프랙탈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브랜드 3.0 담론을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미샤, 촛불시위, 붉은악마,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등의 케이스를 제시하고 있는데, 프랙탈 브랜드 전략이 더욱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케이스가 분석되어 업계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경영학 위주의 천박한 기업 문화와 미국을 향한 사대주의 근성이 외래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에 비추어볼 때, <프랙탈 경영전략>은 서구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복잡계 담론의 필요성을 쉽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 생소하기만 한 기호학적 방법론(그레마스 기호학)을 분석의 틀로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해외의 모델들을 일방적으로 모방하여 흉내낸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독할 필요가 있다.

다만, 뒷 페이지로 갈수록 자주 등장하는 오타와 세련되지 못한 표지 디자인, 종이 재질의 선택에 있어 출판사에 가벼운 비판을 해주고 싶다. 특히 상당 부분 등장하는 오타는 과연 교정을 본 것인지 의심할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 별 다섯개를 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느낀 건, 우리만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자 하는 저자의 다양한 노력과 고민이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3.0 담론의 부재 속에서 이 책의 존재감이 더욱 느껴지는 것은 과연 나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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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85가지 얼굴 - 후설 현상학의 주요 개념들
조광제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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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후설리안들을 위한, 혹은 후설 현상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매우 친절하고 재미있게 작성된 개념의 길라잡이서다.

저자는 후설 현상학의 '고지'에 도달하기 위한 85가지 주요한 개념어들을 설명하고 있다.

자기소여성, 사태 자체에로 zu den sachen selbst, 순시 기술, 노에시스, 에포케, ... 등의 주요한 이정표를 통해 저자의 음성을 따라가다 보면, 후설 현상학이 그리고 있는 철학의 실루엣과 함께,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어떠한 것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대가라도 그 명성에 현혹되지 않"(p.45)아야 한다는 그의 학문적 태도가 지니는 매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어 폰트만 빼고 책 표지 디자인 부터 내부 디자인까지도 모두 마음에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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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 비판, 비평정신 1
박홍규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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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3학년 시절. 벌써 7~8년의 세월이 흘렀다. 학회 강독을 위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진우 역, 한길사 刊)을 과실에서 읽고 있었다(독일어 실력이 미천하여 영어판과 대조하면서 읽고 있었던 데다가 어줍지 않은 희랍어 실력으로 군데군데 개념어 번역을 보니 오역 투성이임을 알 수 있었던 책이다.).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NL 선배 하나가 들어와 무슨 책이냐며 책 커버를 휙 들쳐보더니 책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것이다. '이딴 책을 왜 읽느냐'며. 선배의 교양머리없는 횡포에 책 한 권을 두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있었다.

"그럼 왜 읽으면 안되는지 이유를 대보세요"

"..."

이유가 궁색해지자 선배는 그냥 과실을 나가버렸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아렌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몇 몇 꼴통 운동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던 그 날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박홍규가 말하는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의 한 영역에 슬쩍 집어넣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추상적인 비판과 독서를 통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려는 무책임한, 수준 이하의 태도. 추상의 추상이고, 또한 왜곡된 추상이다.

쉽게 욕할 수 없는 지식인 박홍규가 책을 냈단다.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제목이 참으로 도발적이다. 니들이 읽었다고 하나 과연 그게 읽은 것이 맞느냐. 제대로 읽긴 한 것이냐. 하는 반문을 제목으로 옮긴 것이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내용 또한 도발적이다. 박홍규는 아렌트와 토크빌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고 그 둘을 연결시켜, 아렌트를 토크빌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자치와 자유의 민주주의. 평등 보다 '자유'를 중시했던 '자유'주의자(이 표현의 적확성은 잘 모르겠다) 토크빌. "혁명의 목적은 자유의 창설"(p.272)이라고 선언한 자유의 신봉자 아렌트.

그들의 실천적 정치사상 혹은 정치적 실천의 프레임이 현 CEO 출신 대통령 이명박이 집권하고 있는 요즘 어떠한 유효성을 지니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일테면, 최근 광화문 일대의 '촛불'이 가진 가능성과 실제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집권층의 철저한 개무시로 인한) '촛불'의 무기력함에 대한 설명의 틀거리를 토크빌과 아렌트의 정치 사상으로부터 마련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아렌트와 토크빌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 좀 더 제대로 연구해보는 것. 그래서 쥐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후배의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몰상식한 행동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뭐 그런 거 아닐까. 제대로 알고 제대로 씨부리는 인문학도, 인문학 지식인들의 모습들이 아쉬운 이 때 속시원한 책 한 권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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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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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은 소수만이 알 수 있는 기호체계가 생기면서 새로운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단순한 기호체계가 그러하거늘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문자체계의 발명은 그 파급효과가 더욱 컸을 것이다. 문자의 발명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구별짓고, 아는 자의 모르는 자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횡포를 유도하게 됐다.
문자를 아는 자는 정신적 영역에서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정신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한 인간은 이내 정치적인 헤게모니까지 장악하게 되는, 지금으로서는 ‘자연스런’ 일이 발생하게 됐다.

하지만,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현대 사회의 경우엔 어떠한가. 문자체계 독점을 통한 권력 강화에 실패한 지배계급은 이제 정보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권력에 불리한 정보를 담은 책을 불온서적으로 간주하여 책의 확산을 막는다거나, 더 심하게는 유통망을 초토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불리한 생각이나 정보를 담고 있는 책, 노래, 영화들을 판금조치했던 군부독재 정권은 정보의, 지식의, 사유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한국 정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성상파괴자들이 icon의 힘을 가장 잘 이해했듯이.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이하 <위험한 책들>)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검열시스템의 작동 기제를 조선사회에서 발견하고 있는 재밌는 책이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림의 훈구파 사냥법 중 하나는 책에 대한 말도 안되는 검열이었다. 사림은 최초의 국문 표기 소설인 <설공찬전>이 조선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성리학의 근본원리를 흔든다는 명분으로 채수를 탄핵했으나, 실제 이유는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옮겨가던 정권 변동의 과도기에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한 얄팍한 정치술에 있다. 이유야 어떻든, 결국 사림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특정 책을 금지시키고 그 유통을 막은 것이다.

어득강, 윤춘년의 ‘서사를 설치하자’는 주장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 역시, 지식의 확산을 막아 백성들이 똑똑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었다. 특유의 외교력과 백성들을 현장에서 지휘할 줄 알았던 영명한 소현세자로부터 권력 찬탈의 위험을 느낀 인종이 결국 아들을 독살하게 된 것 역시, 소현세자가 훌륭한 군주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기록하고 있는 ‘심양장계’라는 국왕 보고서 때문이었다.

책의 유통을 막으려고 애썼던 조선의 권력자들. 그러면서도 새로운 책들에 대한 수집벽을 감추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웃기는 시츄에이션. 이러한 이야기를 열 세 개의 꼭지로 풀어가는 <위험한 책들>은 ‘책’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파급효과를 가장 잘 이해했던 조선 사회 권력층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을 둘러싼 싸구려 투쟁술들이, 조선을 진정 아침(朝)이 고운(鮮) 나라로 만들어 줄 계기를 놓치게 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책들이 조선을 조선이게끔 하는 계기를 훔친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있는 이 책에 별점 다섯 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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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문장 -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
이건창 지음, 송희준 옮김 / 글항아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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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최연소 과거급제자. 10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문장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키워나갔던 이건창. 이 책의 편집자는 그런 이건창을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이라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건창의 문장이 얼마나 유려하다거나, 빼어나다거나, 혹은 질박하지만 그 뜻이 심오하다거나 하는 점은 잘 모르겠다. 한문에 익숙치 않은 나로선 당연한 결과이겠거니와, 이 글이 원문의 운율을 파악하기 힘든 쉬운 번역어로 서술돼 있어 더욱 더 그러한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훌륭한 문장을 쓰는 방법에 대한 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과연 ‘이건창은 문장이로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의 문장이론을 소박하게 요약하자면... 속어를 사용하더라도 뜻이 확립되면 빠른 속도로 붓을 놀려 뜻을 얽은 후, 언어를 다듬을 때엔 천만 글자로 이뤄진 장문일 경우라도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들여 짧은 율시 한 편을 짓듯이 해야 한다. 언어를 구사함에 있어 옛사람의 뜻과 자신의 뜻을 명확히 구별되게 하여 진부한 글로 전락함을 막고 표절한 글이 되지 않도록 독자들의 혼란을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기자가 주문만 하면 그 주문과 똑같이 글을 생산해대는 작금의 지식분자들이나 표절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대한민국 아카데미에 그대로 되풀이해주고 싶은 말이다.

이건창은 주된 뜻과 이에 대적하는 뜻을 균형있게 다루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여 주된 뜻이 승리하게 될 때, 진정 뜻이 얽어졌다고 언급한다. 자신만의 생각과 그 생각에 부합하는 개념어 사용을 통해 의미를 왜곡하고, 견강부회하는 많은 글들을 꼬집는 생각이다. 반대되는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의 그 끝까지 첨예하게 파고들어 상호부정과 상호긍정의 연쇄작용을 거칠 때 진정 좇아야 할 主意가 살아남는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글일지라도 리듬이 없는 글은 죽은 것이며, ‘귀, 눈, 코, 입’은 있는데 ‘눈썹과 수염’이 없는 밋밋하고 개성없는 글은 좋지 못한 글이라고 한다.

과연 이 시대의 ‘문장가’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있을까. 누구나 글을 쓰고 읽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는 누구나 글을 잘 쓰는 세상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는 누구나 쉽게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을 함의한다. 빠르게 의견을 개진해야 하며, 빠르게 읽고 반응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 탓도 있겠지만, 언어를, 고유한 아우라를 지닌 사유가 아니라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간주하는 인식이 우리의 글쓰기를 천박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생각마저 하게 된다.

‘한 글자를 볼 때마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라’는 고종의 주문. 사람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언어 조탁에 있어 한 글자 한 글자에 쏟는 지대한 정성. 이건창의 글을 부리는 모습을 고종은 이미 간파했던 것이리라. 과연 이 시대에 이건창과 같은 자가 또 있을까.

이건창의 글과 역자의 글, 편집자의 글이 혼재되어 잘 구분되지 않는 단점을 제외하고는, 제목에서부터 구성, 심지어 활자 크기와 줄간격에 이르기까지 모두 100점 만점에 150점을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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