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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 빠진 조선 - 누가 진짜 살인자인가
유승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4월
평점 :
왕과 영웅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존재하고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주구장창 그러한 역사를 배워왔다. 왕과 영웅이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들어왔는가에 초점을 맞춘 역사는, 그러하기에, 그들의 사유와 행위에 중심을 맞추고 있으며, 그렇게 대단한 양반들의 구린내 나는 실제 모습들에는 대부분 눈을 감고 있다.
이러한 보편사에 혐오를 느끼는 사람들이 서서히 역사의 틈새에서 작은 이야기들을, 커다란 이야기에 간극을 만들어낼, 섬세한 이야기들을 발견해왔다. 미시사라 해도 좋고, 생활사라 해도 좋을 이러한 이야기는 이 책에도 담겨 있다.
'미궁에 빠진 조선'은 신문 기사로 따지자면, 사회면에 등장할 범죄기사이고, 장르로 따지자면 르뽀에 가깝다.
저자는 '일성록(日省錄)'에서 '깜이 되는' 이야기를 건져오는데, 이 부분에서 이 책을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성록은 영조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기록되어오던 조정과 신하에 관련된 일기이며, 이는 임금의 입장에서 기록을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재분류, 편집한 책이어서 임금의 취사선택에 따라 보완,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록물이다. 이씨 왕조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라고는 하나, 기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 양반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 기록물에 의존하여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대명률직해', '대전회통' 등 여러 문헌들을 동시에 참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힘이 없는 자들의 입과 손을 빌린 기록물이 아닌 이유로, 사건에 관한 '권력'의 해석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민담, 설화 등을 토대로 한 시대의 망탈리테를 엿보았던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과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생동감 있는 '범죄의 재구성'을 목전에 두고 있노라면, 그러한 생각은 잠시 한 켠으로 밀려난다.
일례로, 저자는 국부를 칼에 베인 채 변사체로 발견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노비일 경우엔 노비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되면 주인은 그/녀를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당시의 이상한 법 체계를 꼬집고, 사건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해석의 갈등'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목숨 보다도 신분제 사회의 기강을 중시했던 양반들의 집단 심결 앞에서 왕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생한 대화체의 문장으로 재구해내고 있다.
이처럼 치정살인, 집단 구타, 원한에 의한 복수, 유아 납치, 상해 또는 살해 등 14가지의 범죄 사건을 통한 저자의 '범죄의 재구성'은, 배움을 한시도 놓지 않았던 계몽군주의 치세에 있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어두운 모습들을 사회면 기사 처럼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어, 한 번 책을 잡으면 좀처럼 쉽게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말 없는 시체 앞에서, 말이 많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어떠한 결론을 내렸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