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면 속의 셰익스피어 -
의문점1. 셰익스피어의 친필 작품은 한 권도 남아있지 않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37편의 희곡과 154편의 시 중 자필 원고는 한 장도 발견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필적으로 남은 것은 법적인 서류에 서명한 것이 전부라는것이다.
의문점2.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면모와 셰익스피어는 너무 다르다.
그의 작품들은 궁정 문화뿐만 아니라 의학, 법률, 심지어 외국의 동정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방대한 분야의 지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작품에 사용된 단어는 약 2만개가 넘는다. 당시 성경에는 약 1만개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가 읽었을 만한 서적은 없었다. 또한 그의 부모는 물론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문맹이었다.
의문점3. 셰익스피어 생애의 대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극작가로 데뷔하기까지의 7년의 시간은 베일에 싸여있다.
고향에 있는 생가는 셰익스피어 사후에 추정되었다고 한다.
의문점4.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애착
-소네트 55번 中-
대리석도 왕후의 황금 기념비도 이 힘있는 시보다 오래 가지 못한다.
이글에서 볼수 있듯이 셰익스피어는 작품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애착을 보였다.
그런 그가 은퇴 후 고향에 돌아왔을때 한 권의 작품도 가져오지 않았고, 유언에서 조차 작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고 한다.
■ 셰익스피어 추정 인물
첫번째, 크리스토퍼 말로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도착할 무렵 극작가로 큰 성공을 이루고 있던 말로는 사형에 처할 위기에 직면하자 자신의 죽음을
사고로 위장하여 위기를 벗어났고, 그 후 정체를 감추고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두번째, 프란시스 베이컨
1500년대 후반 영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힌 프란시스 베이컨이야말로 그 희곡을 쓸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출세욕이 강했는데 출세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희곡을 썼지만 당시 천하게 여겨졌던
연극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1611년 베이컨이 법무장관으로 취임하던 해, 셰익스피어도 '헨리8세'로 활동을 중단했다.
컴퓨터로 작품속 언어를 분석한 결과 셰익스피어의 것과 이들의 작품은 너무 달랐다.
셰익스피어 대신 내세운 30여명의 후보들 가운데 셰익스피어의 저작논란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인물이 있었다.
세번째, 옥스퍼드 백작-에드워드 드 비어 경
그는 백작이라는 신분답게 폭넓은 교육을 받아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지만
자신의 신분과 시대적 상황으로 'Shakespear'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필명은 옥스퍼드 가문의 문장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사자가 창을 휘두르고 있는 문장.
영어로 창은 'spear', 흔들다는 'shake'로 두 단어를 합성한 것이 'shakespear'라는 것.
2002년 1월 29일 열린 셰익스피어 저작논란에 대한 세미나에서 놀라운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옥스퍼드 백작과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게다가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의도적으로 그려넣은 그림자가 있는데
이것은 얼굴가면을 표현한 것으로 그림속 인물이 셰익스피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원본으로 알려졌던 그림속 인물의 의상은 백작과 비슷한 귀족의상이다.
하지만 당시는 의상으로도 신분을 구별하는 시대였으며 셰익스피어는 귀족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정황을 미루어 초상화속 인물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옥스퍼드 백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2005년 4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는 가짜로 밝혀진다.
영국에서 전문가들이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이 그림을 분석한 결과, 1814년경의 납 성분이 포함된 초상화의 물감으로
세익스피어 사후 200년 후에나 사용된 것이다.
만약, 유골을 분석한다면 확인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는 이런 문제를 예견한 것일까. 그는 묘비명 대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만들어 놓았다.
친구여...
부디 여기 담긴 흙먼지를 파내지 마시게!
이 묘지 돌들을 그냥 두는 자는 복을 받고
내 뼈를 움직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니....
_신비한 TV 서프라이즈 中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