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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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시인은 시집으로 만 부를 찍었다고 한다. 시인이 얼마나 인기가 많고 대중적인지 가늠이 되는 부분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작년 7월 난다에서 나온 시인의 산문집. 진녹색의 양장본 표지와 그림, 그리고 갱지 같은 느낌의 종이까지 참 예쁜 책이다.


서촌 그 책방에 갔을 때 사장님이 이 책에 대해 쓰신 감상평을 읽었다. 시인이 아버지에 대해 쓴 부분이 압권이라고 하며 ‘세상에 자기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세상에는’ 라는 평을 남겼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절은 서촌 그 책방에서 내가 가저온, 책방 주인의 유언이 되겠다.


나는 그가 멋진 어른들에게 들은 말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생선 알러지가 있는 직원에게 매일 ‘이것 안 드실 것입니까?’하고 물어보는 예의바름과 성의, 어린 친구의 고충을 마음으로 이해해주며 나이듦의 나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자세는 내가 갖고 싶은 종류의 것들이다. 이 책에서 내가 찾아낸 유언은 이런 부분들이었다.


30대의 젊은 시인이 글을 쓰며, 사랑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며 한 고민과 통찰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생각보다 큰 울림을,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이는 벌써 옛적부터 성인이지만, 아직 ‘어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읽기에 참 좋은 산문집이다. 시인에게는 이렇게나 좋은 어른들이 많은데, 과연 나는 어떤 어른에게서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훗날 내가 이런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 업무회의 시간에 ‘전략’ ‘전멸’같이 알고 보면 끔찍한 뜻의 전쟁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고 점심에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먹자"라는 진부한 말을 했으며 저녁부터는 혼자 있느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19-20p)

1998년 가을, 여고 시절 그녀가 친구와 릴레이 형식으로 주고받은 편지였는데 "오늘 점심은 급식이 빨리 떨어져서 밥을 먹지 못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25p)

여행과 생활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53p)

울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70p)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 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하는 것이라 나는 그때 김선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선생님의 질문에 맞춰 나는 가족사나 연애 이야기, 앞으로 쓰고 싶은 시,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 말했고 그것보다 더 자주 치기와 서투름 같은 것들을 보여드렸다. (74p)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81-82p)

하긴 나는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좋아한다. 밤새 내린 눈으로 산이 하얗게 변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흰 산을 눈에 넣으며 감탄하는 일, 따듯한 물에 언 발을 담그는 일,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일…… 우리와 함께하는 작은 일들은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흔한 것이다. (101p)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110p)

곰치국의 간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전히 수련 같은 고명들이 가득 들어간 일이나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같은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일, 어제 자리한 곳에 오늘의 빛이 찾아 비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큰일도 아니었습니다. (133p)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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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선집 3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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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고 추천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 이렇게 좋은 책이 작년의 마지막 독서였다. 나름 의미있고 뿌듯한 마무리인 것 같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길에 오른 어린 싯다르타와 그를 따르는 친구 고빈다. 그들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고, 사문들을 따라 재물 없이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고, 열반에 오른 고타마의 말씀도 듣는다. 고타마의 제자가 되기로 한 고빈다와 달리 싯다르타는 다시 수행길에 오른다. 그는  사랑과 쾌락을 배우기도 하고, 장사를 하며 물욕에 몰락하기고 한다.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유치하고 어리석은 애정에 마음의 상처를 입다가도 가난한 뱃사공에게서 삼라만상의 진리를 배우기도 한다.


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자아란 결국 무엇일까? 열반에 오르는, 경지에 다다르는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평소 좋아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을 이렇게 접하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 말이 필요없는 참 좋은 작품이었다. 제목이 <싯다르타>인지라 석가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석가의 또다른 삶이 있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리따분할 수 있는 부처의 생애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쓸 수 있다니.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순식간에 읽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자아나 가장 내적인 것과 같은 궁극적인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15p)

아침의 첫 햇살이 방 안을 비추었다. 그 브라만은 싯다르타의 무릎이 약간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얼굴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싯다르타가 이제 더 이상 자기 곁에 없음을, 집에 없음을, 자신에게서 떠나 버렸음을 깨달았다. (23p)

"... 네가 그곳에 계속 머물렀더라면 얼마 안 가 물 위를 걷는 법도 배웠을 거야."

"나는 물 위를 걸을 마음은 하나도 없어," 싯다르타가 말했다. "늙은 사문들이나 그런 재주들에 만족하라지." (39p)

‘... 나는 자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단지 자아를 속이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을 뿐이야. 정말이지 자아만큼 내가 몰두한 화두는 없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수수께끼, 내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남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몰두하게 만든 것은 없었어!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 싯다르타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어!‘ (55p)

"다들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요. 누구든 남에게서 받고 남에게 주며 살아가지요.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요." (87p)

그러나 오늘은 강의 모든 비밀 중 단 하나만 볼 수 있었고 그것에 사로잡혔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득한 기억 같은, 신의 목소리 같은 어떤 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130p)

강은, 바주데바가 가르쳐 준 것 이상으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 강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격정이나 욕망에 동요하지 않고, 판단이나 의견을 내려 하지 않고, 조용하고 열린 마음과 기대하는 자세로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136p)

그러자 현재와 영원은 동시同時라는 느낌이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깨닫게 되었다. (146p)

그는 그들을 이해했으며, 생각이나 통찰이 아니라 오로지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는 그들의 삶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그는 완성의 경지에 접근하여 있었다. 최근에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어린애 같은 사람들을 자기의 형제처럼 여겼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 우스꽝스러운 특성들이 이젠 그에게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다 이해되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163p)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오로지 귀를 기울이는 데만 몰두해서, 완전히 마음을 비운 채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그제야 그는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모두 다 배웠음을 느꼈다. 그는 자주 이 모든 소리, 강물에서 나는 수많은 소리를 들어 왔지만, 오늘은 그 소리들이 새롭게 들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을 분간할 수 없었다. 기쁜 소리와 슬픈 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고, 어린아이의 소리와 어른의 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섞여서 들어왔다. (중략) 그렇게 싯다르타가 수천 가지 소리를 내는 강의 노래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자, 고통의 소리와 웃음소리를 분리시키지 않고, 특정한 소리에 자기 영혼을 얽매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지 않고 모든 소리에, 그 전체에, 단일성에 귀 기울이자, 수천 가지의 소리가 어우러진 그 위대한 노래는 단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바로 완성을 뜻하는 ‘옴‘이었다. (169-170p)

"... 시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 체험했네. 그리고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지극한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177p)

‘이 돌멩이는 돌멩이이기도 하고 짐승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이 돌멩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이것이 언젠가는 다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항상 모든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179-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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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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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임현 작가의 단편집이자, 작가의 등단(2014년) 이후 첫 소설집이다. 표제작 <그 개와 같은 말>이 작가의 등단작이고,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고두>도 실려있다. <고두>를 참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역시 좋다.


책에는 총 열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흐름을 따라 단편을 쭉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작가가 타인의 불행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그 여자였을 수도 있어. 그 일에 휘말린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었다고. 그때도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265p, 불가능한 세계)


언젠가 인터넷에서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쓴 유인물이라며 올라온 사진을 봤다. 그 유인물에는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사진이 있었고, 이 사진을 보며 내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는 내용의 감상문을 쓰라는 설명이 딸려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요는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감상을 적는 부분에 해당 수업을 들은 학생이 몇 마디 일침을 날렸다. 자기는 남의 불행을 두고 행복감을 느끼는 이기적이고 비공감적인 사람이 되기 싫다고. (역시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소비한다. 인터넷 상에서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이미지 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한 번 정제된 불행도 마찬가지로 소비의 대상이다. 타인의 불행을 두고 자기의 행복을 가늠하다니, 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무서운 구조인가.


소설 속 인물들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바로 그런 사고를 목격하기도 한다.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있기도 하고, 아주 멀리서사건을 조망하기도 한다. 작가는 인간이 갖는 복합적인 성질을, 한없이 이타적이다가도 돌아서면 이기적으로 변하고, 자기의 슬픔을 치유하느라 옆 사람의 고통을 모른채 하고, 멀리 있는 자들의 불행에 동정심을 보내지면 가까운 이들에겐 그저 무관심한 복잡한 인간을 차분히 묘사한다. 읽고 나니 왠지 씁쓸하다. 인간은(나는) 본래 이런 존재일까.


나는 조금 낙천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인지라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삶이 아닌,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는 삶을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특히 좋았던 단편은 역시 <고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종종 목격된다는 설정의 <외>도 좋았다. 그리고 독후감을 쓰면서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으로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생각났다.


그런 사람으로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단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다 선량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모르는 걸 내가 알았을 뿐. 그렇게 사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이익이 된다는 걸 말이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의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33p, 고두)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그러므로 노력해야 한단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반성해야 하지. 의지를 가지고 아주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냥 생긴대로 살게 되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게 나쁘다는 걸 몰라.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모르고, 어쩐지 좋은 쪽에만 서 있다고 착각하거든. 너도 들어보지 않았니? 재개발로 인해 보상받지 못한 세입자라든가, 장애인 시설을 들이지 않겠다고 시위하는 지역 주민 이야기 같은 거. 모른다고? 그런 일이라면 전혀 관심이 없다고? 그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구나. 남의 불행에 왜 관심을 갖지 않는 거겠니? 봐라, 네가 이렇게 이기적이다. (33p, 고두)

그런데 다들 그래. 다들 그러고 사는 거거든. 들키지 않을 만한 허물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거든.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 줄은 몰라. 그러니까 아무나 쉽게 비난하고 혐오하고 그게 정의인 줄 아는 거지. (49p, 고두)

진짜를 말하자면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른다는 거야.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존재고 그러므로 부단히 경계해야 하는데도 부도덕하고 불의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줄로만 알아. (49p, 고두)

왜 함부로 내게 미안해하는 것이냐. 나는 그런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고 무얼 용서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쁜 의도, 나를 몰락시키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내 학생이었다. 그걸 내가 가르쳤거든. 나를 사랑한 배덕한 학생. (52p, 고두)

그러나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대부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 알고 나면 뚜렷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우연이란 아직 모르거나 그중 한 부분이 누락된 것일 뿐이고. 소설가의 역할이 무엇이겠는가.그런 신비하고 모호한 부분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의 빈 곳을 채우는 것 아닌가. (69p, 엿보는 손)

나는 그때 그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잃어버렸다. 잊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잘 듣지 않았으니까 그냥 잃어버렸다. 찢어진 채로 아니면 군데군데 지워진 채로 들었는데 남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102p, 좋은 사람)

"(...) 왜 함부로 나를 배려하려 드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전부터 오래 내리고 있었는데 쌓이지는 않았다. 나도 무언가를 쌓자고 듣던 것은 아니었으나 젖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103p, 좋은 사람)

아마도 우리가 무사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별일 없던 거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만약 무리하게 대피소를 벗어나려 했다면 진짜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우재가 후배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우리가 겪지 않은 사고일 뿐이었다. (120p, 좋은 사람)

열악한 것 중에서 덜 열악한 것을 고른다는 것은 능력보다는 운의 문제였다. 노력해서 얻어질 만한 것이 아니라 재수가 좋거나 나쁠 따름이었다. (139p, 무언가의 끝)

헤어질 때쯤 우리는 충무로에서 재개봉하는 「일 포스티노」를 보았고 연경은 그곳에서 소리 내어 우는 유일한 관객이었다. 그때 나는 연경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느꼈다. 어딘가 애쓰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의심했는데, 아마 그것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153p, 그 개와 같은 말)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게 어떤 맥락에서 순차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오래 사이를 두었다가, 혹은 흐름상 분명 어색한데도 감정적으로는 자연스러운, 그런 대화들을 나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식으로 멀어지는 것과 멀어졌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묻고 대답하고 걸었다. (155-156p, 그 개와 같은 말)

말하자면 내가 느꼈던 불안함이란 이런 종류였다. 나의 어떤 말로든 세주를 웃게 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울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불안. (158p, 그 개와 같은 말)

"글쎄 뭐랄까, 다들 비슷한 연애를 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아주 특별하다, 특별해서 괜찮다, 믿으면서 무모해지는. 우리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런 연애였어요." (162p, 그 개와 같은 말)

"살면서 내 뒤통수를 볼 일은 없잖아. 자기 뒷모습이 어떻게 생긴지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 그 사람이 저만큼 멀어지는데 내가 저렇게 걷겠구나, 누가 나를 뒤에서 보면 저런 모습이겠네 싶은 거지. 기분이 진짜 이상하더라니까." (212p, 외)

"여보, 나는 당신 같지 않아. 당신처럼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고." (225p, 외)

"내가 그 여자였을 수도 있어. 그 일에 휘말린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었다고. 그때도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 (265p, 불가능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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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소의 그림동화 246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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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너머가 두려운 모든 아이와 어른에게 보내는 위로

- 이수지, 을 읽고

 

아무리 그래도 그림인데, 글은 없고 그림뿐이다. 최소한의 말 한 마디도 없이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의심하며 펼쳤는데, 어떤 책에는 글이 사족이 되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덮었다. 좋은 책에 내가 덧붙이는 말이 뱀의 발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쓴다.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이 책에 담아 봅니다.”

 

빈 도화지 한 장,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지우개 한 개로 시작한다. 다음 장,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선 하나를 그리며 새하얀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아이는 연필이고, 얼음판은 도화지다. 흰 도화지의 넓은 여백은 무대가 된다. 아이는 빈 얼음판에 얇은 선, 굵은 선, 똑바른 선과 굽은 선을 그리며 신나게 달리고, 회전하고, 마침내 점프를 시도한다.

 

종이 위쪽까지 뛰어 오른 아이가 얼음판에 착지하지 못하고 쿵, 바닥에 넘어져 주욱 미끄러지고 만다. 다음 순간, 미끄러지는 아이가 미쳐 얼음판 위에 안착하지도 못했는데 오른쪽 모퉁이부터 종이가 천천히 구겨진다. 그렇게 넘어진 아이는 종이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넘어지는 그림은 실패작이고, 실패작은 필요 없으니 구겨서 버리는 것이다. 재미있어 시작한 그림인데, 때때로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 마음에 짐이 되는 친구들이 있을 터이다. 즐거워서 시작한 스케이트가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싫어지는 어린이도 있을 듯하다. 그림 그리기도, 스케이트도, 나아가 다른 모든 즐거웠던 일이 지나친 완벽함을 추구하다 질려버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도화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스케이트를 타는 데 제법 능숙해 보이고, 아름다운 선을 만들며 즐겁게 웃고 있다. 그러나 점프에 성공하지 못해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스케이트를 타며 느끼는 즐거움도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구겨진 종이를 다시 펴서 주변을 둘러보면 미끄러져 넘어지는 친구들이 있고, 이 친구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광경이 있다. 그 뿐이랴, 우리에겐 함께 넘어지는 친구들, 내가 넘어졌을 때 손잡아 일으켜 주는 친구들, 그리고 능숙하지 않은 나를 위해 함께 손잡고 달려주는 어른들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넘어지고 실패한다.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세 걸음에 한 번은 주저앉거나 넘어졌던 것처럼, 지극히 쉬워 보이는 모든 일에 처음을 다시 생각해 보면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서, 멋진 점프를 훌륭하게 해내지 못해서 종이를 구겨버린 적이 있다면 구긴 종이를 천천히 다시 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우리가 외면해 버린 연필과 지우개가, 모든 즐거운 일의 처음이 거기 여전히 있다.

 

선 하나를 그으면 경계가 된다. 두려움을 갖는 일은 선을 긋는 일과 비슷하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선으로 안전한 경계를 정해 놓고 선 안에서만으로 행동을 제한하면 실패할 위험이 적어진다. 무서운 바깥 세계, 경계선 밖으로 구태여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그어 경계를 만들어 놓으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가능해진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극복할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익숙함과 편안함에 갇히지 않고,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경계를 넘나들며 선 바깥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엉덩방아를 찧는 게 너무 무서워 스케이트장으로 들어가기조차 겁나는 아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밖에 있어도 괜찮다. 스케이트장을 벗어나더라도, 우리가 미리 그어 놓은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그 곳에는 여전히 흰 도화지가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흰 여백이 모두 아이들의 무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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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블루 컬렉션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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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집필 당시에 젊었던) 프랑스 소설가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


초판은 1994년에 발행됐고, 내가 읽은 책은 2000년에 개정된 개정판이었으며, 얼마 전 새로운 개정판이 또 나왔다. 원작은 93년에 발행되었다고 하니, 25살 된 소설이다. 작가가 낯설어 찾아봤는데, 이 작품 외에 우리 나라에 소개된 이렇다할 다른 작품은 없나보다. 방송 작가로 활동하시는 듯.



1. 

어린 시절, 누구나 운명적 사랑을 꿈꾸지 않을까? 나는 내 소울메이트를 알아볼 수 있고, 나와 나의 연인은 시시한 연애를 하는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굳게 믿었던 때가 있다. 영화 <겨울왕국>의 안나는 한스 왕자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덜컥 미래를 약속해 버린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는 안나의 운명이므로.


운명적 사랑을 꿈꾸던 어린 날은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자연스럽게 지워지기 마련이다. '나(우리)는 남들과는 달라!'라는 생각조차 결국 남들과 같았음을, 운명적 사랑이란 어린 내가 꿈꿔온 허상에 가까움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운명이라 절절히 믿었던 연인이 사실은 우연히, 어쩌다, 시기가 맞아 내 옆에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 콩스탕스도 이런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인다. 책 속에서 만난 '밑줄 긋는 남자'가 운명의 사랑이라 믿고, 정체도 없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말 그대로!) 왠지 그 남자와는 말도 잘 통하고 취향도 같다. 나의 운명이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 이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안나의 연인은 첫눈에 반해 운명이라 믿었던 한스 왕자가 아니라, 묵묵히 곁에 있던 크리스토프였다. 뭐... 운명적 만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사실 내 운명은 크리스토프였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나처럼 콩스탕스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곁에 있는 인연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영화 같이 다가온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을 믿고 지지하고 도와준 (로맨스 아니고 다큐처럼 다가온) (처음엔 모지리라 생각했던) 젊은 사서는 어느새 콩스탕스의 마음을 몽땅 빼앗았다. 콩스탕스가 운명적 사랑에 회의를 갖게 됐는지, 여전히 젊은 사서를 새로운 운명이라 생각할는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2. 

작품 속에서 개인적 행위인 '책읽기'는 밑줄을 그음으로써 사회적 행위로 거듭난다. 콩스탕스에게 책읽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그녀가 책읽기를 통해 타인과 만나는 순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지젤과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고 엄중한 경고(책에 밑줄 긋지 마세요!)를 들을 때 뿐이다. 경고를 듣고 빌린 책을 집에 가지고 와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책을 읽는다. 오롯이 혼자서 해내는 책읽기다.


그러나 책 속에 밑줄을 긋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밑줄을 그으며 콩스탕스에게 대화를 걸어온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콩스탕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밑줄 긋는 상대와 다시 밑줄로 대화하며 소통을 시도했고, 이는 개인적 행위인 책읽기가 밑줄을 통해 사회적 행위로 탈바꿈했음을 암시한다. 


밑줄 긋기는 익명성을 가진 독자 다수가 타인에게 말을 걸게 하며, 이를 통해 만난 적 없는 독자들끼리 어느 정도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의 '밑줄 질문'에 '밑줄 답변'을 달았던 것은 분명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어서는 초월적 말 걸기는 '대화한 적 없었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일방적 말걸기일 뿐이라는 한계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밑줄 답변이 결코 질문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주인공 이름 "콩스탕스Constance"는 불어로 불변, 영원을 뜻한다. 

인쇄된 텍스트는 주인공의 이름처럼 변하지 않고 영원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사람과 해석하는 방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작품 속에서 밑줄로 상정되는, 익명의 존재들이 하는 소통은 항상 불완전하겠지만, 불완전 할지라도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사랑하던 남자가 내게 너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난 싫증을 느꼈다. 답장이 없는 그에게 편지를 쓰는 데도 지쳤고, 내 침대 위에 걸린 그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일에도 신물이 났다. (7p)

내가 지닌 것은 뭐든지 보통이다. 내 코의 곡선은 부드럽고, 눈썹은 짙지도 옅지도 않으며, 허리 둘레는 표준이다. (40p)

도중에 나는 제비꽃 한 다발을 사고는, 그 남자에게서 꽃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후 내내 꽃 냄새를 맡았고, 꽃병을 세 번 바꿔 주었으며, 꽃이 오래가도록 물에 아스피린 정제를 한 알 넣어 주기도 했다.
꽃이란, 그토록 연약한 것이다. (67p)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을 잊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111p)

하지만, 특별한 행복에 대한 그 모든 꿈과 기다림에 비해, 그는 너무 보잘것 없었고, 꿈꾸던 이야기와 동떨어져 있었다. (140p)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나에게 자기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으니 말이다. (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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