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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ㅣ 블루 컬렉션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젊은(집필 당시에 젊었던) 프랑스 소설가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
초판은 1994년에 발행됐고, 내가 읽은 책은 2000년에 개정된 개정판이었으며, 얼마 전 새로운 개정판이 또 나왔다. 원작은 93년에 발행되었다고 하니, 25살 된 소설이다. 작가가 낯설어 찾아봤는데, 이 작품 외에 우리 나라에 소개된 이렇다할 다른 작품은 없나보다. 방송 작가로 활동하시는 듯.
1.
어린 시절, 누구나 운명적 사랑을 꿈꾸지 않을까? 나는 내 소울메이트를 알아볼 수 있고, 나와 나의 연인은 시시한 연애를 하는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굳게 믿었던 때가 있다. 영화 <겨울왕국>의 안나는 한스 왕자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덜컥 미래를 약속해 버린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는 안나의 운명이므로.
운명적 사랑을 꿈꾸던 어린 날은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자연스럽게 지워지기 마련이다. '나(우리)는 남들과는 달라!'라는 생각조차 결국 남들과 같았음을, 운명적 사랑이란 어린 내가 꿈꿔온 허상에 가까움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운명이라 절절히 믿었던 연인이 사실은 우연히, 어쩌다, 시기가 맞아 내 옆에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 콩스탕스도 이런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인다. 책 속에서 만난 '밑줄 긋는 남자'가 운명의 사랑이라 믿고, 정체도 없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말 그대로!) 왠지 그 남자와는 말도 잘 통하고 취향도 같다. 나의 운명이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 이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안나의 연인은 첫눈에 반해 운명이라 믿었던 한스 왕자가 아니라, 묵묵히 곁에 있던 크리스토프였다. 뭐... 운명적 만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사실 내 운명은 크리스토프였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나처럼 콩스탕스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곁에 있는 인연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영화 같이 다가온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을 믿고 지지하고 도와준 (로맨스 아니고 다큐처럼 다가온) (처음엔 모지리라 생각했던) 젊은 사서는 어느새 콩스탕스의 마음을 몽땅 빼앗았다. 콩스탕스가 운명적 사랑에 회의를 갖게 됐는지, 여전히 젊은 사서를 새로운 운명이라 생각할는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2.
작품 속에서 개인적 행위인 '책읽기'는 밑줄을 그음으로써 사회적 행위로 거듭난다. 콩스탕스에게 책읽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그녀가 책읽기를 통해 타인과 만나는 순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지젤과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고 엄중한 경고(책에 밑줄 긋지 마세요!)를 들을 때 뿐이다. 경고를 듣고 빌린 책을 집에 가지고 와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책을 읽는다. 오롯이 혼자서 해내는 책읽기다.
그러나 책 속에 밑줄을 긋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밑줄을 그으며 콩스탕스에게 대화를 걸어온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콩스탕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밑줄 긋는 상대와 다시 밑줄로 대화하며 소통을 시도했고, 이는 개인적 행위인 책읽기가 밑줄을 통해 사회적 행위로 탈바꿈했음을 암시한다.
밑줄 긋기는 익명성을 가진 독자 다수가 타인에게 말을 걸게 하며, 이를 통해 만난 적 없는 독자들끼리 어느 정도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의 '밑줄 질문'에 '밑줄 답변'을 달았던 것은 분명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어서는 초월적 말 걸기는 '대화한 적 없었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일방적 말걸기일 뿐이라는 한계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밑줄 답변이 결코 질문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주인공 이름 "콩스탕스Constance"는 불어로 불변, 영원을 뜻한다.
인쇄된 텍스트는 주인공의 이름처럼 변하지 않고 영원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사람과 해석하는 방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작품 속에서 밑줄로 상정되는, 익명의 존재들이 하는 소통은 항상 불완전하겠지만, 불완전 할지라도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사랑하던 남자가 내게 너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난 싫증을 느꼈다. 답장이 없는 그에게 편지를 쓰는 데도 지쳤고, 내 침대 위에 걸린 그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일에도 신물이 났다. (7p)
내가 지닌 것은 뭐든지 보통이다. 내 코의 곡선은 부드럽고, 눈썹은 짙지도 옅지도 않으며, 허리 둘레는 표준이다. (40p)
도중에 나는 제비꽃 한 다발을 사고는, 그 남자에게서 꽃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후 내내 꽃 냄새를 맡았고, 꽃병을 세 번 바꿔 주었으며, 꽃이 오래가도록 물에 아스피린 정제를 한 알 넣어 주기도 했다. 꽃이란, 그토록 연약한 것이다. (67p)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을 잊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111p)
하지만, 특별한 행복에 대한 그 모든 꿈과 기다림에 비해, 그는 너무 보잘것 없었고, 꿈꾸던 이야기와 동떨어져 있었다. (140p)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나에게 자기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으니 말이다. (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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