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삐딱해도 괜찮아 - 똑같은 생각만 강요하는 세상을 색다르게 읽는 인문학 프레임
박신영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안 읽은데다가 주변에서 편견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가 삐딱한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구절구절 옳은 말이구만 뭘 이런걸 책으로 쓰고 그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다가 생각해 보니, 내가'
삐딱해도 괜찮아'라고 위로 받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스스로의 경험과 삽질로 알게 된 나이보다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읽으면 참으로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글, 위로가 될만한 글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저자의 책을 다 읽은 후, 첫번째 한 일은 내가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 리뷰를 찾아 보는 일이었다. 어렸을 적 성당에
다니면서 그 책을 읽었을 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랑을 해야된다고 강요 받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다 주고 아무것도 안남은 나무처럼
살라는게 좀 씁쓰름했던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이 참 염치없다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 생각을 말로 내 놓을 수는 없었다. 작가의 글을 읽고 다르게
생각해 보면 발전하고 있는 소년과 다르게 한 자리에 바라기 하고 있는 나무도 딱히 옳아 보이지는 않는다. 돌아갈때마다 반색을 하는, 나에게
희생당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과연 마음이 편할까? 부담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어떤 관계든 적당히 신세지기도 하고 신세 갚기도 하면서 관계가
이어지는 것이 옳지 한쪽에서반 배푸는 애정은 부담스럽다. 삶을 살아보니 삶이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고 내 마음이지만 모두 내 마음 같지는 않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지 않나? 작가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 하다. 찾아보니 내 리뷰는 없었다.
어렸을 때 접한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교훈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이야기의 내용을 알려주거나 읽힌 후에 이야기의
교훈은 뭐라고 정해준다. 문장을 달리 생각해 볼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누군가가 알려준 교훈을 뒤로 미루고 이야기의 등장한 모두의
자리에 앉아 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약에 내가 나무인데 그렇게 행동했다면 스스로와 소년에게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 내가 소년이라면 자신과
나무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듯 하다. 이야기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런 상황이라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들어가 눈 높이를 맞춰 보는 일. 그게 작가가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이 되어보면 그 등장인물의
사정이 다르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법 아닌가. 그 눈높이에서 편견을 들어낸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시선이 달라서 괜찮은 책이다. 내
취향에는 책 전반부 보다는 뒷쪽에 흥미로운 글이 더 많았다. 그러나 한 책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느라 호흡이 짧은 것이 안타깝다. 호흡이
긴 책을 기다려 보련다.
책 상태는,
한마디로 별로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삐딱하다"라는 말은 한쪽으로 기울어져있거나 마음과 생각이 바르지 비뚤어져 있다고 할때나
쓰는 말인 '비딱하다'의 쎈 표현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어디를 봐도 삐딱하다는 느낌보다는 독특하고 다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에
배꼽이 훌렁 나올 정도로 물구나무 서 있는 표지가 과연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뒤집어져도 괜찮아 정도까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덧붙여,
삽화는 할말을 잃게 만든다. 내가 삽화에 까막눈이라 못알아 보나 싶어서 삽화가의 평소 작업을 검색하니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책에 과연
삽화가 필요했을까? 글이 이렇게 명확한데 무슨 삽화가 필요할까? 내 눈에는 예쁘지도 않고 뭔가 음침해 보이는 삽화가 중간중간 튀어나와 책
읽기에 거슬린다. 작가는
예쁘지만, 작가가 내는 책이 내 눈에 다 예쁘긴 틀린 듯 하다.
맺는말에 저자가 읽어 도움이
된 책을 열거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읽는 내내 도대체 이 많은 이야기는 어디서 찾아낸 것인지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눈이
밝아지는 것 같고 몇가지 찾아보고 싶은 책도 생겼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