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로주점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78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평점 :
7월 이후 책은 읽었으나, 그 내용을 글로 옮기지 못하는 시간을 오래도록 보낸 듯 하다. 하얀 면을 대하고 생각을 옮겨서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갑자기 몸에서 쑥하고 빠져나가 돌아오질 않았다. 좋은 글이 아니라도 술술 써내려가는 맛이라도 있었는데, 무슨 변화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어렵고 힘든 시기에 읽은 것이 [테레즈 라캥]을 쓴 에밀졸라의 [목로주점]이라니, 소박한 꿈을 꾸던 제르베즈의 20년간의 흥망사를 읽어버리다니! 다시 시작하는 독서로는 적합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랑띠에의 유산을 가지고 파리로 와서 잠깐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제르베즈는 두 아이와 함께 랑띠에에게 버림 받는다. 그 망할 자식은 제르베즈의 속옷을 팔아 장만한 돈으로 제르베즈가 세탁실에 간 사이 마차를 불러 전당표 표까지 들고 달아나 버린다. 제르베즈는 절망 속에 버려졌고, 랑띠에와 함께 도망친 여자의 언니와 세탁장에서 몸싸움을 한다. 제르베즈의 즐겁지 않은 승리. 하지만 그 치욕의 시간 덕분에 제르베즈는 살 희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착실하게 세탁일을 하면서 삶을 다져가고 있는 제르베즈는 책임감이 있지만 배운 것이 없는 쿠포를 만나게 되고, 쿠포의 애정공세로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여 새 삶을 시작하지만 삶이 윤택해 질수록 시누이의 시샘은 커져만 가고 주변의 시선이 뜨거운 질투로 바뀌어 간다. 그 사이 성실한 쿠포와의 사이에서 딸도 태어난다. 행복할 줄 알았던 시간도 잠시. 함석장이 쿠포는 지붕에서 작업하다 떨어지고, 떨어져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제르베즈는 가게를 구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쏟아붓는다. 그때 제르베즈에게 연정을 품은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를 열게되고, 세탁소 안의 다림질을 하는 그 열기는 제르베즈의 삶을 활기로 가득 체운다. 주변의 시샘에 더욱 의기양양해진 제르베즈는 식도락에 빠지고, 완쾌가 되었으나 일할 생각이 없는 쿠포는 술 속으로 빠져든다. 버는 돈만큼 나가는 생활, 버는 것 보다 더 나가는 생활이 이어지고 무슨 생각인지 쿠포는 자신의 부인을 버리고 떠났던 랑띠에까지 끌어 안아 집안에 식객으로 머물게 한다. 물론, 시작은 하숙생이었지만.
모든 것이 허물어간다. 가게도 사람도 돈도. 거머리같은 랑띠에만 자신의 자리에서 사람을 바꿔가며 그들의 등골을 빼먹는다.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한 생생한 장면장면들이 즐겁지 않은 내용임에도 술술 잘 읽혀 나간다. 조금식 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 결국 쿠포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어 사랑의 전환점이 되었던 목로주점에서 제르베즈는 첫번째 증류주를 마시게 되고, 꽂히듯 내리박히는 인생의 추락길을 타게 된다. 이제 금발의 아름답고 손끝이 야물었던 제르베즈는 사라지고, 그렇게 망가진 제르베즈를 여전히 사랑하는 구제를 받아들이지도 못한체 자신의 삶을 더욱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책을 덮으며 130년 전의 파리가 궁금해짐과 동시에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고 악의와 술중독은 정말 끔찍하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좋은 남자를 만나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접었다.
e북으로 책을 읽기는 처음이다. 아이폰4에 열린책들 세계문학App을 다운 받아 읽었는데, 주석을 클릭하면 화면 아랫쪽에 내용을 바로 띄워준다. 더불어 형광펜을 색으로 구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점도 매력있었다. 겔럭시 노트 8.0으로 리디북스의 다른 책들도 읽고 있으나, 비교해 보았을 때 아이폰의 작은 화면에서도 가독력이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것도 좋았다. 아이패드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안드는 것은 아니지만.
하_17
어쨌든 사장이라는 옛 직함은 그의 자태에 지울 수 없는 품격을 남겨 놓았다.
........
어쨌든 쿠포의 말대로 그 한량도 시간이라는 공기만을 마시고 살진 않았을 것이었다.
하_343
가장 슬픈 것은 그들이 애정이라는 새장을 열어 놓은 탓에 감정이 물방울새처럼 알아가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껴안고 한덩리로 살아갈 때 생기는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의 열기가 이 집에서는 사라졌고, 각자 자기 구석에 처박혀 몸을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