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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오스 폴립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2월
평점 :
데이비드 마추켈리 글,그림/박중서 역 | 미메시스 | 344쪽 | 1170g | 210*267mm | 2010년 12월 15일 | 정가 : 26,800원
책을 보자마자 두께에 깜짝 놀랐다. 단단해 보이나 일부러 마감을 하지 않은 하드 커버의 앞 뒷면에는 서로 다른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모습이 음각으로 찍혀있다. 두께에 질릴 뻔 하다가 잘 넘어가는 책장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번개가 쳤다. 삶을 포기한 듯한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이제는 켜지지도 않는 라이터를 들고, 이제는 함께하지 않는 이와의 일상이 찍힌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그 요란하게 치던 번개는 옆집에 불을 내고,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겨우 신발을 챙겨신고 켜지지 않는 라이터, 시계, 그리고 주머니칼을 하나 들고 입은 옷 그대로 집을 나선다. 모든 것이 타버린다. 직선과 곡선의 공간과 모든 날의 기록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의 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본다. 그것도 50번째 생일날.
성공한 교수인 아스테리오스는 건축과 교수인데 건축가 이면서도 자신이 디자인한 건물을 갖지 못한 설계자다. 똑똑했고, 지적 허영을 즐겼으며, 쌍둥이 중 하나로 태어나지만, 태어나면서 죽은 형제를 갖게된 인물이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건물도 없고, 이제는 가족도 집도 없다. 인생이 쌓아 올린 것이 없는 듯 모든 것을 잃은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묵묵히 돌아서 지하철로 향한다. 메트로 카드는 잔액이 부족해 몰래 지하철을 타고, 새(?)가 이끄는 지하철에 보이지 않는 분신은 그 자리에 남는다. 오롯이 혼자 된 순간이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으로 가장 멀리 가는 버스표를 산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이제는 켜지지 않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옆좌석 남자에게 선물한다. 이제는 밥 넘기기도 힘든 아버지의 한창때를 함께했던 라이터였다. 일도 없는 카센타에 자동차 일을 해본적도 없으면서 취직하고 방도 얻게된다. 전이라면 어울리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된다. 그 이야기 사이사이에 완벽하고 단호하고 빈틈없는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성격과 완전히 다른 '하나'를 사랑했던 이야기가 펼쳐지고, 함께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삽입된다. 집에서 들고나온 시계도 카센터 사장 아들에게 선물하고 난생 처음으로 나무 위의 작은 집도 지었다.
삶을 되새김질하려 한 것도 아닌데,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그 순간 떠올라버린 '하나'에 대한 흔적들은 읽는 사람도 벅찰 정도로 한꺼번에 밀려들어온다. 사소한 것이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그런 것들은 둘의 삶이 주름 한점 없이 깔끔하게 착 접혀졌다고 생각한 것이 틀리면서도 딱 맞다는 것을 증명한다. 새롭게 태어난 차를 타고 '하나'에게 돌아가 자신과 상대의 변화를 접한다. 그들의 고양이 '노구치'는 죽었지만, 그 따뜻함의 흔적을 추억하며 이미 타버린 집에서 들나온 주머니 칼로 와인을 딴다. 삶의 겹치는 기억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잔잔한 장면으로 책은 끝난다.
첫번째 읽고, 다시 읽으면서 색다른 되새김질을 하였다. 삶이 온전한가? 오해하고 있지 않나? 따뜻한가? 행복한가? 그리고 지금의 만족이 진짜 만족감인가? 책을 덮으며 다시 표지를 봤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