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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이 책을 마주하기 전에 이미 이 책의 주요내용을 [청춘의 독서]에서 상세히 접했고, 저 문장에 들어있는 사연도 이미 알고 있다보니, 인쇄 페이지를 보는 기분이 남달랐다. 문장에서 밀려오는 강한 '비아냥'이 가슴으로 시원하게 날아든다. 이런 고급스러운 '비아냥'이 있나. 저런건 배워야하는데, 나의 없다시피한 인내심과 짧은 지식으로 저런 '비아냥'을 날릴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싶다.
성실하게 살아 주변의 신뢰까지 얻고 있는 스물일곱살의 카타리나 블룸이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6시 45분경, 누군가가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그 댄스파티에서 어떤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 남자를 독점하여 춤을 춘 후 집에 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도주(!)를 돕는다. 나흘 뒤,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 7시 4분경에 카타리나 볼룸은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자신이 낮 12시 15분경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르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음을 밝힌다. 덧붙여, 자신은 12시 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시내를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아보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카타리나 블름의 과거와 실제 일어난 사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증언들을 알고난 후, ≪차이퉁*≫의 보도내용을 읽다보면 괜히 코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온다. 보도내용을 읽으며 왠지 어떤 언론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욕지거리를 입에 물게된다. 그리고 문득, 내가 저런 말에 속아 넘어간 적이 있지 않나 싶어서 괜히 분하다. 덧붙여, 조사과정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어떻게 저런 거지같은 언론에 줄줄 흘려지는지. 작년에 안타깝게 보낸 사람이 꼭 저런 경우지 싶어 이가 갈린다. 만약, 내 가까운 주변에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 베르너 퇴르게스가 총 맞아 죽기 전에 똥바가지라도 뒤집어 씌워야 분이 풀릴 듯 하다.
문제는 오보와 그에 따른 파급효과가 한 사람의 삶과 그 사람과 관련된 이들의 삶을 한꺼번에 무너트리고서도 아무런 반성이 없이, 여전히 그대로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행복하게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를 만난다고해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 우리 주변에는 '카타리나 블룸'이 앞으로 수 없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니 섬뜩해서 정수리가 다 시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경우, 빈틈없이 강직한 여자가 잠깐 사이에 사랑에 빠지고 그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고 도주까지 도왔다는 사실이 만약 신문에 나왔다면 나조차도 사실로 믿기는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변질이 언론만의 일이겠냐는 생각도 했다. 언론이 파고 들어간 그녀의 주변 사람 중, 자신의 채로 사실을 걸러 편견을 바른 후 토해내는 증언들이 왜곡한 사실은 어디가서 하소연 해야하나.
얼마 전, 전달된 이야기가 얼마나 변질될 수 있는지 생생하게 경험한 일이 있었다. 중간에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면 정말 난감했을지 생각만해도 기가막히다. 그 일도 있고 내가 남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해 잘못 행동한 경우도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섣부른 판단들이 불러올 많은 나쁜 소문들에서 우리 모두가 안전할 수 없다. 부제가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다. 책 표지,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써 있는 글을 보며, '어떤 폭력이든 폭력은 나쁘다'라는 진리를 다시한번 되새겨본다.
소설은 잘 읽힌다. 분량도 많지 않아 읽다보면 어느 덧 끝에 다다르고 있다. 볼수록 민음사 전집은 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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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퉁_독일어로 '차이퉁(Zeitung)'은 원래 '신문'을 의미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어느 일간지의 고유명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