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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여행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4월
평점 :
소설이 주제를 가질 수는 있으나
주제를 소설에 부여하는 것은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Michel Tournier
책을 다 읽고 약간 멍한 기분이 들어 있을 때, 마지막에 발견한 이 문장은 머리를 한대 치고 지나갔다. 그렇지! 소설이 주제를 가질 수 있으나 주제를 소설에 부여하는 것은 독자인거다. 읽는 사람 마음 인거다. 은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많고 종교와 철학이 뒤섞인 이 소설의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이고, 느끼고 못 느끼는 것은 독자의 깊이 문제인 것이다. 이 짧은 글을 읽고 머리가 아파왔다. 내 깊이는 원래 들여다 보면 보여야하는 깊이인데, 시커먼 저 속을 들여다 보려니 힘겨웠다. 재밌게는 읽었다. 그런데, 내가 뭘 느낀 걸까?
유아 세례를 받았기에 나의 어렸을 적 기억은 대부분 성당에서 시작하고 성당에서 끝난다. 특히나 오랜시간 연습해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대에 올리는 연극은 늘상 마구간의 구유에 빛나는 아기가 누워있는 장식과 함께 했다. 그래서 아기를 둘러싸고 서 있는 동방박사는 장식적인 의미에서 매우 친숙했다. 하지만, 그들이 뭐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제법 긴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너무 종교를 설피 생각한 걸까? 성서나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도무지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영감을 받고, 저주받은 도시 소돔과 정적에게 포악했던 헤로데 대왕을 엮어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첫번째 등장하는 왕이 이집트 남쪽 '메로에'라는 왕국의 가스파르 왕이었다. 본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 흑인이라 다른 인종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어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이 왕이 노예시장에서 금발의 백인 노예를 사고 그 노예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검은 자신과 백성의 모습이 추하다고 느끼면서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매 인 줄 알았던 금발 노예가 연인임을 알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길을 떠나게 된다. 떠나던 길에 예술에 빠진 니푸르의 왕 발타자르를 만난다. 오직 예술작품에 관심이 있던 발타자르 왕은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집단의 공격으로 아름다운 박물관을 잃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변할 만큼 수심에 잠겨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 권력 싸움에 밀려 도보로 여행하는 멜쉬오르 왕자가 만나 동방박사 행렬을 이룬다. 이 행렬은 헤로데 왕의 환대를 받으며 예루살렘의 성문을 넘는다. 이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 마음을 치유받으나 아기 예수를 경배 후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잔인한 헤로데 왕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대천사의 갈길을 가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던 중 마지막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환상의 과자 '라이트루쿰'을 찾아 나선 타오르 왕자다. 등장인물 중 가장 애정이 가고 흥미 있게 읽은 이야기이나, 이야기 속에서 타오르 왕자가 겪는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은 말도 못하다. 과자의 제조법을 알아내겠다고 나선 항해에서 고생하고, 아기 예수를 만나려 하나 한발 늦고, 소돔에 들어서 시련에 닥치고, 결국 빈털털이가 되고, 엉뚱한 자신감에 나서서 느닷없는 희생을 하게되고, 33년간의 지독한 노동 후 예수가 떠난 그 성찬에서 최초로 성체를 모시고 빛 기둥이 내려와 천사들이 타오르르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휴... 도대체 뭘까? 주제를 부여해야하는 독자인 내가 길을 헤매고 있다. 종교색이 짙은 글을 재미나게 읽었으나, 뭘 생각해야하는지는 두고두고생각해 봐야할 일이다. 내면에서 찾아야 할 것과 버려야할 욕심 끝에 얻을 수 있는 일들, 희생의 의미와 두려움을 넘어야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