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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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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가장 좋았던 한때'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친구는 '가장 좋았던' 하면 바로 떠오르는 나이인 스무 살, 스물한 살을 이야기했고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나이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더 좋고, 지금보다는 앞으로가 더 좋을 것이다, 라고 나는 막연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이런 나이에 나는 나를 믿지 못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매사 지금 내가 그 사람이었더라면,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네 명의 인물이 살아내고 있는 바로 그 나이이다.  

정윤은 도시에 적응하지 못해 매일매일 걷고 또 걷는다. 마치 이 도시의 길을 몸에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나는 이 책을 쉬지 않고 걸었던 여행길에서 다시 읽었다. 처음 가보는 도시였고,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 물었을 때 이 도시라고 대답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태생지가 있다는 것에 대해 난생처음 생각해보았다. 나고 자란 곳, 엄마가 있는 곳, 같은 것. 그제야 윤이 어째서 도시를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107쪽) 

나도 궁금하다.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다는 보장이 아니라, 모두가 다 견디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므로, 함께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내.가.그.쪽.으.로.갈.게"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삶은 그것대로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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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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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조금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다. 시집 읽듯이.
발표했을 때 따라 읽었던 작품이 꽤 되는데 이렇게 묶인 상태에서 읽으니, 또 다르다.
분명히 그땐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고 별로야!! 하고 제쳐두었는데..뭐지 뭐지.. 엄청 좋다.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 문장을 어째서 그토록 쉽게 지나쳤을까.

"맞아, 좋았어. 우린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라고 하는 헤어진 여자친구의 말도 왜 그렇게 쉽게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는데..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랑했던 거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마지막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두 인물이 서로의 마음을 더듬더듬 짚어나가는 장면은, 진짜 최고다.

그건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마지막,

택시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옛 남자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가 만들어가는 장면이 주는 감동과도 같았다. 나도 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연수는 진짜 '난놈'인가보다. -.-
(무슨 놈의 소설 제목은 또 이리도 잘 짓는지..)

 아직 읽을 소설이 몇 편 더 남아 있다. 그래도 당분간은 더 읽을 소설이 있어, 내 '생활'을 구해줄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했으므로 우리는 차창을 다 열어놓았다. 어디선가 탁탁탁 규칙적으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카락이 자꾸만 열어놓은 창문 바깥으로 흩날렸다. 종현의 택시는 한남동을 지나 소월길로 접어들었다. 종현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바흐의 칸타타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들으며 어두운 도로를 바라보다가 내가 "종현아"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종현아"라고 한번 더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종현은 전방의 도로와 나를 번갈아가면서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종현의 손을 뿌리쳤다. 종현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길 옆으로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_'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중에서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자꾸 읽는다.

 
그리고 또하나의 걸작, '달로 간 코미디언'

 
"그러니까 그 여자 말로는 고통과 <우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긴데, 소통하면 고통은 없는 거야. 맞지?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게 고통이잖아."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서로 붙였다가 뗐다가를 반복하면서 말했다. (……)

"암튼 붙으면 고통이 없고 떨어지면 고통이 생기고, 그런 거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거야. 곁에 없으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야.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처지가 되는 거지. 걔는 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한 애잖아? 이해할 수가 없어. 한때 나 자신보다 더 친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의문 자체가 고통이라구. 여기 봐. 이렇게 바람이 불잖아. 여기 나무들 사이로.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 왜 바람이 부는 거지?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고통스러워. 손뼉을 치잖아. 짝짝짝. 그러면 소리가 나잖아. 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소리 자체가 고통이었어. 세상 모든 게 고통이었어."

"그래서 오늘 말고도 길 가다가 가로수에 부딪친 적이 많았다는 소리야?"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내가 알지 못하니까 고통인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오늘처럼 어디 가로수에만 부딪치겠냐고?"

"그럼 또 뭐하고 부딪치는데?"

"바람 소리하고도, 통닭 튀기는 냄새하고도, 하늘의 파란색하고도, 세상 모든 것하고 다 부딪치지."

 

시각적 세계와 목소리, 청각, 보지 않고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여자는 아버지가 왜 가족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적을 쫓음으로써 공식적 기록이 아닌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의 화자인 소설가는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던 옛애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침묵과 암흑의 세계일 뿐이다. 지구에서 에야크 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라는 노파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 또, 그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씌어지지 않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있는 거라고 김연수는 말한다.

마지막 장면이, 정말이지 인상적이다. 자신의 옛애인이 남긴 소리-하나도 편집하지 않고 목소리의 미세한 결을 고스란히 살려놓은-를 듣고 있는 남자. 그 남자는 그 소리를 듣다가 불을 끔으로써 시각적 세계를 차단한다. 소리 속에서 그녀가 묻는다. "지금, 보이세요?" 그리고 남자가 화답한다. "아, 이건 만월이군요. 맞지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사막 저편으로 걸어갔을 그 여자의 아버지 뒷모습이 보일 듯 말듯하다. 달의 풍경과도 같은 사막. 그리고 만월이 떠 있는 사막. 그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사라진 게 아니라, "우주 저편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어 다행"인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달로 간 코미디언>이라는 사실도 여운을 남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외롭다가도 행복해진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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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기에
로랑스 타르디외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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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책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부치고 싶어하거나,
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하거나.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를 따질 수는 없다. 그냥 내 기분에 따른 분류니까. ^^;

이 책은 물론, 후자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서.
내가 멈춰 있었던 어떤 지점에 함께 멈춰 서서 감동하고 싶고,
또 더 나아가, 내가 놓친 부분을 누군가 짚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멈춰 섰다.
좋은 책은 고개를 박고 활자에 집중하게 만들지 않는다. 자꾸만 갈피를 덮고 허공을 응시하게 만든다.
그렇게 특별한 지점에 멈춰 서서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좋은 책이다. 로랑스 타르디외의 책은 나를 오래 멈추게 했다.

어떤 소설에 대해 말할 때, 그 소설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 책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이렇게나 간단하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 그 둘은 아주 오래 전, 아이가 실종되고 난 뒤 그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자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고, 남자는 몇십 년 만에 여자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만난다.
이게 다다. 게다가 이 책은 무척 얇다. 작은 판형에다, 138쪽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주느비에브의 슬픔에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
주느비에브는 하나뿐인 딸아이를 잃고 난 뒤, 자신의 공책에 이런 문장을 쓴다.


공허와 죽음 그 자체에 익숙해질 것. 매사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울 것. (69쪽)


어떻게 상대방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안다고 생각할 만큼 교만해질 수 있을까? 여기엔 어떤 소유욕이 작용하는 걸까? 


그에게 난 가만 내버려두라고, 또 그의 확신과는 반대로 그의 입장에서는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내 고통에 대해 운운하는 걸 그만두라고, 난 요구했다. 남의 고통을 '상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72쪽)

 
절망이 그들을 꺾기 전,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 뱅상과 주느비에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고통 때문에 침묵 속으로 침잠해버린 두 사람. 삼십 년이 지나 주느비에브는 죽어가고 있고, 뱅상은 마치 "심연에 맞서러 가는 사람처럼" 그녀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죽음이 확실해지고야 딸아이 클라라의 죽음을 마침내 믿게 된 주느비에브는 말한다.

 
왜 삶의 밝은 면만 기억해야 하는 걸까? 빛을 눈부시게 만드는 건 어둠인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끔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클라라를 잃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난 순간의 가치를 몰랐을 거야. 흙과 소소한 것들의 가치, 당신과 내가 함께하는 이 몇 시간의 가치를. 우리의 사랑보다도 강한 우정을 말이지. 슬퍼하지 마, 뱅상.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간다고 중요한 무언가를 잃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난 이 순간을 갖게 된 걸 감사해. 영원은 시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이 속에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주는 현기증 속에 있어. 내가 누구한테 감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죽음이 무언가를 향해 열려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 빛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거야. 빛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 그렇지? (109쪽)

 

이 둘처럼, 나는 감히, 헤어져 있더라도 서로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관계를 꿈꾼다.
비록 그것이 이 둘처럼, 똑같은 시련을 겪었다는 이유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안의 고통을 휘저어놓아야 하고, 모두가 평안히 잠든 밤의 무질서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런 고통을 함께했던 사람이 아직 건재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더 살아갈 수 있다.


갑자기 내 발아래 땅이 꺼진 날, 당장 내일 아침 만원지하철에 오를 용기를 어디에서 얻어야 하나 막막했던 밤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런 밤에도, 이런 문장들이 있어주었다면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리라.
빛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거라고, 빛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고, 문장이 속삭여준다.
그 앞에서 나는 선뜻이 '그렇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내 안에는 아직 많은 빛이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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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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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덜란드 작가가 쓴 소설은 처음 읽는다. 게다가 소설의 화자는 바로 캔버스이다.

그 낯섦을 계속 의식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내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장편소설치고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야기는, 아직 팔리지 않은 캔버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아직 백지의 상태로 누군가에게 팔리길 기다리는 캔버스는 이내 초상화가인 빈센트에게 팔리게 된다. 캔버스는 그를 '창조자'라고 호명한다.

하지만 화자인 캔버스 또한  창조자나 마찬가지다. 

빈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러 온 스페흐트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페흐트가 의뢰한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스페흐트의 죽은 아들이다. 

 

당신은 당신이 그린 초상화로 한 생명을 구하게 될 겁니다. (60쪽)

 

스페흐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페흐트와 아들'일까를 내내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창조자가 스페흐트의 아들인 싱어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아 그래서 제목이 이거였구나'싶었지만,

소설의 후반부, 싱어의 정체(?)가 드러나면서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어느 누구도 아닌 스페흐트 씨로 인해 내가 존재했다.

(…) 스페흐트 씨는 나를 이렇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고 싶어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보고, 나에게 말함으로써 나를 내 위치에 세워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싱어! 네가 거기 있구나. 이제 너는 더이상 죽은 아이가 아니야. 지금 네가 바로 현재의 모습이야. 이렇게 말해줄 유일한 사람은 스페흐트 씨였다.

나는 이제 정말 철저히 혼자다. 나는 스페흐트 씨가 죽은 다음에는 싱어의 모습을 지닌 캔버스에 불과할 것이다. (165쪽)

 

이 문장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화자인 캔버스 자신이 스페흐트 씨의 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야 나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페흐트'의' 아들>이 아니라 <스페흐트'와' 아들>인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번역된 제목이기 때문에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사람들은 꼭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아빠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렇게 생각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을 결코 떠나지 않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206쪽)

나와 스페흐트 씨는 그렇게 몇 분 동안을 계속 앉아 있었다. 스페흐트 씨가 그의 무릎 위에 자신의 아들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되길 원했던 등이 굽은 사람 위에 있었다. 그것은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떻게 나를 만지지도 않고 손끝으로 내 위를 움직이는지, 위에서 아래로, 찢긴 곳을 따라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의 발끝에서 머리까지 움직이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222쪽)

 

기자인 민커가 싱어의 정체를 밝히면서 스페흐트는 졸지에 변태성욕자가 되었지만 어쩌면 그건 정말로 오직 민커만의 시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게 마련이니까.

(이건 이 소설을 읽어내는 방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말 의미가 풍부한 소설이다. 읽다 보면, 탄생과 죽음, 혹은 예술에 대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고,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정체성, 혹은 사랑에 대한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으므로.)

스페흐트는 정말로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의 싱어를 다시 살려내고 싶었던 스페흐트의 욕망은 기실 세상 모든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창조자는 싱어를 그리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들추어낸다. 바로 테인이라는 친구와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마치 스페흐트와 그의 노예였던 싱어와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보고난 후 창조자의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화자인 캔버스는 싱어이기도 하고 테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스타인이라고 이름 지어진 창조자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창조자가 캔버스를 태우고 난 뒤 그의 아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순환 때문에 마치 죽음과 탄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묘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테인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였다. 나는 리데베이였고, 민커였다. 나는 그의 앞에 서 있는데도 그가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호받지 못했고,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봤어야만 했다. (205쪽)

 

 

나라는 초상화 작품은 인간에게 보이기 위해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우리 같은 작품보다 죽음 앞에서 더 두려워한다. 나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두려움에 천 개의 두려움을 더하면 바로 그게 인간의 두려움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내가 왜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잠시 후에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 수 없고, 자신들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가?

스페흐트 씨가 누구였든 그는 싱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창조자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를 살려내라고. (…)

인간들은 자신들이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괴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용해 많은 싱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만들고, 그런 다음에는 죽음처럼 두려워한다. (182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독자는 스페흐트와 싱어 사이의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의 감정을 포함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바로 이것뿐이다.

'그는 싱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고보니, <롤리타>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사람들은 괴물을 세상에 내놓는다'라는 문장이 씁쓸하게 읽혔다. 나약한 인간 존재의 모습 때문에, 어쩐지 쓸쓸하다.


스페흐트 또한 '단 하나의 불멸성'으로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창조자의 캔버스에 옮겨진 그 많은 모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페흐트의 아내인 리데베이가, 죽은 엄마의 입술자국이 찍혀 있는 컵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라도 자기 안의 사람들이 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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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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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온 걸 작년 겨울쯤 본 것 같은데, 손이 가지 않았다. 철? 자본? 노동? 첫 느낌은 딱 이거였다. 재미없겠다..

김숨이 최근 발표하고 있는 단편들을 따라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단편들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영영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괴하고 강렬한 소설이다.

마치 단편 같다는 인상을 주는 장편이다. 그 정도로 문장이 경제적이다. 그런데도 잘 읽힌다. 뚜렷한 서사가 없는데도. 

후각과 장면을 이미지화 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로 쇠 냄새가 난다.

 

마을 북쪽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마을 남자들은 너도나도 조선소 노동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을 갈구해왔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뿐이었다.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노동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곧 신앙이다.

철선이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그들에겐 변함없는 노동이 주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쇠를 신봉하기 시작한다. 멀쩡한 이를 다 뽑아서 무쇠 틀니를 끼우고, 무쇠 식칼을 수십 개나 사들이고, 쇠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염할 때도 구멍이란 구멍에 모조리 쇠를 박아넣고 쇠로 짠 관 속에 시체를 눕힌다.

마을은 점점 녹으로 가득 차고, 녹은 모든 걸 부식시킨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노동하다 죽어가고 죽지 않으면 조선소에서 쫓겨나 노동을 박탈당한다. 마을에는 폐병 환자가 늘어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소 노동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만들고 있다는 철선을 보지 못한다.

 

그는 문득 철선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지난 십 년 동안 철선의 완성만을 위해 힘써 일했지만, 그는 꿈에서조차 철선의 실체를 본 적이 없었다. 수십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있는 철판만을 보아왔을 뿐이다. (104쪽)

 

철선뿐 아니라, 조선소의 '주인되는 자' 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되는 자'는 오로지 조선소 곳곳에 매달아놓고 근면, 성실, 진보, 지향을 외치는 확성기로 존재할 뿐이다. 이 소름끼치는 진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김숨의 다른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밤새 수십 마리의 뱀장어를 잡아야 얼마의 돈이나마 벌 수 있는 아버지(「모일, 저녁」), 장장 구만 오천 킬로미터나 달린 중고 트럭으로 밤낮없이 이삿짐을 나르는 아버지와, 독성으로 손가락이 꺼멓게 죽어가도록 혁대에 본드를 붙이는 어머니 (「트럭」), 이십 년을 꼬박 싱크대공장 사장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하다가 교통사고 이후 운전대를 잡지 못해 바위만 타러다니는 아버지(「바위1」).   

소설이 끝나도, 그들의 노동만은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트럭」의 아버지는 자식이 취직을 하고난 뒤에도 자정쯤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삿짐을 나르러 집을 나선다. 그리고 아직 취직을 하지 못한 큰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어머니는 독성 때문에 환각에 취해 있으면서도 혁대에 본드를 펴바른다.

가족과 저녁을 먹기 위해 소설 내내 생선을 굽던 「모일, 저녁」의 아버지는, 생선을 굽다 말고 소설의 끝에 가서 홀연히 사라진다. 그는 뱀장어를 잡으러 나간 것이다. 오랜만에 집으로 온 딸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지겹도록 생선을 굽던 그는 결국 밥도 먹지 못하고 노동하러 사라진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고 말지만, 그의 노동은 새벽 내내 이어질 것이다.

 

이런 삶은, 세습된다.

그건 『철』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소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들의 아들들 또한 조선소 노동자가 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말한다. "얼른 자라서 조선소 노동자가 되어라."

 

조선소 노동자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오로지 조선소에서 주어지는 노동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온종일 힘써 노동하면서도 노동에 갈급했다.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일종의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선이었다. 그리고 노동은 일종의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했고, 노동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은 노동밖에 없었다. 행하여야 할 것 또한 노동밖에 없었다. 축복과 평안도 노동 안에서만 갈구했다. (19쪽)

 

나 또한 종종 노동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

아침 저녁 출퇴근 길에 이 책을 조금씩 읽었다. 일하러 가거나 하룻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이 '안도'였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집 안에만 있었던 일 년여의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이 '죄의식'이었다는 것 또한 말이다.

(그땐 부러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지나치게 노동하고 있다'는 식의 책만 찾아읽곤 했었다. 사람들에겐 아닌 척 했지만, 아니 나 스스로에게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속도 없고 밥벌이도 못하고 있다는 상황에 많이 불안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 사마실 때도,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살 때도 여지없이 죄의식이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내 가족이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자각. 

밥벌이를 하고 있는 지금은 커피 한 잔을 사마실 때마다 다른 이유로 흠칫흠칫 놀란다. 아, 난 이제 이걸 정당하게 사마셔도 되는구나 싶어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작가의 말 때문에 출근길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마을 사람들은 지붕 위에서 비를 쫄딱 맞으며 북쪽을 향해 목을 빼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철선이 물 위로 떠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지난 삼십사 년 동안 수천의 노동자들이 완성을 위해 매달려온 철선이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들을 태우고 지상낙원으로 데려다주기만을 바랐다. (……) 

"저기, 철선이다!"

그때 누군가 마을이 떠나가도록 소리 질렀고, 지붕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북쪽을 향해 젖은 몸을 일으켰다.

그 누군가 또 "철선이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햇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사람들은 철선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긴장된 침묵에 잠긴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저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철선'을 탄식처럼 외쳐댔다. 언젠가 만국박람회장에서처럼, 빛이 한순간 점멸하듯 사라져버릴까 두려워하며…… (259쪽)

 

그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은 정말로 철선을 본 적이 있느냐고.

 

작가의 말 말미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래도 된다면

일개일 뿐인, 세상의 모든 위대한 당신들께 이 소설을 바친다. 라고. 일개. '보잘것없는 한낱'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

나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일개', '위대한 당신들',

그리고, '그래도 된다면'이라는 글자를 눈이 시려질 때까지 쳐다봤다.

 

김숨의 다음 소설이,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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