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은 없기에
로랑스 타르디외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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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책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부치고 싶어하거나,
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하거나.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를 따질 수는 없다. 그냥 내 기분에 따른 분류니까. ^^;

이 책은 물론, 후자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서.
내가 멈춰 있었던 어떤 지점에 함께 멈춰 서서 감동하고 싶고,
또 더 나아가, 내가 놓친 부분을 누군가 짚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멈춰 섰다.
좋은 책은 고개를 박고 활자에 집중하게 만들지 않는다. 자꾸만 갈피를 덮고 허공을 응시하게 만든다.
그렇게 특별한 지점에 멈춰 서서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좋은 책이다. 로랑스 타르디외의 책은 나를 오래 멈추게 했다.

어떤 소설에 대해 말할 때, 그 소설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 책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이렇게나 간단하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 그 둘은 아주 오래 전, 아이가 실종되고 난 뒤 그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자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고, 남자는 몇십 년 만에 여자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만난다.
이게 다다. 게다가 이 책은 무척 얇다. 작은 판형에다, 138쪽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주느비에브의 슬픔에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
주느비에브는 하나뿐인 딸아이를 잃고 난 뒤, 자신의 공책에 이런 문장을 쓴다.


공허와 죽음 그 자체에 익숙해질 것. 매사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울 것. (69쪽)


어떻게 상대방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안다고 생각할 만큼 교만해질 수 있을까? 여기엔 어떤 소유욕이 작용하는 걸까? 


그에게 난 가만 내버려두라고, 또 그의 확신과는 반대로 그의 입장에서는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내 고통에 대해 운운하는 걸 그만두라고, 난 요구했다. 남의 고통을 '상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72쪽)

 
절망이 그들을 꺾기 전,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 뱅상과 주느비에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고통 때문에 침묵 속으로 침잠해버린 두 사람. 삼십 년이 지나 주느비에브는 죽어가고 있고, 뱅상은 마치 "심연에 맞서러 가는 사람처럼" 그녀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죽음이 확실해지고야 딸아이 클라라의 죽음을 마침내 믿게 된 주느비에브는 말한다.

 
왜 삶의 밝은 면만 기억해야 하는 걸까? 빛을 눈부시게 만드는 건 어둠인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끔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클라라를 잃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난 순간의 가치를 몰랐을 거야. 흙과 소소한 것들의 가치, 당신과 내가 함께하는 이 몇 시간의 가치를. 우리의 사랑보다도 강한 우정을 말이지. 슬퍼하지 마, 뱅상.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간다고 중요한 무언가를 잃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난 이 순간을 갖게 된 걸 감사해. 영원은 시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이 속에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주는 현기증 속에 있어. 내가 누구한테 감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죽음이 무언가를 향해 열려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 빛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거야. 빛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 그렇지? (109쪽)

 

이 둘처럼, 나는 감히, 헤어져 있더라도 서로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관계를 꿈꾼다.
비록 그것이 이 둘처럼, 똑같은 시련을 겪었다는 이유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안의 고통을 휘저어놓아야 하고, 모두가 평안히 잠든 밤의 무질서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런 고통을 함께했던 사람이 아직 건재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더 살아갈 수 있다.


갑자기 내 발아래 땅이 꺼진 날, 당장 내일 아침 만원지하철에 오를 용기를 어디에서 얻어야 하나 막막했던 밤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런 밤에도, 이런 문장들이 있어주었다면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리라.
빛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거라고, 빛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고, 문장이 속삭여준다.
그 앞에서 나는 선뜻이 '그렇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내 안에는 아직 많은 빛이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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