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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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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온 걸 작년 겨울쯤 본 것 같은데, 손이 가지 않았다. 철? 자본? 노동? 첫 느낌은 딱 이거였다. 재미없겠다..

김숨이 최근 발표하고 있는 단편들을 따라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단편들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영영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괴하고 강렬한 소설이다.

마치 단편 같다는 인상을 주는 장편이다. 그 정도로 문장이 경제적이다. 그런데도 잘 읽힌다. 뚜렷한 서사가 없는데도. 

후각과 장면을 이미지화 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로 쇠 냄새가 난다.

 

마을 북쪽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마을 남자들은 너도나도 조선소 노동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을 갈구해왔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뿐이었다.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노동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곧 신앙이다.

철선이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그들에겐 변함없는 노동이 주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쇠를 신봉하기 시작한다. 멀쩡한 이를 다 뽑아서 무쇠 틀니를 끼우고, 무쇠 식칼을 수십 개나 사들이고, 쇠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염할 때도 구멍이란 구멍에 모조리 쇠를 박아넣고 쇠로 짠 관 속에 시체를 눕힌다.

마을은 점점 녹으로 가득 차고, 녹은 모든 걸 부식시킨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노동하다 죽어가고 죽지 않으면 조선소에서 쫓겨나 노동을 박탈당한다. 마을에는 폐병 환자가 늘어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소 노동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만들고 있다는 철선을 보지 못한다.

 

그는 문득 철선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지난 십 년 동안 철선의 완성만을 위해 힘써 일했지만, 그는 꿈에서조차 철선의 실체를 본 적이 없었다. 수십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있는 철판만을 보아왔을 뿐이다. (104쪽)

 

철선뿐 아니라, 조선소의 '주인되는 자' 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되는 자'는 오로지 조선소 곳곳에 매달아놓고 근면, 성실, 진보, 지향을 외치는 확성기로 존재할 뿐이다. 이 소름끼치는 진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김숨의 다른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밤새 수십 마리의 뱀장어를 잡아야 얼마의 돈이나마 벌 수 있는 아버지(「모일, 저녁」), 장장 구만 오천 킬로미터나 달린 중고 트럭으로 밤낮없이 이삿짐을 나르는 아버지와, 독성으로 손가락이 꺼멓게 죽어가도록 혁대에 본드를 붙이는 어머니 (「트럭」), 이십 년을 꼬박 싱크대공장 사장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하다가 교통사고 이후 운전대를 잡지 못해 바위만 타러다니는 아버지(「바위1」).   

소설이 끝나도, 그들의 노동만은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트럭」의 아버지는 자식이 취직을 하고난 뒤에도 자정쯤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삿짐을 나르러 집을 나선다. 그리고 아직 취직을 하지 못한 큰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어머니는 독성 때문에 환각에 취해 있으면서도 혁대에 본드를 펴바른다.

가족과 저녁을 먹기 위해 소설 내내 생선을 굽던 「모일, 저녁」의 아버지는, 생선을 굽다 말고 소설의 끝에 가서 홀연히 사라진다. 그는 뱀장어를 잡으러 나간 것이다. 오랜만에 집으로 온 딸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지겹도록 생선을 굽던 그는 결국 밥도 먹지 못하고 노동하러 사라진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고 말지만, 그의 노동은 새벽 내내 이어질 것이다.

 

이런 삶은, 세습된다.

그건 『철』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소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들의 아들들 또한 조선소 노동자가 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말한다. "얼른 자라서 조선소 노동자가 되어라."

 

조선소 노동자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오로지 조선소에서 주어지는 노동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온종일 힘써 노동하면서도 노동에 갈급했다.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일종의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선이었다. 그리고 노동은 일종의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했고, 노동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은 노동밖에 없었다. 행하여야 할 것 또한 노동밖에 없었다. 축복과 평안도 노동 안에서만 갈구했다. (19쪽)

 

나 또한 종종 노동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

아침 저녁 출퇴근 길에 이 책을 조금씩 읽었다. 일하러 가거나 하룻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이 '안도'였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집 안에만 있었던 일 년여의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이 '죄의식'이었다는 것 또한 말이다.

(그땐 부러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지나치게 노동하고 있다'는 식의 책만 찾아읽곤 했었다. 사람들에겐 아닌 척 했지만, 아니 나 스스로에게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속도 없고 밥벌이도 못하고 있다는 상황에 많이 불안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 사마실 때도,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살 때도 여지없이 죄의식이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내 가족이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자각. 

밥벌이를 하고 있는 지금은 커피 한 잔을 사마실 때마다 다른 이유로 흠칫흠칫 놀란다. 아, 난 이제 이걸 정당하게 사마셔도 되는구나 싶어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작가의 말 때문에 출근길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마을 사람들은 지붕 위에서 비를 쫄딱 맞으며 북쪽을 향해 목을 빼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철선이 물 위로 떠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지난 삼십사 년 동안 수천의 노동자들이 완성을 위해 매달려온 철선이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들을 태우고 지상낙원으로 데려다주기만을 바랐다. (……) 

"저기, 철선이다!"

그때 누군가 마을이 떠나가도록 소리 질렀고, 지붕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북쪽을 향해 젖은 몸을 일으켰다.

그 누군가 또 "철선이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햇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사람들은 철선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긴장된 침묵에 잠긴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저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철선'을 탄식처럼 외쳐댔다. 언젠가 만국박람회장에서처럼, 빛이 한순간 점멸하듯 사라져버릴까 두려워하며…… (259쪽)

 

그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은 정말로 철선을 본 적이 있느냐고.

 

작가의 말 말미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래도 된다면

일개일 뿐인, 세상의 모든 위대한 당신들께 이 소설을 바친다. 라고. 일개. '보잘것없는 한낱'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

나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일개', '위대한 당신들',

그리고, '그래도 된다면'이라는 글자를 눈이 시려질 때까지 쳐다봤다.

 

김숨의 다음 소설이,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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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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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단조롭다고 느껴질수록, 소설을 읽는 일이 더 즐겁다.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세계 그 자체보다는, 자기들이 본 것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들이 좋다.

 

한창훈의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 선 것처럼 멀미가 났다.

표제작인 '나는 여기가 좋다'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평생 "바다 한가운데 몇 뼘 땅일 뿐인 섬과 몇 발자국 나무판자인 배에 떠서 살았던" (33쪽)

천상 뱃사람인 그는 이제 배도 잃고 빚만 떠안은 상태로 늙어버렸다. 설상가상 아내마저 그를 떠나려고 한다.

 

"난 전생에 뭔가 큰 죄를 졌어라우."

그녀는 깊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무슨 말인가."

"섬에서 태어났응께." (17쪽)

 

나는 섬에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섬에 대해,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 걸어도 바다, 뒤로 걸어도 바다, 옆으로 걸어도 바다가 나오는 몇 뼘 땅일 뿐인 섬.

아내는 그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육지로 같이 가든지, 아니면 헤어지든지. 당신은 육지를 무서워하는 것뿐이라고.

배를 팔고 그 배를 보내기 전날,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낚시를 나온 밤. 식구들 한동안 반찬거리라도 할 생각으로 낚은 고기들을 관 덮듯 묶어버린 그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아내를 따라 육지로 나갔을까?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나는 여기가 좋다'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거기서부터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뒤에 실려 있는 '섬에서 자전거 타기'에는 '나는 여기가 좋다' 속의 사내로 보이는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그는 아내가 떠난 뒤 섬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 두 편을 굳이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았다.

'섬에서 자전거 타기'는 가족과 배를 잃은 선장과 자살하러 섬으로 들어온 한 여자를 등장시켜 그들의 절망적인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다. '나는 여기가 좋다'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생생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도 섬에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선전포고한 아내는 남편이 갈치를 낚아올리자 아무렇지 않게 도마와 칼을 집어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손질한다. 나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질긴 근육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한창훈이라는 소설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작품은 바로 '밤눈'이다. 한밤 중에 이 소설을 읽다가 정말 펑펑 울었다.

그런 소설들이 있다. 내용이나 인물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도 유독 그 공간만이 뚜렷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경우.

하지만 이 소설은 인물과 공간이 잘 섞여들어, 그 인물이 소설 속 공간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 소설은 마치 이인극 같다. 한정된 공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술집에서 한 남자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주인여자는 조곤조곤 사내의 술상대를 해주고 있는 그런 밤, 눈이 내린다. 소리없이 밤눈이 내린다. 주인여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밤눈이 내리는 소설 속 정취가 잘 살아나고 있는 까닭은 이런 문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사내들이 어지럽게 만들어놓은 발자국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발자국은 흰 천을 덮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45쪽)

뭔 이야기 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으까.

눈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하며 내리는 눈이란 어쩌면 하늘도 뭔가 이야기를 한다는 소리 아니겠냐고 괜히 덧붙였다. (60쪽)

 

사실 감동에서 한발자국 빠져나와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고 그 사랑이란 결국 불륜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개인취향을 넘어서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감동이 먼저 왔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송기원의 '늙은 창녀의 노래'도 많이 생각났다. 어쩐지 굴곡많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늘 애잔하다.

 

눈이 따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이랑 있으면서 알었소. 겨울에, 그 사람 품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탄불 갈러 나오면 이런 눈이 내리고 있었소. 그러면 물 흥건한 정지의 노란 탄불이며 잠시 두고 온 그 사람 품이 왜 그리 따시던지. 멍하니 눈 내리는 것 보다가 후다닥 들어가면 그 사람은 내 손에 묻은 물 한 방울 한 방울 일일이 닦아주고, 혀로 핥아주고. 흐흐.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뜻한 것입디다.

그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 (60쪽)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연애에 실패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패한 연애의 반대선상에 성공한 연애가 있다는 말인데, 연애의 성공은 대체 뭘까. 정말 '결혼'이라고 말할 셈인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연애가 모두 실패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건가?

내가 생각하는 '성공한 연애'는 결혼이 아니었다. 평생가도 잊을 수 없는, 잊을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을 하나 갖는 일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가슴이 많이 아파지는 일이겠지만 문득문득 생각하면 그때가 정말 나에게 빛나는 시절이었구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일은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밥 먹고 속이 든든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여자가 말한다.
 
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연애를 해봉께, 같이 사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디다. 마음이 폭폭하다가도 그 사람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기어나온단 말이요. (61쪽)
 
그렇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손님 가시기 길 나쁘겄네. 그래도 이런 눈은 춥들 안 한게요. 그럼 안녕히 가시게라우. 그는 술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을 다 읽고나면, 어쩐지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눈은 춥지 않다는데,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듯한 것이라는데, 웃풍 부는 내 방이 춥고 또 책을 들고 있는 손이 너무 시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춥다는 건, 한때 따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작은 온기로 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덥혀야 하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려주는 '바람이 전하는 말'이나 '가장 가벼운 생'을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그랬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어미의 죽음이란, 세상천지에 안길 품이 없어져버렸다는 소리이다. 물론 그녀는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이렇게 울며 안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라서 그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나그네 품속 깊이 갈무리한 금반지 같은 거였다. (121쪽)
 
"난 유산을 딱 하나 받었어. 그것이 뭔지 알어?"
"글쎄요."
"아부지의 죽음이여. 그게 내가 받은 유산이여."
"죽음도 유산이 되는기우?"
"되더먼. 나야 들 배워노니께 조리 있게 말은 못 하지만 자식이 부모한테 배울 것은 그거 하나뿐인 듯싶은 겨.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말이여, 죽는다는 거, 죽어 읎어진다는 거, 그것 하나로도 교훈이 되더먼." (166쪽)
 
이런 묵직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풍문처럼 느껴졌던 죽음이 손 안에 잡힌다. 죽음이 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서 좋았던 소설들은 대부분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듯싶다.
인물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고, 이야기만이 저 먼 곳까지 가닿아 저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뒤편으로 갈수록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던 소설집이지만, 질기고 단단한 언어가 남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바다냄새를 맡았다. 한창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어쩐지 바다에 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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