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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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단조롭다고 느껴질수록, 소설을 읽는 일이 더 즐겁다.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세계 그 자체보다는, 자기들이 본 것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들이 좋다.

 

한창훈의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 선 것처럼 멀미가 났다.

표제작인 '나는 여기가 좋다'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평생 "바다 한가운데 몇 뼘 땅일 뿐인 섬과 몇 발자국 나무판자인 배에 떠서 살았던" (33쪽)

천상 뱃사람인 그는 이제 배도 잃고 빚만 떠안은 상태로 늙어버렸다. 설상가상 아내마저 그를 떠나려고 한다.

 

"난 전생에 뭔가 큰 죄를 졌어라우."

그녀는 깊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무슨 말인가."

"섬에서 태어났응께." (17쪽)

 

나는 섬에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섬에 대해,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 걸어도 바다, 뒤로 걸어도 바다, 옆으로 걸어도 바다가 나오는 몇 뼘 땅일 뿐인 섬.

아내는 그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육지로 같이 가든지, 아니면 헤어지든지. 당신은 육지를 무서워하는 것뿐이라고.

배를 팔고 그 배를 보내기 전날,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낚시를 나온 밤. 식구들 한동안 반찬거리라도 할 생각으로 낚은 고기들을 관 덮듯 묶어버린 그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아내를 따라 육지로 나갔을까?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나는 여기가 좋다'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거기서부터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뒤에 실려 있는 '섬에서 자전거 타기'에는 '나는 여기가 좋다' 속의 사내로 보이는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그는 아내가 떠난 뒤 섬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 두 편을 굳이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았다.

'섬에서 자전거 타기'는 가족과 배를 잃은 선장과 자살하러 섬으로 들어온 한 여자를 등장시켜 그들의 절망적인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다. '나는 여기가 좋다'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생생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도 섬에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선전포고한 아내는 남편이 갈치를 낚아올리자 아무렇지 않게 도마와 칼을 집어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손질한다. 나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질긴 근육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한창훈이라는 소설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작품은 바로 '밤눈'이다. 한밤 중에 이 소설을 읽다가 정말 펑펑 울었다.

그런 소설들이 있다. 내용이나 인물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도 유독 그 공간만이 뚜렷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경우.

하지만 이 소설은 인물과 공간이 잘 섞여들어, 그 인물이 소설 속 공간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 소설은 마치 이인극 같다. 한정된 공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술집에서 한 남자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주인여자는 조곤조곤 사내의 술상대를 해주고 있는 그런 밤, 눈이 내린다. 소리없이 밤눈이 내린다. 주인여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밤눈이 내리는 소설 속 정취가 잘 살아나고 있는 까닭은 이런 문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사내들이 어지럽게 만들어놓은 발자국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발자국은 흰 천을 덮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45쪽)

뭔 이야기 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으까.

눈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하며 내리는 눈이란 어쩌면 하늘도 뭔가 이야기를 한다는 소리 아니겠냐고 괜히 덧붙였다. (60쪽)

 

사실 감동에서 한발자국 빠져나와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고 그 사랑이란 결국 불륜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개인취향을 넘어서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감동이 먼저 왔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송기원의 '늙은 창녀의 노래'도 많이 생각났다. 어쩐지 굴곡많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늘 애잔하다.

 

눈이 따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이랑 있으면서 알었소. 겨울에, 그 사람 품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탄불 갈러 나오면 이런 눈이 내리고 있었소. 그러면 물 흥건한 정지의 노란 탄불이며 잠시 두고 온 그 사람 품이 왜 그리 따시던지. 멍하니 눈 내리는 것 보다가 후다닥 들어가면 그 사람은 내 손에 묻은 물 한 방울 한 방울 일일이 닦아주고, 혀로 핥아주고. 흐흐.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뜻한 것입디다.

그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 (60쪽)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연애에 실패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패한 연애의 반대선상에 성공한 연애가 있다는 말인데, 연애의 성공은 대체 뭘까. 정말 '결혼'이라고 말할 셈인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연애가 모두 실패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건가?

내가 생각하는 '성공한 연애'는 결혼이 아니었다. 평생가도 잊을 수 없는, 잊을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을 하나 갖는 일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가슴이 많이 아파지는 일이겠지만 문득문득 생각하면 그때가 정말 나에게 빛나는 시절이었구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일은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밥 먹고 속이 든든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여자가 말한다.
 
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연애를 해봉께, 같이 사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디다. 마음이 폭폭하다가도 그 사람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기어나온단 말이요. (61쪽)
 
그렇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손님 가시기 길 나쁘겄네. 그래도 이런 눈은 춥들 안 한게요. 그럼 안녕히 가시게라우. 그는 술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을 다 읽고나면, 어쩐지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눈은 춥지 않다는데,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듯한 것이라는데, 웃풍 부는 내 방이 춥고 또 책을 들고 있는 손이 너무 시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춥다는 건, 한때 따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작은 온기로 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덥혀야 하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려주는 '바람이 전하는 말'이나 '가장 가벼운 생'을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그랬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어미의 죽음이란, 세상천지에 안길 품이 없어져버렸다는 소리이다. 물론 그녀는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이렇게 울며 안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라서 그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나그네 품속 깊이 갈무리한 금반지 같은 거였다. (121쪽)
 
"난 유산을 딱 하나 받었어. 그것이 뭔지 알어?"
"글쎄요."
"아부지의 죽음이여. 그게 내가 받은 유산이여."
"죽음도 유산이 되는기우?"
"되더먼. 나야 들 배워노니께 조리 있게 말은 못 하지만 자식이 부모한테 배울 것은 그거 하나뿐인 듯싶은 겨.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말이여, 죽는다는 거, 죽어 읎어진다는 거, 그것 하나로도 교훈이 되더먼." (166쪽)
 
이런 묵직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풍문처럼 느껴졌던 죽음이 손 안에 잡힌다. 죽음이 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서 좋았던 소설들은 대부분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듯싶다.
인물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고, 이야기만이 저 먼 곳까지 가닿아 저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뒤편으로 갈수록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던 소설집이지만, 질기고 단단한 언어가 남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바다냄새를 맡았다. 한창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어쩐지 바다에 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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