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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드릭 이야기 ㅣ 네버랜드 클래식 20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C. E. 브록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드릭 이야기"는 아주 센티멘탈하고 다분히 작위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다. 원작자의 다른 유명 소설들인 "소공녀(the Little Princess)"나 "비밀의 화원(the Secret Garden)"에 비해 소설적 나레이션 구성이 훨씬 떨어진다. 주인공 세드릭 에롤이 겪는 위기라고는 가짜 Lord Fauntleroy에 의해서 공자(lordship)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을 때일 뿐, 도데체가 문제라고는 눈을 씼고 찾아도 없다. 소설적 구조가 이토록 느슨하다면, 등장인물의 성격은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는가? 천만의 말씀. 악한과 선인은 흑과 백처럼 반대 선상에 서있고, 악한자는 결코 선한자를 이기지 못한다. 세드릭은 7살이라기에 너무 조숙하고 성스러울 정도로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처음 부터 끝까지 세드릭은 완벽하다. 잘생기고 인자하며 똑똑한데다가 몸도 튼튼한, 뛰어난 소년 스포츠맨이다. 세드릭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으례 겪기 마련인 문제나 고난으로 고민하는 법이 없다. 왜냐면 세드릭은, 세상에는 문제와 고난이 가득 차있으며, 사람들은 여러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드릭이라는 캐릭터는 변하지도 발전하지도 않는다. 젊어서 과부가 된 에롤 부인(세드릭의 엄마)는 옛날얘기에 잘 등장하는 전형적인 수절하는 미모의고귀한 미망인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작가는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 영국인이, 옛 식민지이자 떠오르는 새 강국인 미국에 대해 가진 편견과 환상을, "세드릭 이야기"에 등장하는 미국인들을 통해서 그대로 보여준다. 영국과 귀족계급, 유럽식 전통을 그냥 무조건 미워하는 식료상 홉스씨, 일자무식이지만 쾌활하고 실은 똑똑한 구두닦이 딕, 서부의 목장(ranch)에 큰 돈을 벌러간 벤(아아, 미국 하면 떠오르는 서부 카우보이에 대한 낭만의 발로!), 사기꾼인 이탈리아계 미국 여자(이탈리아인 사기꾼은 아일랜드인 술주정뱅이만큼이나 Anglo-Saxon의 우월의식이 빚어낸 전형적인 편견이지 않는가),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수하고 사랑스럽기만한 미국 어린이 세드릭. 이 책에서의 미국은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품위가 없으면서도 신선한 에너지로 충만하고, 그러면서도, 전통적이며 문명적인 영국만은 못한 곳이다.
그렇다면 번역은 어떤가?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나쁘지 않다. 하지만 세드릭이 엄마를 부를때 쓰는 "Dearest"를 정말 문자 그대로 "내 사랑"이라고 옮긴 건 좀 아니라고 본다. 예전에 계몽사 문고판에서 쓴 "제일 좋은 우리 엄마"가 차라리 어감에서 나았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세드릭 이야기(Little Lord Fauntleroy)"의 진짜 주인공은 폰틀러로이 공(公) 세드릭이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인 에롤 백작이다. 냉담하고 고집불통에 자기자신만 알고 가문의 명예만 중시하다가, 늙어서 몸은 아프고, 배우자도 자녀도 형제도 친구도 하나 없이 쓸쓸하게 지내며, 부리는 하인들과 소작인들에 군림하는 것외에는 사는 의미가 없는 백작. 실은 가장 가엾으며 따라서 가장 인간적인 고민에 빠져있는 백작에게 있어서 세드릭은 일생 마지막순간에 다가온 기회이다.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지만,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받아들인 생면부지의 손자에 의해 점차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깨달아 가는 과정은 훈훈하다. 잘생기고 품행바른 손자에 대한 관심은 차차 그 손자의 눈에 훌륭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하고, 손자에 대한 자부심이 손자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을 때, 백작은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너그러움을 터득하게 된다. 하지만 "세드릭 이야기"는 동화라는 카테고리에 묶여서 세드릭이라는 완전무결의 매력없는 캐릭터를 언제나 전면에 내새우려 한다. 그게 이 책의 한계이고, 왜 "비밀의 화원"보다 못한 책인지에 대한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