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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전2권 ㅣ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평점 :
비록 600페이지 짜리 두 권이지만, 이 책은 무척 쉽게 읽힌다. 내가 그의 80년 인생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같은 나라에서 공유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인생 자체가 그 어떤 드라마 보다도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오래 걸렸다. 이 책의 슬픈 결말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결말이 두려워서 쉽게 쉽게 넘어가는 페이지를 일부러라도 붙들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난과 영광의 연속이었던 그의 인생이 만약 픽션이라면 기승전결을 거쳐서 행복한 결말로 끝났어야했다. 가령 2전3기의 대통령 당선 순간이나, 힘겹게 이룩한 남북정상회담에서... 아니면 남북정상회담에서 뿌린 씨앗이 민족의 염원인 통일로 열매 맺는 장면 쯤에서 끝났어야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그가 평생을 거쳐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남북관계는 급냉각되어 교류는 끊기고 대신 서로 포격을 주고받는 대치 상태이며 목숨걸고 쟁취한 민주주의의 원칙들은 허무하게 버려지고 있다. 그는 작년에 우리 곁을 떠났고 그 1년 반동안 더 많은 것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는 눈감기 전에 이미 현실이 이런 안타까운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보고 말았다.
역경의 시대와 그와 더불어 파도를 탔던 그의 삶을 빼곡히 기록하느라 그랬겠지만, 그는 무척 담백한 어조로 그의 인생을 하나 하나 기록한다. 혹 먼 훗날 그의 시대를 전혀 겪지 않은 사람이거나, 다른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본다면 다소 지루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맥락과 배경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아는 나로서는 세세한 설명없이도 그가 겪고 고민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부분에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할수도 있겠다는 대목도 있고, 그에게 해명의 시간을 부여한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늘 지적하는 87년의 후보단일화 실패나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특검이나 임기말의 비리 의혹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담담한 기술이 해명을 대신 하고 있는데 마치 그 부분을 보지 말고 그의 인생 전체를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저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 이라는 그 기간은 ‘그 기간이 우리의 절정기이고 그런 기간이 다시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까’ 두려우리 만큼 우리에겐 정말 눈부신 기간이었다. (우리가 누구고 저들이 누군지는 묻지 마시길...) 그러나 그 기간에 우리가 얻은 것이라고는 적들이 그만큼 강하고 집요하며 악랄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 뿐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든다.
그런데 그가 아직 우리에게 말을 해줄수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맥빠져있지 말라고 이야기할 것만 같다. 아니 그런 이야기보다는 아래 인용하는 구절처럼 뜬금없는 이야기를 할것 같다.
'...... 투석을 받지 않는 날은 아침부터 여유로왔다. 기분도 절로 좋았다. 별일이 없으면 점심을 먹고 아내와 거실에서 마당을 보았다. 참새들이 찾아와 지저귀고 꽃들은 방실거렸다. 커피 맛은 좋고 모든 것이 향기로우니 시간마저 달콤했다. 나는 뜰에 있는 나무와 화초들을 순서대로 외울 수 있었다. 장미꽃이 피면 아내더러 '꽃구경 값'을 내라고 했다. 내가 돌봤으니 내 것이라고 우겼다. 그러면 아내는 돈이 없다며 차용증을 써 주었다. 100만 원짜리도 있고, 10만 원 짜리도 있었다. 내가 이를 보관하고 있는 줄 아내는 모를 것이다. 이 작은 뜰에 이렇듯 행복이 고여 있었다. 거실에서 30분 정도 그러한 행복을 마신 후 침실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 .....'
그의 말대로 그의 인생은 눈부셨고, 그는 혼자 떠났지만 그는 외롭지 않을 것만 같다. 우리는 여럿이 남아있지만 그가 없어서 외롭다. 외로와 눈물이 난다.
그가 외롭지 않을 것 같은 이유는 비록 그가 이룬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들을 보고 갔지만, 또 더 많은 것이 그의 사후에 무너질것을 알았겠지만 그는 평생을 걸쳐 잊지 않았던 역사에 대한 믿음을 품고 떠났기 때문이다. 가끔 또 외로와 지면 이 책을 꺼내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