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머피와 랫치드 수간호사 역을 소화한 잭 니콜슨과 루이스 플래처의 연기, 영화 구성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책으로도 읽었는데, 켄 키시라는 작가의 문단 데뷔작 치곤 대단한 작품이다. 그런데 역시 책보다는 종합예술인 영화가 더 가슴에 와닿았긴 하다.
켄 키시가 처음엔 영화제작에 함께 참여했다가 원작 화자인 추장이 아니라 맥버피를 중심으로 각본이 진행되자 도증에 관둬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문학이 영화에 종속당하지 않겠다는 자기 신념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의 속어이며 억업체제를 뜻한다.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태어나자마자 특정 사회제제에 강제로 편입당한다. 부모를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체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난 역사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지구엔 만인을 만족시키는 체제는 없다. 지금의 자본주의도, 실험을 거쳤던 사회주의도 만인은 커녕 그 체제를 거머쥐고 있는 소수 집단에게 대다수 인민들이 봉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체제 자산의 절대 몫을 장악하고 1%는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99%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착취, 전쟁, 빈곤, 기아는 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건 그 수호자들이 인민들의 의식을 각종 수단으로 조종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에서 늘 탈출을 꿈꾸지만 앞에 놓인 길은 억압자가 되거나, 억압자의 관리자가 되거나, 방관자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를 '루저'라고 자조하며 순응, 저항을 포기하는 것 밖엔 없다.
체제의 진실을 깨닫고 저항하는 자는 결국 유배되거나 거세되고 만다. 원작소설은 그 억압체제를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라고 암시하진 않았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라기 보다는 실존주의 경향이 강한 작품이다. 미국 주류사회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고 히피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나를 잠깐 돌아본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설 속 정신병동 같은 조직에 몸담은 적도 있었다.
하도 괴로원 때론 맥머피처럼 저항했고 때론 추장처럼 탈출했다.
물론 순응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나도 참 종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병동에서의 탈출은 실패했다. 그러나 늘 일탈은 꿈꾸고 있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시를 좋아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그는 일찌기 이 세계가 모순과 위선, 추악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옛날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재밌다. 온 여성을 열광시켰다는데 과연 그럴까? 기사를 그렇게 쓴 이유가 짐작이 간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보다는 여성이 문학, 영화의 주고객이기 때문이다.
